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개그였지만 혜나가 하니까 귀여웠다. “아니.. 그 입 말고..”라며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흘리자 이번엔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다행히 손님이 우리 말고는 없었지만 회사 근처 카페에서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소극적으로 저항했으나 혜나의 얼굴 위로 동민의 얼굴이 아른거려서인지 더 짜릿했다. 나는 의리도 없는 나쁜 놈이다.
그런데 만약 캐스팅 안 시켜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구멍가게’는 십중팔구 엎어질 것이다. 엎어지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메이드가 됐는데 캐스팅을 안 시켜주면 나쁜 놈이지만 엎어지면 캐스팅을 안 시켜주는 게 아니라 못 시켜주는 거니까 이해해 줄 것이다. 괜찮다. 어차피 엎어질 거니까. ‘구멍가게’ 따위가 메이드 될 리가 없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영업 끝날 시간이 돼서요.”
카페 알바의 말에 우리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여기서 끝일 순 없고 어디론가 가서 하던 일을 계속 해야 하는데 할 이야기가 있다고 불러놓곤 모텔로 가기는 좀 그랬다. 양아치도 아니고.
“회사 구경할래?”
“좋아요!”
우리는 후끈 달아오른 채 곧장 카페에서 나와 밀리언 필름으로 직행했다. 혜나가 영화사 구경을 원하는 눈치여서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출근한지 이틀만에 여배우를 불러들이다니.. 양아치가 된 기분이었다. 강 대표와 심동민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석 팀장에게까지 미안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감독이 배우와의 미팅을 회사에서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혜나는 엄연히 데뷔까지 한 여배우고 본인이 싫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밀리언 필름의 차기작 ‘구멍가게’에 캐스팅이 될 수도 있으니 나는 감독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석 팀장은 몰라도 강 대표는 남자니까 나를 이해해줄 것이다.
***
섹스는 감독 방에서 했다.
혜나의 얼굴 위로 이번에는 동민에 이어 서연의 얼굴까지 아른거렸고 서연과도 언젠가 이럴 날이 오면 어떡하나.. 상상만 해도 짜릿했지만 일을 치르고 나자 극심한 자괴감이 밀려왔고 금방이라도 누가 들어올까봐 불안 초조해졌다. 이게 다 서연 때문이다. 아까 얄밉게 집에 가 버리지만 않았어도 꿩 대신 닭 쫓는 심정으로 혜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데 혜나가 입을 열었다. 처음 듣는 저음이었다.
“감독님.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
“당연하지. 얼마든지 물어봐.”
“우리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긴.. 감독과 배우 사이?”
처음 듣는 저음에 독기서린 반말까지 기분이 좋진 않았고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감독님한테 난 뭐냐니까?”
“배우.”
“아하~ 배우 겸 섹파? 노리개? 아니면 그냥 먹버?”
“먹버라니!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그러면 왜 그 날 이후 연락 안 했어?”
“오늘 했잖아!”
먹버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후환이 두려워졌다. 혜나를 쿨한 여자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다.
“며칠이나 지났는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쿨하지 못하게스리..”
“됐다. 연락한 건 사실이니까. 나 사무실 구경해도 되지?”
내 허락도 구하지 않고 팬티와 브라 차림으로 직원들 책상과 강 대표 방까지 둘러보는 혜나가 무서웠다. 뭔가를 잘 못 먹고 뒤탈이 나기 직전인 기분이었다.
“별 거 없네.. 그럼 가 볼게요. 감독님!”
“그.. 그래. 연락할게.”
“그러시든가.”
혜나는 옷을 챙겨 입고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창 밖을 내다보니 건물 앞에 검정색 카니발 한 대가 정차 중이었고 혜나가 차에 오르자 냉큼 어디론가 가버렸다. 방금 통화했던 누군가가 차로 데리러 온 것 같았다. 설마 이 근처에서 나와의 미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겠지? 누군지는 몰라도 혜나를 데리러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나와의 관계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쩐지 혜나와의 관계가 우리 둘만의 비밀이 아닌 것 같아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아뿔싸! 사무실에 CCTV가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서 이곳 저곳 살펴봤지만 다행히 카메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불미스러운 흔적이 남아 있나 꼼꼼히 확인하고 있는데 서연에게 카톡이 왔다.
‘감독님! 서연입니다. 시나리오 보내드렸습니다.’
혜나와 있을 땐 실시간으로 기를 빨려 피곤했는데 서연과는 카톡만 주고 받아도 재충전 된 기분이었다. 얼른 확인해보니 처음 보는 주소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서연입니다. 시나리오 보내드려요.’ 제목을 보니 서연의 메일이긴 했는데 주소가 밀리언 필름 이메일이 아니라 네이버로 끝나는 개인 이메일이었다.
개인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건 이제부터 우리의 관계가 공적이 아니라 사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메일 아이디도 회사 이메일의 아이디와는 달랐다. 이 아이디를 이용하면 서연의 인터넷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나 서연에겐 만든 지 오래 된 네이버 블로그가 있었다. 역사가 오래 됐다 보니 흥미로운 사진들이 많았고 나에겐 도파민 창고 그 자체였다. 구글링을 해 보니 온갖 커뮤니티 카페에 올린 글들까지 검색되었다. 자기 시나리오를 쓰려는 감독 지망생 답게 작가 카페에도 가입되어 있었고 공모전 공고마다 좋아요가 눌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몇 달 전에 응모했던 시나리오 공모전도 있었다.
서연과 나는 감독과 피디 관계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공모전 리그에선 경쟁자였다. 만약 내가 떨어진 공모전에 서연이 당선된다면? 아무리 공모전이 운빨이어도 그 꼴은 못 견딜 것 같은데.. 아니다. 괜찮다. 내가 이 공모전에 응모했다는 사실만 모르면 된다. 비밀로 하길 잘 했다.
슬슬 발표 시기가 된 것 같아 공모전 싸이트에 들어가보니 수상작 발표 페이지가 팝업 창으로 떠 있었고 내 이름은 없었다. 어쩐지 사전 연락이 없다 했다. 보통 공모전에서는 수상작 발표 최소 2주일 전에 개별 연락을 준다.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이 다른 공모전에 당선 됐든가 제작사에 팔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재중 전화는 어지간하면 다 받는 편이다.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수상작 발표 페이지에 내 이름은 물론 내가 응모한 작품 제목도 없었다. 현대 사회의 소외와 갑질에 대한 이야기로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심사평에서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짐작은 했지만 막상 탈락 확인 사살을 하고 나니 속이 뒤틀렸다.
상금 1억이면 밀린 카드빚 갚고 그 동안 사고 싶었던 것들 다 사고 가족들 선물 주고 해외 여행을 다녀오고도 돈이 남았을 것이다. 상금으로 끝이 아니라 제작사와 각본 감독 계약 진행까지 성공한다면 계약금까지 들어온다. 하지만 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나는 유독 공모전과는 인연이 없는 편이다. 기성 감독으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단 한 번도 공모전에 당선된 적이 없다. 폭망 감독이라도 감독은 감독이니 시나리오 공모전 따위에선 언젠가 한 번은 당선될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인연이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폭망은 했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엄연히 극장 개봉까지 시킨 기성 감독이 집필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그렇게 허접할 리가 없다.
분명 심사위원들이 보는 눈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심사했는지 예심 심사위원 명단을 확인해보니 낯익은 이름 몇 개와 박미나의 이름이 있다. 아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박미나는 부디 내가 응모했다는 사실을 몰라야 한다. ‘버진 어게인’을 냈다간 큰 일 날 뻔 했다.
박미나가 심사위원인 줄 알았으면 상금이 10억이어도 응모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모전 말고 바로 정동섭 대표님한테 보낼 걸 그랬다. 임 감독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 친하다고 해도 된다는 허락은 받았다만 쪽 팔리게는 하지 말랬으니 이번 시나리오는 안 보내길 잘 했다. 이딴 허접한 공모전에도 떨어질 정도의 시나리오를 보냈다간 욕만 처먹었을 것이다. 진짜 자신있는 작품이 생기면 보내자.
공모전 탈락의 슬픔과 분노는 서연의 블로그가 달래주었다. 서연은 얌전하고 조용한 사무실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블로그에서는 발랄 명랑 오지랖 그 자체였다. 해외 휴양지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있었고 지인들과의 댓글 소통도 활발했다. 유튜브 채널도 있었다. 본인이 만든 단편영화가 올라와 있었고 영화사 직원 브이로그도 있었다. 영상 속의 서연은 본인이 예쁜 걸 잘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득 이 많은 사진과 영상들을 누가 찍어줬을지 궁금해졌다. 십중팔구 남자 친구가 찍어줬을 법했지만 남자 친구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이 정도 외모와 성격이면 없을 리가 없는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서연의 온라인 흔적을 샅샅이 뒤진 후 설레는 마음으로 시나리오 파일을 열어보았다.
제목은 ‘남친이 상했다’.. 대충 읽어보니 정체불명 바이러스로 인해 지구가 멸망한 이후 나쁜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착한 여자들끼리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요즘 같이 젠더 갈등이 극심한 시대에 참으로 시의적절한 이야기였지만 서연은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 없는 건 물론이고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다행이었다.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라면 폭망 감독의 조언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듣보잡 신생 영화사에서 만날 일도 없었겠지.
‘남친이 상했다’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영화감독 지망생으로서의 미래가 걱정 되지도 않았다.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얼굴도 예쁜데 굳이 시나리오까지 잘 쓸 필요는 없다. 관상과 작품을 보아하니 영화 하겠다고 몇 년 버티다 다른 일 찾아볼 운명일 듯 했다. 밀리언 필름 따위는 몇 년 다니고 말 테니 굳이 쓴 소리 할 필요도 없다. 괜히 너는 감독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가 제2의 박미나 밖에 더 되겠는가. 내일 회사에서 만나면 듣기 좋은 소리나 몇 마디 해 줘야겠다. 무슨 말을 해 줘야 나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질까 고민하고 있는데 카톡이 왔다. 서연인 줄 알았는데 혜나였다.
‘감독님은 니가 감독이라고 생각해?’
혜나가 흑화했다. 감독과 배우 사이의 선을 넘은 것이다. 한 번 감독이라고 영원히 감독은 아니니까 정신차리고 열심히 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폭망 감독이라고 막 나가자는 건가? 폭망 감독 주제에 까불지 말라고?
당연히 나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감독이라고 생각한다고 답을 보내기엔 가오가 떨어지고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을 하기도 애매했다. 무엇보다 흑화한 여배우와 말싸움을 하다간 이보다 더 험한 꼴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읽씹해버렸다. 후환이 두려웠지만 ‘구멍가게’는 어차피 엎어질 것이고 혜나는 다시 안 보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