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작가란 모름지기 칭찬해주면 버릇이 나빠지는 법이지만 처음부터 갈구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다. 인생 선배이자 업계 선배이자 기성 감독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자연스럽게 몰아가야 한다.
“어때? 남의 말 듣고 수정하려니까?”
“확실히 쉽지 않더라고요. 저 혼자서 쓸 땐 신나게 잘 써졌거든요.”
“당연하지. 게다가 추리 미스터리 이쪽 장르는 신인 작가 혼자서는 감당하긴 어려운 장르야. 비록 메이드 된 건 없지만 내가 써 봐서 아는데..”
별 볼 일 없는 지난 경력들을 거창하게 포장해서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감독님이 도와달라는 얘기를 먼저 꺼내길 유도했지만 창한은 어떻게든 끝까지 혼자서 완성해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눈치 없는 놈 같으니라고. 혹시 취하면 약해질까 싶어 술을 퍼먹였는데 결국엔 내가 먼저 취하고야 말았다.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리자 짜증이 나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창한도 알고 있는 ‘악녀사냥’의 제작자 심장혁 대표가 떠올랐다. 모름지기 술자리엔 뒷담화만한 안주가 없는 법이다. 심 대표는 나에게는 자기네 회사 아이템을 써 보라고 시켜 놓고 잔금 천만 원을 떼먹은 전과가 있고 창한에게도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빼앗아간 임 감독과 공범인 셈이니 술자리 안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었다. 창한과의 라포르 강화 차원에서 신나게 심 대표 욕을 퍼부어 댔더니 곰곰히 듣고 있던 창한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 돈 받아다드릴까요?”
“그래주면 완전 고맙지. 2고 써 주면 잔금을 주기로 했는데 2고로 인정 못하겠다며 잔금을 안 주더라고. 사실상 2고도 아니야. 2고를 보냈더니 자기는 이거 2고로 인정 못하겠다고 해서 몇 번 더 고쳐준 걸 따지면 최소 5고는 될 걸? 이 정도 썼으면 2고로 인정해주는게 맞다고 잔금 달라 그랬다가 욕만 처먹고 끝났지. 근데 받아줄 수 있겠어?”
“제가 받아드릴게요. 회사가 어디에 있어요?”
“실버 트리 필름? 어! 마침 여기서 가까워. 아마 지금 가면 사무실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천이면 얼마 되지도 않잖아요. 받아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시죠!”
“지금? 진짜 받아줄 수 있겠어? 에이 괜히 쎈 척 하지 말고.”
창한은 벌떡 일어나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았고 곧장 심 대표의 제작사 실버 트리 필름으로 향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뒷담화를 까긴 했다만 막상 돈 떼먹은 심 대표의 얼굴을 보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실버 트리 필름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린 후 나는 차마 함께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행여나 심 대표와 맞짱을 뜨게 될 수도 있는데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 대표는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 출신이었고 몇 년전에 시사회에서 우연히 봤을때도 체중이 100키로에 육박하는 거한이었다. 액면만 봐선 호리호리한 창한이 완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창한은 내가 따라오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혼자 성큼성큼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술김에 괜히 쎈 척 하는 게 아니었다. 진짜로 사무실에 들어갔고 30분 정도 지난 후에 내려왔다. 몇 대 맞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멀쩡해보였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거나 안 만나줬으려니 했다.
“뭐 하느라 이제 내려와? 만나긴 했어?”
“계좌 확인해보세요.”
“진짜?”
설마 하고 은행 어플을 열어 잔고를 확인해봤더니 정확히 십여년 전에 못 받은 잔금 천만 원이 3.3프로도 떼지 않은 채 실버 트리 필름 명의로 입금 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했는데 정말로 잔금을 받아다 준 것이다. 괜히 쎈 척을 한 게 아니었다. 아니 돈을 어떻게 받아낸 거지? 폭력을 쓰진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받아낸 거야?”
“최 감독님 잔금 입금시키라고했죠. 그거 말곤 별 말 안 했어요.”
이 돈.. 진짜 괜찮은 걸까?
“아 저 생각났어요. 호감형 싸이코패스 써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고치겠다고?”
“네. 감독님 덕분에 영감이 떠올랐어요. 한 번만 더 고쳐볼게요. 그거 보고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있긴 한데.. 내 덕분이라니? 난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아니에요 감독님 덕분이에요. 저.. 감 잡았어요. 감독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알겠어요. 그럼 감독님 말씀대로 캐릭터만 다시 한 번 고쳐와 볼게요. 작가란 원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어 그래. 화이팅!”
창한은 영감이 사라지기 전에 집필을 시작해야 한다며 먼저 집으로 가버렸다. 창한과 헤어지고 나자 곧장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잔금을 어떻게 받아낸 거지? 설마 심 대표가 나랑 다시 일해보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창한이 무서워서일까? 뭐가 됐든 심 대표랑 다시 웃으면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안 보면 그만인 사이니까.
뜬금없이 생긴 천만 원으로 뭘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아파트로 들어오는데 주차장에서 유정이 내가 모르는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아는 척을 하려다가 둘이 너무 다정해 보여 나도 모르게 화단의 나무 뒤에 숨어버렸다. 유정은 차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곧장 따라들어가면 어색할 것 같고 못 볼 꼴을 봐버린 기분에 싱숭생숭해서 단지 안을 몇 바퀴 배회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 들어가니 유정은 샤워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늦었네?”
“응. 혹시 누가 데려다줬어?”
“봤어? 학교 선생님. 회식 끝나고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그랬구나.”
“아는 척 하지 그랬어.”
“멀리서 봐서 긴가민가했어.”
흠.. 아니겠지? 아닐 거야. 둘이 그냥 동료라기엔 너무 다정하게 보였는데 기분 탓인가? 애초에 유정에게 줄 생각은 없었지만 괘씸한 마음에 창한이 준 샤넬백은 내 방 옷장 깊숙한 곳에 조용히 숨겨두었다.
술이 약한 유정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술에 잔뜩 취했는데 외간 남자가 모는 차를 타고 왔다고? 반드시 동료 교사들과의 회식이었어야만 한다. 설마 남자랑 단 둘만의 술자리는 아니었겠지? 하지만 둘만의 술자리였다면? 술만 마시고 집에 데려다준 거겠지? 아니라면?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유정의 화장이 짙어 보인다. 설마 별 일 없었겠지? 믿는다 유정아.
***
유정의 외도 걱정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일어났더니 창한에게 이메일이 와 있었다. 밤새 글을 수정했다며 수정본을 보내온 것이다. 메일을 열어보니 캐릭터가 완벽하게 호감형 싸이코패스로 변신해 있었다.
이런 캐릭터라면 회사에서도 흔쾌히 좋다고 할 것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탑스타들도 하겠다고 나설 게 분명했다. 딱 하나 아쉬운 건 나는 아직도 내 버전이 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싫다 하니 더 이상 내 버전을 고집하면 안 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다. 내 버전을 포기하고 창한의 버전으로 진행하면 꿈에도 그리던 차기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회사에 보여줘도 될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해서 프린터로 출력 후 유정에게 먼저 보여줘 봤다. 유정은 한 때 잠깐이나마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었고 현역 국어 교사라 문학적 이해도가 높아서 종종 모니터를 부탁하면 도움이 될 만한 의견을 던져주곤 했다. 아마 유정의 말만 제대로 들었어도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엔 시나리오를 쓰면 유정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의견을 구했는데 언젠가부터 점점 귀찮아하는 게 보였다. 매번 엎어지기를 반복하다보니 어차피 내가 자기 말대로 시나리오를 고치는 것도 아니고 영화로 만들어지지도 않을 거 뭐하러 읽어야 하냐는 눈치여서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이번에도 귀찮은 기색이었지만 하도 오랜만에 보여준 거라 유정은 차마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고 숙취에 피곤해하면서도 찬찬히 읽어나갔다. 놀라운 건 점차 귀찮은 표정이 사라지더니 정말 재밌는듯 앉은 자리에서 한 큐에 다 읽어버렸다는 것이다.
“재밌다! 누가 쓴 거야?”
누가 썼는지 궁금해 할 정도로 재밌게 봤다는 반응에 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썼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전제 하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야.”
“왜 이래? 주말 아침부터 실 없는 소리 할래?”
됐다. 이 버전으로 진행하는 거다. 일반 관객인 유정이 재밌게 봤을 정도면 무조건 컴백 가능이다. 그 동안 나를 무시했던 인간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족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아빠로 거듭날 수 있다. 다 죽었어. ‘가족사냥’으로 보란듯이 컴백해서 너희가 틀렸음을 증명해주고야 말겠다.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지만 막상 창한의 시나리오를 석 팀장에게 보내려고 하자 차마 전송 버튼이 눌러지지가 않았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도전해볼까? 최경진 감독 오리지널 버전이 창한의 버전보다 나아질 가능성은 없을까? 밤새도록 고민했지만 아침 해가 떠오르는 걸 본 순간 저절로 인정하게 됐다. 나는 여기까지다. 나에겐 작가로서의 재능은 없다. 그냥 창한의 시나리오를 석 팀장에게 보내자.
포기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창한의 시나리오 제일 앞장에 적혀 있던 ‘각본 구창한’을 ‘각본/감독 최경진’으로 수정하고 문서정보의 지은이 칸에도 최경진이란 이름 석 자를 입력했다. 마지막으로 창한 특유의 문체 몇 군데를 찾아 내 스타일로 수정한 후 석 팀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갑자기 힘이 빠지며 침대 위로 쓰러져버렸다.
밤 새도록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잠이 쏟아졌지만 자고 일어나면 내 팔자가 바뀌어 있을 것이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