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석 팀장은 내가 자기 말을 안 믿는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곧장 부연설명에 들어갔다.
“내 말 못 믿는구나? 우리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연희가 가족들 따라서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까지 진짜 친했어.”
“이민 간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어?”
“뜸해졌지. 하지만 몇 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부터는 다시 친하게 지내고 있어. 부모님들끼리도 친하고 아무튼 친해.”
하긴 석 팀장이 나를 상대로 구라를 칠 이유는 없다.
“백 이사님은 어떻게 민오 오른팔이 된 거야? 접점이 상상이 안 되는데?”
“민오 꿈이 헐리우드 진출이잖아. 연희가 얼굴 반반하고 영어도 네이티브 수준이고 헐리우드 영화사에서 일한 경력도 있으니까 도움이 되겠다 싶었겠지. 시나리오 답은 한 달까진 절대 아니고 길어야 3주 정도면 올 거야. 민오는 연희가 읽어보라고 하는 시나리오는 바로 읽거든.”
“대단하네. 헐리우드 무슨 영화사에서 일한 거야?”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 그냥 그런 줄 알어. 알면 어쩔 건데?”
“알았어. 미안하다. 믿을게. 그나저나 강 대표는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걱정 마. 내가 어떻게 잘 타일러볼게. 대표님도 진심은 아닐 거야.”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유명 작가도 아닌 듣보잡과 공동 각본으로 이름이 올라갈 뻔 했다. 강 대표 같은 캐릭터는 나중에 영화가 잘 되면 다 자기 덕분이고 나는 찍새에 불과하다고 떠들고 다닐 스타일이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캐릭터다. 아무리 석 팀장이 잘 달랜다고 해도 이미 빈정은 상했으니 분명 뒤끝이 있을 것이다.
“믿는다. 석 팀장.”
“응. 이대로 가자. 솔직한 심정으론 이대로 촬영해도 될 것 같아. 감독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캐스팅은 걱정 마시고 이제 좀 쉬세요.”
민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간다는 그 탑스타 민오에게 내 시나리오가 들어간다고? 민오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데뷔와 동시에 폭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에 차기작을 탑스타와 함께 한다고? 이게 가능한 시나리오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모르겠다. 시나리오를 보낸다고 했으니 답을 기다려보자.
만약 민오가 출연한다면 포털 연예란에 대대적으로 기사가 날테니 창한에게는 더 이상 비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기 시나리오를 내 껄로 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이고 설상가상 민오에게까지 이 사실이 알려졌다간 나는 바로 하차다. 하차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고 회사에선 위약금을 요구할 것이고 업계에서는 영원히 매장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창한을 처리해야 한다.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떳떳하게 창한에게 가족사냥을 돈 주고 사 오든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창한의 입을 막아버리든가. 둘 다 쉽지 않을 것이다. 수 억을 주지 않는 한 시나리오를 팔진 않을 것 같고 창한의 입을 막아 버릴 자신도 방법도 없다.
알고보니 창한이 또 다른 나로 밝혀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중인격인거지. 폭망 감독으로 살다가 스트레스로 미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든 거야. 그렇다면 ‘가족사냥’은 결국 내가 쓴 셈이니 도둑질이 아니게 되는 건데.. 오죽 답답하면 이런 생각까지 할까. 이러지 말자. 더 늦기 전에 이실직고하든가 대안을 떠올려보자. 혼자서 끙끙거려봤자 답이 없고 만나서 얼굴을 보고 얘기하다 보면 뭐든 떠오를 것 같아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안녕하세요 감독님. 집입니다.”
“나 좀 이따 퇴근할 건데 저녁 같이 먹을까? 사무실 근처 맛집으로 모실게.”
강 대표랑 갔던 일식집이 적당할 것 같았다.
“아 오늘은 좀.. 죄송해요 감독님.”
“왜? 약속있어?”
“차를 카센터에 맡겼거든요.”
“사고라도 났어?”
“사고는 아니고 주차장에서 살짝 긁었어요.”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면 내가 갈까?”
“네? 저희 집으로요?”
“응. 우리 작가님 집필실 구경도 하고 지난 번에 못다한 회의도 이어서 할 겸.”
“아.. 그럼 주소 보내드릴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는 다 괜찮습니다.”
일식집에서 초밥을 포장해서 창한의 집으로 갔다.
***
창한의 집은 창한의 차 만큼이나 좋았다. 가구들도 다 명품 같아 보였다. 생활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먼지 하나 없는 거실 한 복판에는 스타벅스에나 있을 법한 길고 넓직한 우드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노트북 하나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아니.. 이 넓은 집에 혼자 사는 거야?”
“헤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집필도 여기서 하고?”
“보통은요.”
창한은 집 구경을 시켜줬는데 구석에 있는 방 하나는 보여주지 않았다.
“이 방 안엔 금두꺼비라도 숨겨뒀나봐?”
“그건 아니고요. 부모님 유품을 놔뒀거든요.”
거짓말 같았다. 마음 같아선 보여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부모님 유품이라니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
“이러니 글을 못 쓸 수가 없겠구나. 이보다 더 좋은 집필 환경은 상상이 안 된다. 부럽네 부러워.”
집 구경을 마치고 내가 포장해 온 초밥을 먹는데 차마 본론으로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럭셔리한 인테리어를 보니 돈이 아쉬울 것 같진 않았다. 수 억을 줄 수도 없지만 준다 해도 ‘가족사냥’을 넘길 것 같진 않았다. 동정심에 호소해볼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사실은 말이야 내가 폭망 후 지난 10년 간 너무 힘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니 글을 내 글인척하고 영화화를 진행 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보단 창한을 죽여 버리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다.
“차는 많이 긁혔어? 수리비 많이 나왔겠네.”
“그 정도는 아니고요.. 기스가 몇 군데 더 있어서 어차피 한 번 맡기려고 했어요.”
“주차장이 좁아?”
“좁진 않은데 옆에 주차한 차가 라인을 밟고 있어서 벽에 딱 붙여서 대려다가 그만..”
“아이고 민폐 주차에 당했구나. 그래서 가만 뒀어?”
“어쩌겠어요. 선을 넘은 건 아니니까요.. 제 잘못이죠.”
불현듯 심 대표가 뺑소니로 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만약 창한이 심 대표를 죽인 범인이라면 차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았을 것이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카센터에 차를 맡겼을 수 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우연의 일치겠지. 어디 카센터에 맡겼는지 알면 진짜 기스가 나서 맡긴 건지 범퍼가 찌그러져서 맡긴 건지 알 수 있겠지만 내가 형사도 아니고 더 물어봤다가 창한이 돌변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더 이상은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만약 창한이 심 대표를 뺑소니로 위장해 살해한 범인이고 임 감독도 자살시켰다면 진짜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건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자기 작품을 도둑 맞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픽션 논픽션 포함해서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만약 창한이 범인으로 밝혀지고 경찰에 체포된다면 ‘가족사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십중팔구 엎어질 것이다. 연쇄 살인범이 쓴 작품이 제작 될 리는 없다. 창한이 살인범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가족사냥’을 훔쳤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아무래도 입을 막아버리는 수 밖에 없겠는데 죽여버릴 수는 없으니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서 협박하는 건 어떨까? 하지만 약점을 잡기엔 창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일단은 임 감독에게 작품을 뺏기고 난 후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는지부터 조사해봐야겠다.
“여자 친구는 없어? 아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없어요.”
“헤어졌어?”
“아니요. 없어요.”
“헤어진 게 아니고?”
“원래 없어요.”
“아니 이렇게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집도 차도 럭셔리한데 여자 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고?”
“네.”
거짓말일 게 뻔한데 너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니까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이상한 건 창한도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는 것이다. 작품 얘기할 때와는 다르게 여자 얘기에는 묘하게 비협조적이었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나? 하지만 아무리 창한이 나를 감독님으로 믿고 따르고 극진히 모시고 있어도 남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자 친구 질문 이후 분위기가 급 어색해졌다. 어떻게 만회해야 할 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 창한이나 나나 말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어서 초밥마저 다 먹고 나니 집 안 분위기가 점점 더 썰렁해졌다. 창한은 멀뚱멀뚱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도 카톡을 확인하는 척 하며 스마트폰을 켜보았는데 간만에 난니맨의 협박 메일이 와 있었다. 분위기 안 좋을 땐 쥐 죽은 듯 있다가 꼭 분위기가 좋아질 법하면 협박 메일이 온다. 스토커가 따로 없다.
‘난 니가 누군지 알고 있다.’
매번 똑같은 멘트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달려 있었다.
‘니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
탑스타가 캐스팅 물망에 오르고 이제야 슬슬 차기작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 될 분위기인데 갑자기 똥물을 확 뒤집어 쓴 기분이다. 가만 있지 않겠다는 건 내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간.. 특히나 민오가 그 사실을 알았다간 백프로 감독 하차다.
애널맨 블로그에 민오 연기를 조롱하는 포스팅을 올리는 게 아니었다. 삭제해도 소용없다. 이미 온갖 영화 연예 커뮤니티에 내가 민오의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를 조롱하는 포스팅이 퍼져 있으니 민오도 그 포스팅을 읽었을 것이다. 백프로다. 애널맨이 누군진 몰라도 걸리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을 텐데 그런 민오에게 시나리오를 보낸 감독의 정체가 애널맨으로 밝혀졌다간 캐스팅이고 뭐고 다 나가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블로그를 하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언제까지 자수하라는 데드라인은 적혀 있지 않으니 하루 빨리 난니맨을 찾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을 막아야 한다. 난니맨과 창한.. 이제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창한은 그렇다 쳐도 난니맨 넌 도대체 누구냐. 답답한 마음에 ‘누구세요?’라고 대댓글을 달아봤지만 역시나 답은 없다. 창한은 누군지 알기라도 하지 난니맨은 누군지 몰라서 더 답답하다. 분명 내가 아는 놈인 건 확실한데..
p.s.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를 잠깐 쉬고 3월 중순에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