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은 왜 망했다고 생각하세요?

045.

by Zinn


창한이 보내준 각색안은 단순 각색안이 아니었다. 트리트먼트와 시나리오의 중간 단계 결과물이었다. 짧은 시간에 쓴 것치곤 완성도가 나쁘지 않았고 나의 요구 사항도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완벽한 호감형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비호감은 아니었고 나름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는 인간미 넘치는 싸이코패스였다. 매력은 부족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시나리오가 이대로만 나온다면 적어도 밀리언 필름 내부에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대로 작업이 더 진행됐다간 내가 숟가락을 얹을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끼어들어 대사 한 줄이라도 반영시켜야 나중에 공동 작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곧장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감독님!”

“시나리오 단계라는 말 안 했잖아? 각색안 이라며?”

“쓰다보니 캐릭터가 알아서 움직여서요. 멈춰지지가 않더라고요.”

“놀라운걸? 그래도 아직은 시나리오로 넘어갈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진정하는 게 어때?”

“제가 너무 서둘렀나요? 빨리 데뷔하고 싶었나보네요. 하하.”

“너무 빨리 쓰는 것도 안 좋아. 일단은 멈추고 한 일주일 정도만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봐. 일종의 양생 기간인거지.”

“그래도 될까요? 마음이 급해서요.”

“급할 게 뭐 있어. 시나리오라는 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완성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지.”

“네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일시 중지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꼼꼼히 더 읽어보고 생각 나는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


역시 원작자는 다르네. 전화하길 잘 했다. 회사에는 창한이 보내준 각색안을 보여주면 되겠다. 지금은 나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키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강 대표의 작가 데뷔 욕심을 자제시키고 석 팀장의 각색 작가를 붙이라는 요구도 거절할 명분이 생긴다. 내 버전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캐스팅이나 투자를 진행한 것도 아니니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일이 잘 풀리고 나면 어떻게든 윈윈 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회사에는 다음 주쯤 보여주자. 조금 늦었지만 자기들도 쉽지 않은 요구였다는 걸 알 테니 이해해 줄 것이다. 석 팀장에겐 각색 작가는 필요 없고 내가 더 써 볼 테니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톡을 보냈다. 이번엔 정말 자신있으니 믿어달라고 했지만 석 팀장은 읽씹이었다. 석 팀장의 평소 업무 스타일대로라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각색 작가를 고용해 일을 진행시켰겠지만 자신의 상사인 강 대표가 각색 작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게 걸림돌인 것 같았다. 일주일만 참자.



***



속 편한 일주일은 아니었다. 강 대표는 여전히 매일 아침마다 글을 썼고 점심 시간에도 밖에 나가지 않고 도시락을 시켜 먹으며 글을 썼다. 그런 강 대표를 석 팀장이 얼마나 한심해 할 지 눈에 훤했지만 내가 지금 석 팀장의 심경을 헤아려줄 처지는 아니었다. 강 대표의 데뷔 욕심 덕분에 내가 시간을 번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강 대표가 꼭 퇴근 시간만 되면 나를 불러서 오늘 하루 쓴 글의 모니터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가족사냥’의 각색안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에 관해 혼자만의 아이디어를 끄적인 낙서에 가까운 글이었지만 나는 매우 진지하게 읽었고 좋은 말만 했다. 강 대표의 열정이 우습지는 않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강 대표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폭망 감독 주제에 강 대표나 서연보다 나을 것도 없고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나보다는 잘 쓴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금요일까지 틈틈이 강 대표와 둘 만의 각색 회의를 했고 주말 막바지인 일요일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한이 보내준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강 대표의 글보다 나은 건 물론이고 나보다도 훨씬 나았다. 앞으로는 괜히 내가 써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그냥 창한에게 믿고 맡기는 게 좋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감독은 글을 잘 쓸 필요가 없다.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독의 일은 작가로부터 좋은 글을 뽑아내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나는 감독 일을 잘 하고 있는 셈이다. 글만 좋다면야 나중에 내가 쓴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별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 전까진 창한의 존재를 철저히 숨겨야 한다. 그런데 불현듯 창한 말고 걸림돌이 하나 더 떠올랐다. 난니맨이다. ‘구멍가게’ 시절만 해도 딱히 걱정이 안 됐는데 지금은 다르다. 창한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더라도 난니맨이 언제 어떻게 태클을 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난니맨이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라도 하면 최경진은 감독은 커녕 바로 이 바닥에서 퇴출이다.


시나리오 작업은 창한에게 맡긴 셈이 됐으니 나는 난니맨을 해결하면 되겠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알자. 그러려면 일단은 정체를 알아내야 하는데.. 한동안 잊고 있던 난니맨의 정체에 대해 본격적인 추리에 들어가려는 찰나 혜나에게 카톡이 왔다.


‘감독님 바보! 겁장이.’


생각해보니 창한과 난니맨만 걸리는 게 아니다. 혜나도 걱정이다. 촬영 마치고 개봉 직전에 작정하고 뭔가를 폭로하겠다고 나서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창한과 난니맨이 걸림돌이라면 혜나는 시한 폭탄이랄까? 캐스팅을 원하는 것 같으니 캐스팅을 시켜주면 만사 오케이겠지만 조단역이 아니라 주연 급을 원하면 문제가 될 것이다.


구창한, 난니맨 그리고 혜나.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셋을 해결해야 하는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슬슬 머리가 아파오려 했지만 이것도 차기작이 예정된 감독이니까 할 수 있는 고민이니 행복한 고민이었다. 다시는 영화를 못 만들 것 같다는 불안과 폭망 감독은 감독이 아니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은가.


순간 걸림돌이 하나 더 떠올랐다. 수아다. 내 영화에 출연했다가 배우 인생을 쫑 낸 수아라면 충분히 난니맨이 되고도 남는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사이버 테러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난니맨 때문에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화는 났지만 수아에 대해서만큼은 나도 당당할 게 없기에 일단 만나서 용서를 비는 게 맞다.


하지만 수아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 중에선 수아의 연락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자승에게 수아의 연락처를 알만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했고 당시 스태프들이라고 수아의 연락처를 알 리가 없고 수아의 매니저에게 전화하니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역시나 수아의 근황에 대한 정보는 검색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위로금 명목으로 돈을 보내라거나 쫑파티 때 실수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문을 올리라거나 하는 데드라인이 없으니 당장 만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넘어가자니 영 찝찝했다. 그나마 아직까진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해도 잃을 게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폭망 감독 최경진 따위에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사냥’의 최경진 감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혹시 내가 정상에 오르길 기다렸다 추락시킬 작정인 걸까? 진짜 하기 싫었지만 혜나에게 연락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꼴리는 영화’ 촬영 당시까진 혜나와 수아는 절친이었다. 인스타에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종종 올라왔던 기억이 났다. 너무나도 부담스러웠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 잘 지내지?”

“저에게 감히 전화를 하다니 겁이 없으시네요? 감독님 답지 않게?”

“하하.. 자기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지금 통화 곤란하니까 할 말만 하시죠.”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얼른 수아의 근황에 대해 물어봤는데 자기도 연락이 두절된 지 몇 년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감독님이 정 원하신다면 알아봐줄 순 있다고 했다. 나는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할테니 꼭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혜나는 수아를 왜 찾는지 이유를 말해주면 알아봐주겠다고 했고 나는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영화를 위해 모든 걸 보여준 여배우에게 마음의 빚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럼 나는요?”

“당연히 있지.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믿어도 되나요?”

“응. 내가 거짓말은 안 하잖아.”

“알았어요. 연락드릴게요.”


혜나가 빈말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므로 마음이 놓였다. 혜나 덕분에 수아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나도 이제 보니 서로 니즈만 맞는다면 얘기가 안 통하는 스타일은 아닌 듯 했다. 잘하면 걸림돌 두 개를 한꺼번에 치워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석 팀장에게 각색안을 보내주려는데 자리에 없었다. 곧 출근하겠거니 했는데 점심 시간을 한참 지나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서연에게 다들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 기획팀 피디 조재웅은 개인적인 일로 연차를 냈고 석 팀장은 강 대표와 함께 외부 일정을 소화 중이고 저녁엔 시사회도 있으니 오늘은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시사회가 있는데 같이 가자는 말조차 안 했다 이거지? 우리 회사 소속 감독님이라고 데리고 다니기엔 창피하다는 뜻이다. 괜찮다. 나라도 그럴 테니까.. 하지만 두고 보자.


지금 보내줘봤자 안 읽을 테니 대충 시간을 때우다 퇴근하려는데 서연에게 인터뷰 요청이 왔다. 영 꺼려졌지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공교롭게도 오늘 이 사무실엔 서연과 나 둘 뿐이다보니 거절하거나 미루기가 영 애매했다. 말 나온 김에 곧장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서연이 인터뷰를 위해 출력해 온 질문지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은 성공한 감독들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과연 어떤 질문을 할까? 기대 반 우려 반 와중에 서연은 안경을 끼고 질문지를 꼼꼼히 살피더니 노트북을 펼쳤다. 안경 낀 서연은 처음인데 어쩐지 비장함이 느껴졌다. 사무실에 우리 둘 뿐이고 기성 감독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한 것 같아 아이스 브레이킹 차원에서 스몰 토크를 시전했다.


“근데 서연씨는 왜 감독을 하려는 거야? 연기 생각은 없어? 배우 해도 될 마스크여서.. 이런 얘기 많이 듣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배우 해도 될 마스크라는 말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얼평이라는 걸 당했다고 생각한 걸까? 맞다. 이제는 예쁘다는 말도 하면 안 되는 거라고 하던데.. 아이스 브레이킹은 거녕 웃음기 전혀 없는 서연에게선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고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괜히 민망해서 껄껄 웃어 보았지만 서연은 같이 웃어주지도 않았다. 할 말을 잃고 민망해하고 있자 서연은 차분히 스마트폰 녹음 어플을 켜고 첫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은 왜 망했다고 생각하세요?”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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