중년의 폭망 감독 따위와 우연히 마주치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서연은 나를 알아보자마자 황송하게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 주었다.
“감독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양 피디? 아니 양 피디야말로 여기는 어쩐 일이야?”
“저는 일이 좀.. 아! 감독님이 출력하신 시나리오는 책상 위에 올려뒀는데 보셨어요?”
“시나리오?”
“‘가족사냥’이요. 프린터에 출력되어 있더라고요.”
아..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다.
“고마워. 내가 챙겼어야 되는데..”
“괜찮아요. 여기서 미팅 있으세요?”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어져서.. 그나저나 내가 괜히 방해된 건 아닌 지 모르겠네.. 난 신경 쓰지 말고..”
“아니에요. 사실은 저.. 시나리오 쓰러 왔어요.”
“기획팀에서 시나리오도 써?”
“기획팀 일은 아니고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서요.”
“맞다. 영화 감독이 꿈이라고 했지?”
“네.”
“어쩐지 양 피디는 뭔가 다르다 했어. 모니터가 예리하더라고. 인사이트도 풍부하고. 확실히 기획팀 직원으로만 머물기엔 아까워. 감독 하면 잘 할 것 같아.”
누군가의 인정에 목이 말라 있을 서연의 갈증을 채워주니 자연스럽게 수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서연이 이렇게 말이 많은 줄은 몰랐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이야기부터 공모전에 냈다가 떨어진 장편 시나리오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서연의 내면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분노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밀리언 필름에 향해 있었다. 어느덧 수다는 밀리언 필름의 석 팀장과 강 대표의 뒷담화로 옮겨갔다. 들어보니 석 팀장이 잘못한 건 없었다. 강 대표도 마찬가지. 대표가 월급 줬으면 됐지 그 이상은 바라면 안 된다. 순전히 서연 잘못이다. 꿈은 영화 감독인데 현실은 신생 영화사 기획팀 직원이다보니 자신을 감독으로 대접해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서연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바다. 나는 밀리언 필름은 제작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생 제작사고 강 대표의 상태를 보아하니 하루 빨리 다른 영화사로 옮기는 것만이 커리어에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서연은 안색이 밝아지며 석 팀장에게 절대 비밀인데 사실은 이미 연차 내고 다른 회사 면접 보고 온 적도 있다고 했다. 어느 회사인지는 알려줄 수 없고 모 메이저 투자 배급사라고 했다. 영화 감독이 꿈이지만 잠깐이라도 제대로 된 영화사에 다녀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에게 밀리언 필름의 뒷담화를 시원하게 까는 걸 보면 나를 자신과 같은 편이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내가 밀리언 필름에서 찬밥 취급이라 그런 모양이다. 내가 석 팀장에게 고자질 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에휴.. 이번 생은 글렀나봐요. 졸업 작품도 영화제 진출에 실패했고..”
“에이 그건 아니지! 졸업작품은 별로였지만 대박 감독이 된 케이스가 얼마나 많은데! 졸업 작품 그깟거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냐. 나만 봐도 그래. 졸업 작품으로 영화제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감독 데뷔에는 성공했잖아?”
말해놓고 보니 나의 케이스는 서연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서연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잘 쓰면 되는 거야. 서연씨도 그 정도는 알잖아? 요즘 세상이 그래. 졸업 작품 한 편 잘 만들었다고 입봉시켜주는 시대는 우리 때 끝났어. 독립영화면 모를까.”
“독립영화 준비라도 할까 봐요. 아 맞다! 감독님 혹시 윤보영 감독님 아세요? 같은 학교시던데..”
“윤보영? 당연히 알지. 보영이 누나. 학교 같이 다녔어.”
“정말요? 제가 윤 감독님 작품 정말 좋아하거든요.”
윤보영 감독은 영화과 1년 선배이고 졸업 이후에 여성 서사 위주의 독립 단편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는데 얼굴이 보이시하면서도 매력있게 생긴 편이라 유독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물론 내 스타일은 아니고 친하지도 않다. 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술 자리에서 젠더 문제로 논쟁을 하고 난 뒤 사이가 소원해져버렸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 지난 얘기고 서연에게는 친한 척 했다.
“나랑 친해. 새내기 때 누나 단편 영화 스태프도 했었고.”
“우와.. 부러워요. 윤 감독님은 학교 다닐 때 어떠셨어요?”
“당차고 야무졌지. 나중에 누나 만나면 얘기해줄게. 울 회사 피디가 누나 팬이라고..”
“그래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제 롤 모델인걸요.”
“단편영화 감독이 꿈이었어?”
“그건 아니고요. 단편영화로 시작해서 장편영화로 진출하고 싶었거든요. 윤 감독님처럼.”
그렇구나.. 나도 감독이지만 서연에게 나는 롤 모델도 좋아하는 감독도 아니었다. 하기야 폭망 감독 주제에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 된다. 이렇게 상대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자. 윤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선 보기 드물게 꾸준히 활동하는 여자 감독이니까 롤 모델인 거겠지. 비록 쉰 지는 좀 됐지만.
“누나가 쉰 지 좀 오래 됐는데 용케 기억하고 있네?”
“아니에요. 얼마 전에 영진위 제작 지원 받아서 한 편 찍으셨어요. 건너 건너 아는 애가 그 영화 스크립터였거든요.”
“단편영화 만들어봤자지.”
“이번에 만드신 건 장편이에요. 얼마 전에 어디 올라온 인터뷰 보니까 영화제 먼저 돌고 개봉 할 거라던데요? 영화도 잘 나왔대요.”
“아 그랬구나. 잘 하고 있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며 속이 뒤틀렸다. 남 영화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이 좋은 날 왜 쓸데없이 윤보영 칭찬을 들어야하는 거지?
“저는 윤 감독님처럼 단편영화부터 시작할 자신은 없고.. 그래서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거든요. 그런데 공모전에는 왜 맨날 떨어지는 걸까요?”
“에이.. 공모전은 운빨이야. 절대 공모전에 일희일비 하지 마. 공모전 된다고 데뷔하는 것도 아니고 공모전에 중독되면 계속 공모전에만 매달리게 돼. 공모전 중독되면 답도 없는 거 알지? 그리고 내가 공모전 심사에도 참여해 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될 성 싶은 작품은 심사위원들이 아이템만 몰래 빼 가. 상 주면 자기 마음대로 못하니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임문호 감독이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도운 적은 있으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될까요? 단편은 엄두가 안 나고 장편은 맨날 떨어지고..”
“가장 확실한 건 키맨을 만나는 거지.”
“키맨이요?”
“응. 양 피디 아니 양 감독 작품을 메이드 시켜줄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요?”
은근슬쩍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지 인맥 자랑을 시작했다. 서연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인맥이 넓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서연도 영화과 출신답게 은근히 발이 넓었다. 대부분 서연의 졸업 작품을 도와준 오빠들이라고 했다.
뭐 예쁘니까 당연하지. 은근히 질투심이 자극되었다. 설마 도발하는 건가? 나도 그 오빠들 중 하나가 되라는 거야? 나한테 아는 오빠들 자랑을 왜 하는 거지? 뭔가 좀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발정난 이십대도 아니고 예쁘장한 여자애가 눈웃음 좀 친다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정도로 어리숙해 보인 걸까?
“감독님! 혹시 제 시나리오 한 번 봐 주실 수 있으세요?”
걸렸다! 카페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단편?”
“아니에요. 장편요. 지금 쓰고 있는 거요. 거의 완성했거든요.”
“영광인걸? 얼른 보내줘.”
“이메일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그래. 천천히 보내줘도 돼. 너무 서두르지 말고.”
마음 같아선 술 한 잔 하면서 작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적절해 보였다. 길게 보고 서두르지 말자.
“꼭 읽어주실 거죠? 진짜 감독님에게 모니터를 받는 건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나라도 괜찮다면야..”
“당연히 괜찮죠! 감독님 정도면 차고 넘치세요!”
어깨가 으쓱해지며 서연을 파트너로 한 감독 인생 2회차가 펼쳐졌다. 시나리오 모니터를 계기로 친해진 다음 차기작 들어가면 스크립터로 인연을 이어가고 은근슬쩍 썸을 타다가 관계가 깊어지면 아내와는 어떡하지? 유정이 순순히 이혼해 줄까? 세미는 가만 있지 않을 텐데.. 막상 이혼까지 했는데 서연이 변심한다면? 아니야 서연이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결혼에 골인한다 해도 서연도 여자인데 뭐 다른 게 있을까?
남자와 여자 둘이서 커피를 마시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다음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될 줄 알았는데 서연은 약속이 있다며 짐을 챙겨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에서 나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닭 쫓던 개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내가 이 구역의 루저구나.
내가 졌다. 서연이 진짜로 약속이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갔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진 것이다. 만약 내가 폭망 감독이 아니라 잘 나가는 감독이었어도 이렇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집으로 가 버렸을까? 그러길 바랄 뿐이다. 폭망 감독과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성과가 없진 않았다. 서연이 시나리오를 보내준다고 했으니 앞으로는 영화사 직원과 감독 말고 시나리오 모니터를 핑계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연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채로 집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소주 한 잔이 간절했는데 동민과는 아니었고 석 팀장은 부담스러웠다. 괜히 이 시간에 불러 냈다간 그 따위로 일하면 차기작은 영영 못 만들거란 잔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니가 왜 데뷔작부터 폭망하고 지금까지 안 됐는지 아냐는 따위의 들으나 마나 한 소리 역시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혜나라면 어떨까? 곧장 혜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마침 혜나에겐 동민 관련해서 입을 맞춰둬야 할 필요도 있었다.
“네 감독님!”
혜나는 내 전화를 받자마자 ‘감독님’이라고 불러주었고 덕분에 서연이 나랑 술까지는 안 마셔주고 집에 가 버리는 바람에 하락한 자존감이 불끈 상승했다. 혜나는 술집에 있는 듯 주변이 시끌법적 했지만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회사 근처 카페로 와 줄 수 있냐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
혜나는 카페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 멀리서부터 술냄새가 풀풀 났고 얼굴은 발그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혜나가 맞은 편에 앉자마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동민이 때문인데.. 우리 사이를 의심하는 것 같아. 혜나씨랑 잤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요?”
“안 잤다고 했지. 그러니까 입을 맞춰줬으면 좋겠어.”
“맞춰드릴 순 있는데 왜 그래야 되죠?”
“그거야.. 나는 감독이고 자기는 여배우니까.”
“알았어요. 맞춰드릴게요.”
혜나는 내 옆에 와 앉더니 입술 위로 쪽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싫지는 않았지만 화들짝 놀라는 척 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미쳤어?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여긴 회사 근처야!”
“입을 맞춰달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