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 가기 직전의 탑스타

053.

by Zinn


설마 내 영화 때문은 아니겠지만 수아가 신변을 비관해 자살 했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는 싱숭생숭한 상태로 집에 들어왔더니 유정이 뒷골 땡기는 소리를 했다. 세미가 엄마 몰래 연기를 배우러 다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증거는 없지만 심증이 확실한 눈치였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내가 계속 꼬이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집 구석이 화목하지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미가 연기를 배우고 말고는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공부 잘 해서 의대에 갈 것도 아니고 이제라도 정신차려서 어중간한 명문대라도 가면 다행인데 수학을 죽도록 싫어하니 그래봤자 문과에 졸업하면 백수 또는 만년 취준생이겠지. 차라리 연기가 나을 수도 있지만 연기를 배운다 해도 십중팔구 얼마 못 가 제 풀에 지쳐 포기할 게 뻔하다. 내 딸이니까 솔직하게 견적을 내 보자면 세미의 비주얼로는 연기 잘 해서 유명한 배우 되는 것보단 차라리 의사 되는 게 더 쉬울 텐데 하여간 다 지 잘 되라고 하는 소리를 죽어라고 안 들으니 나중에 지가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 때 가서 엄마 아빠 말 잘 들을 걸 하고 후회해봤자 너무 늦을텐데..


아 모르겠고..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미가 뭘 하든 나는 수아의 저주로 인해 영원히 차기작을 못 만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신세라는 것이다. 만사가 귀찮아졌다. 우라까이고 뭐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출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방구석에 드러누워 끙끙 앓고 있는데 석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집.”

“사무실 안 나와?”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별로 안 궁금한가봐?”

“또 뭐야? 그냥 말해. 뜸들이지 말고.”

“민오 쪽에서 답이 왔어.”

“민오? 내가 아는 탑스타 민오? 뭐라는데?”

“시나리오 잘 봤고 감독님을 만나보고 싶다는데?”


민오가 나를? 한 물 가기 직전이긴 하지만 아직까진 엄연히 탑스타인 차민오가 ‘꼴리는 영화’로 데뷔하자마자 폭망 후 10년째 놀고 있는 폭망 감독 최경진을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정신이 번쩍 들며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졌다. 민오 쪽에 시나리오를 보낸다고 해서 답이 오기 까지는 몇 달 정도 걸리거나 아예 피드백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 외였다. 역시 석 팀장이 마냥 실없는 캐릭터는 아니다. 한 방이 있네.


“그럼 만나줘야지! 오늘? 어디로 가면 돼?”

“오늘은 아니니까 진정하고. 글쎄.. 지금 만나도 될 지 모르겠네.”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며?”

“자신 있어?”

“자신? 무슨 자신?”

“민오가 감독을 만나보고 싶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시나리오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뜻 아냐?”

“그건 기본이고.. 민오에게 감독으로 인정 받을 자신 있어?”


잠깐이지만 행복했다. 민오는 감독에게 까칠하고 못 되게 굴기로 유명했다. 딱 봐서 감독 자격이 없다 싶으면 기성이고 신인이고 다 쌩까고 바로 본인이 감독이 된다고 했다. 특히 신인 감독 킬러로 유명한데 데뷔작을 민오와 찍은 후 영원히 은퇴해 버린 감독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일단 ‘가족사냥’을 좋게 본 건 맞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가족사냥’을 집필했다는 감독 최경진에 대한 조사도 끝났을 것이다. ‘꼴리는 영화’로 데뷔했으나 폭망했고 그 이후 준비하는 작품마다 엎어지는 바람에 10년째 집에서 놀고 있는 네이버 평점 4점대 영화감독..


만날 이유가 없는데?


비록 한 물 가기 직전이긴 하지만 아직은 엄연히 탑스타인 차민오에게 감독으로 인정받을 만한 포인트가 한 개도 없다. 최소한 만나자마자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아이고 감독님 시나리오 잘 봤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할 일은 없는 것이다.


왜 만나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민오가 내가 감히 넘보지 못할 급의 대스타는 아니게 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전성기 때의 민오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부터 매너리즘에 빠진 김 빠진 연기만 선보였고 출연한 영화마다 줄줄이 망했고 영화 홍보차 예능에 나와도 노잼이어서 시청률과 화제성 둘 다 별로였고 설상가상 인성마저 쓰레기더라는 흉흉한 소문만 나돌다보니 흥행이 보장된 시나리오나 잘 나가는 감독들의 작품과는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알 것도 같다. ‘가족사냥’이 목적인 것이다. 그래도 이상했다. ’가족사냥’만이 목적이라면 석 팀장에게 이야기 해서 시나리오에만 관심 있으니 팔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감독 최경진은 왜 만나보고 싶다고 한 걸까? ‘꼴리는 영화’ 폭망 이후 꿈에도 그리던 내 시나리오로 스타 배우와의 미팅이 성사되기 직전이지만 어쩐지 만나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 감독으로 인정받을 자신 없어?”

“자신이.. 없다.”

“장난해? 그러면 엎을까? 다른 감독 구하고?”

“그건 안 되지. 미안한데.. 자신은 있는 걸로 하자.”

“다시 물어볼게. 자신 있어? 없어?”

“있어.”

“만날거야?”

“좀 떨리긴 하지만.. 만나야 되는 거지?”

“에휴.. 너 감독이잖아. 감독이면 감독답게 나에게 신뢰를 주면 안 될까?”

“만날게. 자신도 있는 걸로 하자고 했잖아."

“알았어. 미팅 잡히면 다시 알려줄게. 사무실엔 언제 나올 거야?”

“내일?”

“오케이. 만나서 다시 얘기해.”


그토록 꿈꿨던 탑스타와의 미팅이었지만 막상 만나려니 더 싱숭생숭해졌다. 민오를 만났다가 어쩐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험한 꼴을 겪게 될 것만 같았다. 양심에도 찔렸다. 회사는 물론이고 이제는 민오까지 ‘가족사냥’을 내가 쓴 걸로 알 텐데 만약 내가 쓴 게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감독 하차는 당연하고 업계에 시나리오 절도범으로 소문 나서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겠지?


민오랑 미팅이 잘 되면 무조건 캐스팅 기사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창한이 알게 되는 건 시간 문제다. 하지만 민오는 바쁘다. 비록 한 물 가기 직전이긴 하지만 충무로의 거의 모든 시나리오가 민오에게 가는 바람에 민오를 캐스팅하려면 번호 표 뽑고 1년 미팅까지 1년 계약까지 1년 최소 3년은 기다려야 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설마 미팅 한 번 했다고 당장 캐스팅이 되겠어? 그것도 폭망 감독 최경진의 차기작에? 운이 좋으면 미팅 몇 번 더 하고 이렇게 고쳐봐라 저렇게 고쳐봐라 시간만 질질 끌다가 결국엔 출연을 고사하겠지. 설령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캐스팅 확정까지 아무리 빨라도 1년이다. 작가 지망생인 창한과의 관계는 그 전에 흐지부지 될 것이고 ‘가족사냥’은 십중팔구 엎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창한은 영원히 내가 자기 시나리오를 내가 쓴 걸로 해서 팔아 먹고 다녔다는 사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엎어질 게 뻔한데 사실 ‘가족사냥’은 내가 쓴 게 아니라는 양심 선언이 지금 타이밍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10년 동안 엎어지기만 했는데 이제와 잘 될 리가 있겠어? 하지만 엎어질 때 엎어지더라도 민오는 만나봐야 한다. 그래야 민오와 캐스팅 미팅을 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며 다음 프로젝트를 도모할 수 있다. 민오와의 미팅은 당연히 자랑거리고 당장 민오가 미팅을 원한다는 사실부터 누군가에게 자랑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이럴 때 필요한 건 17년째 감독 지망생 동민이다. 민오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원없이 자랑하고 약도 올려야지. 당장 동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뭐하냐?”

“그냥 있다.”

“어디야?”

“아 왜?”

“이게 감독님한테 무례하게 왜라니.. 너 내가 누구 만나는지 알아?”

“감독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망생보다 못한 폭망 감독 주제에.”

“지망생보다 못하다고? 지망생은 이런 미팅 못할텐데?”

“뭔 미팅?”

“맞춰 봐.”

“하아.. 너 심심하냐? 전화 끊는다.”

“차민오! 어떠냐? 이래도 내가 지망생보다 못하냐?”

“누구?”

“차민오! 차민오 몰라?”

“아~ 그 매너리즘에 빠진 노잼 연기로 관객들이 질려 버려 줄줄이 흥행 폭망한 한물 간 탑스타 차민오?”


내가 동민을 오해했다. 비록 어릴 적에 조감독도 하고 17년째 감독 지망생이긴 하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인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오 정도는 같은 업계인들에게는 대단하게 느껴질 지 몰라도 일반인에겐 별 거 아닐 수 있다. 10년째 차기작을 준비하다 보니 한 물 가긴 했지만 그래도 스타급 배우와 미팅을 한다는 생각에 잠깐 현실 파악을 못 했는데 민오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엄연한 팩트이다. 이제는 민오가 캐스팅 됐다는 사실 만으로는 투자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영화 커뮤니티 게시판만 봐도 차민오라는 배우에 대해선 호감보단 비호감 또는 무관심이 다수였다.


그렇다면.. 감히 내가 민오를 넘봐도 되는 걸까? 동급까진 아니어도 같이 어울려도 되는 정도? 누가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같이 어울리지 못할 정도는 아닐 수도 있다. 차민오는 줄줄이 흥행 실패로 한 물 가버린 지는 해지만 나는‘가족사냥’과 함께 다시 뜨는 라이징 썬이기 때문이다.


미팅 때 해 주고 싶은 말도 떠올랐다.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 언젠가부터 연기보다는 개그 쪽으로 노선을 잡은 것 같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위트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 같은데 무리다. 코미디라는 건 기본적으로 약자가 하는 것이다. 약자니까 살아 남기 위해 눈치가 빨라지고 안 맞으려고 말도 조심해서 하다 보니 말빨도 느는 것이다. 내가 인간 차민오에 대해서 백프로 다 아는 건 아니지만 태어나서부터 잘 생겼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집도 잘 살았으니 단 한 번도 약자 포지션에 있던 적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눈치 없고 말빨도 별로니 웃길 리가 없다.


아마도 탑스타 차민오의 주변에는 이런 직언을 해 주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감언이설만 늘어놓는 아첨꾼만 가득하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만약 이번 미팅 때 허심탄회하게 이런 얘기를 해 주면 감독으로서의 인정은 모르겠지만 인간 최경진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는 있다. 안 웃기니까 웃기지 말라고 직을 걸고 조언하며 쌓인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작품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독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겠지?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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