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석 팀장이 나를 감독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드디어 감독합격이다. 이제 정말 잘 찍는 일만 남았다. 이번 영화는 정말 잘 찍을 것이다. 목숨 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찍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다. 또 다시 졸작 찍고 폭망하느니 혀 깨물고 죽어버리는 게 낫다. 잔뜩 비장하게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석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부고 받았어?”
“아니? 누구 부고?”
“심 대표가 죽었대. 기억나지? 심장혁 대표.”
석 팀장은 실버 트리 필름 심장혁 대표의 부고를 받았다며 작품 얘기도 할 겸 같이 장례식장에 가자고 했다. 심 대표라면 잔금을 안 줘서 다신 안 보는 사이였지만 얼마 전에 늦게나마 잔금을 보내준 것도 있고 해서 마냥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얼마 전 임 감독의 장례식장 보다도 더 조문객이 없었다. 조문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석 팀장이 먼저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야? 어떻게 돌아가신 거래?”
“뺑소니래. 하필이면 CCTV가 없는 곳이어서 범인은 아직 못 잡았고.”
임 감독과 심 대표 둘 다 구창한 작가와는 악연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우연일 것이다.
설마 창한이 범인일까?
만약 창한이 죽였다면 임 감독은 자살 시켰고 심 대표는 차로 치었다는 얘긴데 창한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싸이코패스 영화를 제법 봐서 아는데 창한은 공감력이 뛰어나므로 전형적인 싸이코패스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고작 자기 작품을 뺏었다고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헐리우드 B급 스릴러 영화라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에 진짜 만약에 창한이 싸이코패스고 임 감독과 심 대표의 죽음이 창한의 소행이라면 다음 차례는.. 내가 될 확률이 크다. 감독, 제작자 다음은 프로듀서일 수도 있지만 그 작품에선 내가 조감독 일을 하면서 프로듀서 역할도 수행한 셈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다. 그 당시 난 마지막까지 창한의 편을 들어주었다. 창한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자고 했다. 그래서 임 감독에게 감독 편이 아니라 작가 편을 든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싱숭생숭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얼굴이 나타났다. 임 감독의 딸 은조다. 여길 왜 왔지? 싶었는데 아빠인 임 감독이 심 대표와 친했고 심 대표가 어릴 적부터 많이 귀여워해줬으니 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은조도 심 대표를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기억이 났다.
은조는 나를 보자마자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불러내더니 창한에 대해 또 다시 경고했다. 창한이랑 놀지 말라고! 우리 아빠를 죽인 게 창한이라고! 내가 창한이랑 연락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임 감독 장례식장에서 내가 창한과 연락처를 주고 받는 걸 봤다고 했다.
“시나리오 보내줬죠?”
“그걸 어떻게 알아?”
“그 놈 수법이에요. 우리 아빠한테도 그렇게 접근했다고 들었어요.”
창한이 거짓말을 한 걸까?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땐 분명 임 감독과는 잠적 이후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그게 언젠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빠가 죽기 몇 달 전 쯤일 거에요.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하더라고요. 그 놈이 우리 아빠를 죽인 게 분명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증거도 안 나왔다며?”
“우리 아빤 자살 당한 거라니까요! 반드시 밝혀낼 거에요.”
아빠 같은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하더니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사람이 자살을 하면 했지 어떻게 자살을 당한단 말인가. 하지만 은조와의 짧은 대화 이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창한에게 수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나에겐 지나칠 정도로 예의가 바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싸늘하기 그지 없다. 이것만 봐선 전형적인 두 얼굴의 싸이코패스 캐릭터다. 공감력은 연기일 수 있다. 그러고보니 ‘가족사냥’에 나오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캐릭터는 자기를 모델로 삼았을 수 있겠다.
실버 트리 필름에서 잔금을 받아낸 것도 싸이코패스였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실버 트리 필름의 정 이사가 입구 쪽에서 어슬렁 거리는 게 보였다. 안 본 지는 오래 됐지만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이이고 창한이 찾아갔던 그 날 도대체 사무실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다가갔는데 정 이사는 내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점 수상하다. 도대체 사무실에 올라가서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지? 그러고보니 창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집에 한 번 찾아가볼까? 살인자로 의심하는 건 아니고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서다. 감독이 작가에 대해 알겠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명색이 감독인데 함께 일하는 작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도 무책임한 거다.
하지만 만약 살인범이면 어떡하지? 석 팀장에게 감독님 소리를 들은 덕분에 업 된 기분이 급 다운 됐다. 그런데 뭐.. 살인범이면 안 되나? 내 가족을 죽인 것도 아니고 작가가 글만 잘 쓰면 되잖아? 그나저나 실버 트리 필름 정 이사가 내 얼굴만 봐도 화들짝 놀라는 걸 봐선 분명 뭔가 흉칙한 짓을 저지른 것 같다. 돈 내놓으라고 자해 공갈 쇼라도 벌인걸까? 얼마 안 되는 잔금 갖고도 이 정돈데 자기 글을 도둑 맞은 걸 알면 가관이겠는걸? 진짜 살해당하는 거 아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 물 간 영화인의 장례식이다 보니 아는 얼굴도 드물었고 석 팀장 역시 나가자는 눈치여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빈소 입구에 임 감독의 초기작에서 스크립터를 거쳐갔던 윤보영 감독이 왔다. 윤 감독은 임 감독의 작품에 참여는 했지만 크레딧에 이름은 올리지 못했다. 임 감독의 폭언과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촬영 중간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윤보영 감독과는 십여년만의 만남인데 길거리에서 봤으면 몰라볼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독립 영화 외길을 걷느라 고생이 많은 듯 했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어서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지만 문득 윤보영 감독이 양서연 피디의 롤모델이자 최애 감독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연에게는 윤보영 감독이랑 친하다고 말했으니 지금이라도 친한 척을 해두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얼마 전에 영화 만드셨다면서요?”
“응. 작은 거 하나 만들었어. 아 맞다. 임 감독님 장례식 때 왔었어?”
“네. 누나도 오셨어요?”
“아니. 그 땐 일이 있어서.. 감독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어쩌다가.. 너는 잘 지내? 차기작 준비는 잘 되고?”
“그냥 그래요. 그나저나 누나 이번 작품은 어떤 이야기에요? 대단하세요 진짜! 존경스럽습니다!”
윤 감독은 이번 작품 설명을 위해 가시밭길과도 같았던 지난 영화 인생부터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근황 이야기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요약하자면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로 해외 영화제를 휩쓴 후 5년 간 집필한 장편 시나리오로 영진위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다음 드디어 장편 상업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려 했지만 제작이 번번히 무산돼서 마음 고생만 하다가 정부 지원금으로 저예산 독립 장편 영화를 만들었지만 제작비가 모자라 온갖 알바를 전전하며 제작비를 벌어가며 찍느라 3년이 걸렸고 아직 개봉도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독립영화 지원금을 받았고 작지만 알찬 배급사가 붙어서 조촐하게 개봉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시나리오 집필부터 개봉까지 장장 10년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윤 감독이 존경스러웠다. 진정한 영화감독님이시다. 모름지기 감독이란 남의 눈치 안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 진짜다. 하지만 무슨 일제 시대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윤 감독처럼 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윤 감독에게 우리 회사 기획팀 피디가 누나 팬이라는 말을 전해주었고 부디 이번 작품은 대박나길 기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석 팀장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빠져 나왔다.
“윤보영 감독이라고 알아? 독립영화 감독인데..”
“아 그렇구나. 아직 시나리오 이야길 못했지? 나는 이번 버전 대찬성이야! 정말 고생 많았어 감독님.”
석 팀장은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내 말을 끊고 자기 말을 했다. 독립영화 쪽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다.
“감동했어. 정말 최고야! 진작에 이렇게 쓰지 왜 똥고집을 부린 거야?”
그건.. 이번 버전부터는 내가 완전히 손을 떼서 그래..
허탈하다. 지난 10년여년 간 쓰는 글마다 까였고 일도 안 풀렸는데 본의 아니게 남의 시나리오를 훔치니 일사천리로 일이 술술 풀린다. 수정 사항들도 내가 수정한 게 아니라 창한이 수정해주니까 바로 오케이다. 내가 지금까지 안 풀린 이유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애초에 재능이 있으면 이런 인생을 살고 있지 않았겠지. 창한을 보니까 확실히 알겠다. 재능이 있으면 창한처럼 글을 썼을 것이고 개떡 같은 수정 요청이 와도 찰떡처럼 반영해서 지금처럼 잘 풀어나갔을 것이다. 내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마흔 넘어서야 인정하게 되다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만약 이번 버전에도 강 대표가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면 바로 퇴사하고 독립할 거야.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나 따라 올 거지?”
“당연하지. 그런데 위약금은?”
“내가 내 줄게.”
“돈 있어?”
“걱정 마. 제작자가 그 정도 돈도 없을까봐서?”
***
밀리언 필름에 갔지만 강 대표는 어디 갔는 지 만날 수 없었다. 석 팀장 말로는 아침에 이메일로 보냈으니 지금쯤 어디에선가 읽고 있을 거라고 했다. 갑자기 시간이 붕 떠서 창한에 대해 뭐라도 건져보려고 이름과 이메일 주소 ‘cineman1895’로 인터넷을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창한은 인스타 블로그 둘 다 안 하고 카톡도 기본 프로필이다. 이렇게까지 인터넷에 흔적이 없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치밀하게 흔적을 지웠거나 이메일을 새로 만들었거나.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구창한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