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서연이 3차 인터뷰를 요청했다. 두 차례 인터뷰를 하고 나니 더 이상은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지만 인터뷰가 아니면 서연과 단 둘이서 커피를 마실 기회가 없을 것이고 창한 때문에 싱숭생숭하기도 해서 또 다시 인터뷰를 수락했다.
어쩐지 인터뷰를 하면 할 수록 나에 대한 서연의 존경심이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인터뷰 의상도 헐렁한 박스티에 펑퍼짐한 청바지 차림으로 확실히 전보다 성의가 없어졌고 설상가상 인터뷰를 요청하는 태도에서도 초반의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인터뷰를 거절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해 하는 느낌이 있었으나 지금은 인터뷰를 해 주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뭘 또 물어보려고 3차 인터뷰까지 요청했나 했는데 살짝 실망스럽게도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다른 감독님들 소개시켜 줄 수 있으실까요? 감독 캐릭터들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서연은 나를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시나리오 정리는 아직이고? 소개시켜줄 만한 감독은 많은데 조금이라도 정리본을 읽어보면 누굴 추천해야 할 지 확실히 감이 올 것 같거든. 감독님들에게도 부탁할 때도 설명하기 편하고.”
“아 그럼 소개는 어느 정도 정리까지 마치고 다시 부탁드릴게요.”
삐졌나? 말이 없어졌다. 졸지에 인터뷰가 끝날 분위기라 억지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떤 감독을 원하는데? 대박 감독? 상 받은 감독? 유망주 감독?”
“그런 감독님보다는 실패한 감독님들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영화 만드느라 고생한 에피소드들도 더 많을 것 같고.”
“이야.. 우리 양 피디가 뭘 좀 아네. 맞아. 원래 실패담이 더 재미있는 법이잖아. 그리고 그런 감독이라면 정말 많이 소개시켜 줄 수 있지. 아주 무궁무진해. 영화가 개봉하면 보통 십중팔구는 망하잖아. 설상가상 영화판이 초토화돼서 다들 집에서 놀고 있으니 인터뷰 시간 잡기도 편할 거고.”
“정말요? 감사해요 감독님!”
“아 인터뷰 시간 잡는 건 조율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마냥 노는 감독도 있지만 쿠팡이니 뭐니 해서 영화 찍을 때보다 바쁜 감독도 있거든.”
“쿠팡이면 쿠팡 플레이?”
“아니. 그냥 쿠팡. 요즘 워낙에 불황이라 상하차하러 가면 종종 예전에 같이 일했던 스태프들 만나기도 한다더라.”
“하하하. 웃을 일은 아니지만 웃프네요. 하아.. 남의 일이 아닌데..”
“뭐가 남의 일이 아니야? 자기는 밥 먹고 살 걱정은 없지 않아?”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흠.. 그렇다고 쳐 두지.”
웃기려고 한 소리는 아닌데 쿠팡 얘기에 간만에 활짝 웃는 서연을 보니 어지간한 근심 걱정은 훨훨 날아가버렸다. 점점 하락하고 있는 나에 대한 존경심을 인맥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 싶어 아는 대박 감독들 이름을 줄줄이 열거했다.
“우와.. 감독님 진짜 인맥이 넓으시네요.”
“영화판 20년이야. 이 정도는 기분이지. 그리고 장담하는데 양 피디는 20년 구르면 지금 나보다는 훨씬 훌륭한 영화인이 될 수 있을 거야.”
다들 그냥 오다가다 인사한 정도의 사이고 아마도 그들은 나를 기억도 못하겠지만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 눌러지지가 않았다. 문득 정말 소개시켜달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서 진짜로 인터뷰를 주선해 줄 수 있는 만만한 감독들 이름도 몇 명 끼워넣었다. 다행히 서연은 이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그냥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물어봐도 돼요?”
“응 돼.”
“영화를 안 만드는 감독님들은 어떻게 사시는 거에요?”
“흠.. 한국의 감독은 둘 중 하나야. 원래부터 돈이 많은 감독과 그렇지 않은 감독. 영화로 돈을 버는 건 양 피디도 봐서 알겠지만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러니까 돈이 없는 감독들은 계속 없을 거라고 보면 되고 원래부터 돈이 많은 감독들은 영화랑 상관없이 돈이 많은 거지.”
“그럼 어떻게 먹고 살아요?”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지?”
“할 수 있는 일요?”
“감독이 별 거야? 나이 먹고 불러주는 데 없으면 뭐든 해서 벌어야지. 운 좋으면 시나리오 강사 정도?”
“하아.. 비참하네요.”
“혹시 데뷔 못한 감독도 인터뷰 대상으로 괜찮아? 감독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준비만 한 감독 지망생도 보통은 주변에서 감독님이라고 불러주거든.”
“네 좋아요! 어쩐지 그런 분들도 이야기 거리는 많을 것 같거든요. 있으세요?”
“있는 정도가 아니라 차고 넘치지. 지금 바로 불러줄 수도 있는데 어떡할까? 불러줘? 아 얼마 전에 윤보영 감독 누나도 만났다. 인터뷰 할래?”
“아 진짜요? 그런데 윤 감독님은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데뷔도 하신 분이고 아직은 제가 윤 감독님을 만날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요. 그런데 여자 감독님들은 영화 안 만들 때 뭐 하시는 지 아세요? 택배나 상하차 같은 일은 힘들어서 못할 것 같은데..”
“여자 감독이라고 다를 거 있나. 뭐든 하는 거지.”
서연의 인터뷰 상대로는 감독의 꿈을 접고 알콜 중독 상태인 해원 형은 부담스럽고 내 친구 심동민이 딱이었다. 미모의 20대 여자 감독 지망생이 인터뷰를 원한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나올 것이다. 다음 인터뷰를 기약하고 헤어지자마자 동민에게 간만에 전화를 걸었다.
“왜?”
“건수 있다.”
“정말? 뭔데?”
“인터뷰 할래?”
“내가 무슨 인터뷰를 해?”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인터뷰래.”
“내가 도움이 될까? 아직 데뷔도 못했는데..”
“된대. 감독이 별 거야? 주변에서 감독이라고 불러주면 감독이지.”
“그런데 어디에서 하는 인터뷰야? 방송국? 씨네21?”
“어디는 아니고.. 아는 작가님 부탁이야."
“아 다행이다. 언론은 부담스럽거든. 언제야?”
“알았어. 한다는 거지? 시간은 정해지면 다시 알려줄게.”
“그래. 하루 전에만 알려줘.”
***
기껏 보낸 시나리오는 강 대표가 아직 읽지도 않은 듯 하고 사무실에 나가서 앉아있어 봤자 할 일도 없으니 하루 쉬려는데 석 팀장에게 빨리 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강 대표가 내가 보내준 시나리오를 다 읽었다는 것이다. 뭐래는데? 물어도 얘기는 안 해주고 일단 오라고 했다.
석 팀장과 함께 강 대표의 방으로 들어갔더니 강 대표는 ‘가족사냥’을 읽고 있었고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완전 달라져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존경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살짝 흥분상태인 강 대표는 거두절미하고 곧장 이 버전으로 곧장 투자 캐스팅 돌리자고 했다. 나야 그래주면 고맙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여기까진 좋았다.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니랬는데 왠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고작 이 얘기를 하겠다고 급하게 오라고 한 건가? 살짝 허무했는데 석 팀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이 얘기 하자고 급하게 부르진 않은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이 있었다.
“감독님 사실 제가요. 어제 하루 종일 감독님 시나리오를 수십 번 읽고 밤 새도록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 앞으로 서너 페이지 짜리 각색안을 들이밀었다.
“각색안입니다. 감독님 버전으로 곧장 투자 캐스팅을 돌려도 되겠지만 제가 욕심이 나서요. 더 잘 해보고 싶은 마음 이해하시죠?”
“아.. 네..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읽어보시고 제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시면 시간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잘 반영해주세요. 감독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빨리보다는 잘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 동안 강 대표에게 작가로서 재능있다고 칭찬해 둔 게 있어서 차마 싫다는 말은 못하고 순순히 강 대표가 직접 집필한 각색안을 건네 받았다. 강 대표의 눈빛에서 어떻게든 ‘가족사냥’에 숟가락을 얹어 각본 타이틀에 이름을 올리겠다는 야망이 느껴졌다. 돈도 많으면서 이렇게까지 해서 작가 데뷔를 해야 하나?
“대표님! 이번엔 모니터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강 대표의 말이라면 어지간하면 알았다고 하던 석 팀장이 브레이크를 들었다.
“모니터?”
강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최 감독님이 빨리 쓰는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괜찮은데 또 다시 각색 작업 들어갔다간 언제 결과물이 나올 지 기약할 수가 없고 그게 좋으리란 법도 없으니까요. 대표님도 밀리언 필름의 다음 프로젝트가 빨리 진행되는 게 좋지 않으세요? 직원들 사기도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나 혼자 좋으라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 이게 다 우리 회사..”
강 대표는 석 팀장과 내가 맞장구 치는 눈치가 아니었는지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정 그러시다면 누가 썼는지 비밀로 하고 직원들에게 모니터를 돌려볼게요. 다들 대표님 버전이 좋다고 하면 최 감독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작업을 해 주시고 안 좋다고 하면 최 감독님 버전으로 진행하는 걸로 하시죠. 어때요?”
누가 썼는지 비밀로 하고 모니터를 돌려본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강 대표는 흔쾌히 오케이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이름을 숨기고 모니터를 돌리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는지 마지 못해 석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내(?)가 이겼다. 강 대표의 각색안은 압도적으로 불호였다. 재밌다는 의견이 한 개도 없었다. 강 대표는 충격을 받은 눈치였지만 대표로서 자존심이 있는지 일단은 내 버전으로 진행하는 걸 허락해주었다. 내 버전에 대해선 다들 지금까지 밀리언 필름에 들어온 시나리오 중에 최고라며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강 대표는 자기 글을 혹평한 직원들 꼴보기가 싫었는지 저녁 약속이 있다며 혼자 나가버렸고 석 팀장은 작전 회의를 하자며 내 방으로 왔다.
“강 대표가 싫다고 하면 바로 사표 낼 생각이었는데 꼴에 보는 눈은 있는지 그러진 않네.”
“그게 더 나았으려나? 원래 독립할 생각이었잖아.”
“그렇긴 한데 상도라는 게 있으니 최대한 잘 해 보는 걸로 하자. 만약 계속 걸림돌이 되면 그 땐 정말 들고 나가는 걸로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석 팀장이 잠깐 뜸을 들였다.
“민오에게 보내볼게.”
“민오? 차민오? 차민오한테 시나리오를 줄 수 있어?”
“백연희라고 알지? 걔가 민오 오른팔인데 내가 또 연희랑 친하잖니.”
“차민오 매니저야?”
“매니저는 무슨. 민오네 소속사 이사님이시다.”
“아 그러셨어요? 그러면 시나리오 보내고 답 오는데 반 년쯤 걸리려나?”
이 바닥에서 누구랑 친하다는 말은 믿으면 안 된다. 십중팔구 구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