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인생을 도둑질 한 죄

048.

by Zinn


내 시나리오에 열광하고 있을 석 팀장의 감동의 폭탄 카톡을 기대하며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했지만 그 흔한 부재중 전화나 스팸 문자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감히 아직도 안 읽었어? 짜증이 나서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석 팀장에게 보낸 메일에 아직까지도 읽음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울화통이 치밀어 곧장 석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메일 확인 안 하냐?”

“뭐 보냈어?”

“감독이 기획 팀장한테 보낼 게 시나리오 말고 더 있어?”

“알았어. 읽어볼게.”

“바로 바로 안 읽지? 벌써 푸대접이냐? 나 방치 당하는 거에 트라우마 있는 거 알지?”

“아유 지금 강 작가님 시나리오 읽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죽겠는데 너까지 이럴래?”

“강 작가님?”

“밀리언 필름 강석현 대표!”

“이야.. 우리 대표님 근성 있으시네.”

“매우 열심히 성실하게 쓰고 계시다. 너도 좀 배워라.”

“지금 나랑 강 대표를 비교하는 거야?”

“아 몰라. 끊어. 읽고 전화할게.”


바로 이거다 싶은 시나리오를 보냈고 독촉 전화까지 했으니 반나절 정도 지나면 석 팀장에게 감동의 피드백이 올 줄 알았는데 하루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직 기획팀에도 공유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에 대한 믿음이 어지간히 약해진 모양이다.


애타게 기다리던 석 팀장의 피드백 대신 서연에게 2차 인터뷰 요청이 왔다. 1차 인터뷰 때의 불쾌한 기억 탓에 2차 인터뷰는 영 내키지 않았고 나를 롤모델로 구상 중이라는 아이템도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희화화 되어 있을 것 같아 영 불안했지만 이제와 안 한다고 하면 잘 삐지는 감독으로 보일 것 같아 마지 못해 인터뷰를 허락했다.


퇴근 후 카페로 갔더니 서연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에선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의상이 범상치 않았다.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어 가슴골이 살짝 노출된 몸에 딱 붙는 셔츠 차림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찝찝함은 눈 녹듯 사라졌고 그나마 미모의 20대 여자 피디와 커피 한 잔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재미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만약 서연이 없었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서연에게 고마웠다.


“어때? 지난 번 인터뷰는 도움이 좀 됐어?”

“그럼요! 감독님 캐릭터 너무 재밌게 나올 것 같아요. 덕분에 영감이 팍팍 떠올랐어요.”

“내가 어떻게 나올 지 궁금하네. 언제든 괜찮으니까 보여주면 바로 바로 모니터 해 줄 게.”

“아직 모니터가 필요한 단계는 아니고요. 더 알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흠.. 내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는 내가 써야 되는 거 아닌가? 만약 대박이라도 난다 해도 저작권료를 달라 그럴 수도 내 지분을 주장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내 캐릭터가 재밌게 나올 것 같다니 십중팔구 못 나가는 찌질한 감독으로 희화화 할 생각인 것 같은데 내가 롤모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다.


그래.. 내가 만만한 거지. 아무래도 너무 잘 해준 것 같아. 예쁘다고 오냐오냐 했더니 머리 끝까지 기어오르는군. 한 번쯤은 정색하고 까칠하게 굴어줘야겠어. 더 이상 인터뷰에 인자도 못 꺼내도록. 아니야. 지금 분위기 나쁘지 않은데 너무 대놓고 정색했다간 관계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어. 알아서 나를 롤모델로 한 영화 프로젝트에 흥미가 떨어지도록 오늘은 재미 없는 이야기만 해줘야지. 생각하고 어금니를 악물었는데..


“바쁘실텐데 또 다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서연의 눈웃음 한 방에 까칠해지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눈녹듯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까칠해질 수 없었다. 띠동갑 차이 나는 어린 후배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미치도록 부끄러웠지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억눌러지지 않았다.


“더 알고 싶다는 게 뭐야?”

“데뷔하자마자 폭망하고 10년 간 계속 엎어졌다고 하셨잖아요?”

“흠흠.. 그랬지.”

“엎어진 프로젝트들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요. 지난 번 인터뷰가 큰 그림 그러니까 숲이었다면 오늘 인터뷰는 숲 속의 나무인거죠. 디테일이 중요하잖아요.”

“그렇지. 디테일이 중요하지. 그런데 그 디테일들 전부 얘기하려면 하루 이틀 갖곤 안 될텐데?”

“괜찮아요. 남는 게 시간인걸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그러자.”

“작가들과의 관계는 어떠셨어요?”

“난 작가주의잖아. 내가 글을 쓰다보니 다른 작가들과는 일로는 별로 엮인 적이 없어.”

“한 번도 없으신가요?”


한 번도 없다 그러면 여기서 인터뷰가 끝날 분위기였다. 이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맞다. 창한이 있지? 창한과는 과거 조감독 시절 함께 일한 적이 있고 지금도 비밀리에 함께 일하고 있다. 누구라고 말만 안 하면 이야기 해도 괜찮겠지.


“있긴 해.”

“보통 감독들은 작가들을 찍어 누르려고 한다는데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난 작가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는 편이야.”

“잠깐만요. 작가님 이름은요? 만나게 된 계기는?”

“이름은 작가님 프라이버시라서 알려줄 수 없고 만나게 된 계기는 음..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일할 때 최종 심사에 올라왔던 작품이어서 알게 됐지.”


정확히는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일한 건 내가 아니라 임 감독이고 난 임 감독이 자기가 심사하라고 받은 시나리오들을 임 감독 대신 읽기만 했지만 그런 디테일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 내가 심사위원이었던 척 했다.


“몇 년도에요?”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십몇년 전이니까..”

“일은 같이 하셨으면서 상은 왜 안 주셨어요?”

“상을 주면 다른 감독이나 제작사에게 뺏길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최하점을 줘서 탈락시킨 후 따로 연락했지. 어? 상을 안 준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얘기한 적 있나?”

“아니요. 이름을 안 알려주셔서요. 수상 작가면 안 알려줄 이유가 없잖아요.”

“그게 그렇게 되나? 양 피디 예리한데? 추리 소설 써도 되겠다! 허허허.”

“그런데 우리가 누구에요? 감독님이랑 작가님 말고 또 누가 있었나요?”

“음.. 그건 비밀.”


겉으론 웃었지만 속은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먹먹해졌다. 문득 ‘가족사냥’을 내 시나리오인 척 하는 건 구창한 작가를 두 번 죽이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창한을 공모전에서 탈락시킨 주범과 공범인 셈이었고 이번엔 아예 작정하고 시나리오를 훔쳐버렸다. 만약 창한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나올까? 만약 내가 창한이라면 나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 작가님이랑 작업한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나요?”

“성공까지는 아니고 그럭저럭 망하진 않은 정도?”

“그런 건 확 망해버려야 되는데..”

“하하. 그러게. 인과응보라는 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작가님을 다시 만난 적 있으신가요?”

“아니. 연락이 두절돼서. 전화 해도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라고. 지긋지긋했나봐.”


연락이 두절됐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 지금 같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그러고보니 창한을 다시 만난 곳이 임 감독의 장례식장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 모든 일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건데 설마 임 감독의 자살이 창한의 복수는 아니겠지? 왜 헐리우드 B급 영화에서 보면.. 아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우리라면?”

“비밀이라니까?”

“에이.. 대충이라도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음.. 그건.. 작가님이 나랑 둘이서만 일한 건 아니잖아. 여기 밀리언 필름만 봐도 알겠지만 영화사엔 피디도 있고 대표도 있고 조감독도 있고..”

“아 그러셨구나. 만약 그 작가님을 다시 만나면 어떨 것 같아요?”

“그 때는 미안했다고 사과해야지. 우리보다 훨씬 잘 나가는 감독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서연의 질문은 다행히 1차 인터뷰 때보다는 덜 공격적이었지만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불편했다.


“잘 나가는 감독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하아.. 부럽지 뭐.”

“자괴감이나 열등감일 수도 있을까요?”


갑자기 던져진 돌직구에 뒷목이 땡기며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전혀 아니야. 영화는 평생 할 거니까. 나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믿거든.”

“안 오면요?”

“글세..”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기분만 나쁜 이런 인터뷰 따위 슬슬 때려치우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데 서연의 다음 질문이 나를 다시 자리에 주저 앉혔다.


“저에게는 기회가 안 올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왜 그런 걱정을 하지?”

“저는 감독님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고 졸업 작품도 망했고 시나리오는 시작도 못하고 아이템 찾느라 몇 년을 허비했잖아요. 집이 부자도 아니어서 회사를 다녀야 하고요.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기분이 나빠요.”


나에 대한 학대나 다름없던 인터뷰가 고민 상담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나오면 인생 선배로서 한 마디 안 해줄 수가 없지.


“그래도 아이템은 정했잖아. 집이 부자여야만 감독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 생활은 언젠가 회사 이야기를 할 때 도움이 될 거야. 당장 이번 아이템도 회사를 다닌 덕분에 떠오른 거잖아.”

“그건 또 그렇네요. 그럼 저에게도 기회가 올까요?”

“당연히 오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간 올 수 밖에 없어. 그런데 시나리오를 잘 쓰면 더 빨리 오겠지. 어떻게? 정말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구상은 구상일 뿐이지 집필이 아닌 건 알고 있지? 하루라도 빨리 써 보는 게 좋아.”

“사실은 이미 쓰고 있어요.”

“정말? 그런데 왜 안 보여줘?”

“조금 더 정리하고 보여드릴게요.”

“나를 롤모델로 한 건 맞아?”

“나중에 읽어보면 아실 거에요.”


영 찝찝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망 감독이라고 마냥 찌질하게 희화화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빌런이나 양아치로 나오는 건 아니지? 뭐 그래도 상관 없다만..”

“그럴 리가요. 감독님이 그럴 만한 죄를 지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죄가 없진 않지. 작가의 인생을 도둑질 한 죄.


서연과의 2차 인터뷰가 다 끝나도록 석 팀장에겐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서연은 이번에도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가버렸다. 창한에게 새삼 미안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도둑질은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넘 미안해서 소주라도 한 잔 사주려고 전화를 했는데 왠일인지 통화가 되질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창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설마.. 교통사고?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려나.. 결국 창한과는 연락이 되질 않았지만 묘한 기대감을 간직한 채 집에 와서 발 닦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석 팀장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감독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 최고!! 편안한 밤 되시고 내일 뵈어요 ^^’


감독님이라고? 드디어 감독 합격??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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