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기억이 안 난다고 주장할 게 뻔한 술김에 막말

054.

by Zinn


조만간 탑스타 차민오에게 감독으로 인정받고 함께 영화를 찍을 몸이니 17년째 감독 지망생 따위와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겠다. 최소한 어울리는 시간 만이라도 줄이는 게 맞다.


차민오는 한 물 간 배우라는 의견에 그러든가 말든가 대충 맞장구 쳐주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극장 개봉 영화 감독에 탑스타와의 미팅까지 예정되어 있으니 더 이상 듣보잡 따위와 어울릴 레벨은 아닌 것이다. 맨날 시나리오 공모전 도전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부질없는 얘기만 해서 재미도 없다.


푹 자고 일어나 아점 먹고 회사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다들 점심을 먹으러 나간 줄 알았더니 기획팀 조재웅 피디가 파티션 뒤에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혼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했다. 대우가 확 달라진 걸 보니 탑스타와 미팅 예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인 듯 했다.


살짝 목례로 받아준 후 감독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차민오 관련 뉴스부터 찾아보았다. 서울 어딘가의 건물을 전액 현찰로 매입했다는 기사가 떴는데 부럽지도 않았다. 영화 시장이 예전 같지 않아 이제는 아무리 영화가 대박이 난다 해도 감독이 건물주가 될 일은 없기 때문이다. 혹시나 캐스팅 관련 기사가 있나 뒤져보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재웅이 들어오더니 깔끔하게 프린트 된 A4 종이 몇 장을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 놓았다.


“이게 뭐야?”


쭉 훑어보니 배역별 캐스팅 후보자 리스트였다. 주로 차민오 사단으로 알려진 배우들이 흥행 성적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제법 그럴싸 했고 공 들인 티가 났다. 조재웅 피디의 출신 학교는 모르지만 어쩐지 명문대 출신인 듯 했다.


“우와 고마워! 제법인데?”

“헤헤 무슨 말씀을요. 감독님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준비해봤습니다.”

“석 팀장이 시킨 거야?”

“앗 아니요. 차민오 배우님 미팅 예정이라는 얘길 듣고 제가 알아서 작성해보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저.. 죄송한데 팀장님에게는 비밀로..”

“말하지 말라고?”

“네.”

“왜?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팀장님은 이런 거 부질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알았어. 나 입 무거워. 걱정 마.”


서연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몰랐는데 팀장이 하지 말라는 일을 굳이 한 것부터 팀장을 패스하고 곧장 나에게 들이댄 걸 보니 모범생 같은 외모와는 달리 은근히 야심가인 듯 했다. 안타까웠다. 이런 망할 게 뻔한 작고 조촐한 회사에서는 본인이 아무리 잘 나고 열심히 해도 답이 없기 때문이다.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

“아니요. 저는 좀 아까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왔습니다.”

“아 그래. 맛있게 먹고 이 자료는 잘 참고할게. 고마워!”

“네 감독님!”


노답 회사에서 애쓰는 모습이 갸륵해 밥이라도 사 주려는데 굳이 삼각 김밥을 먹겠다고 하는 걸 보니 아이큐는 높아도 EQ는 낮은 듯 했다. 이쪽 일은 사람과의 관계가 전부인데 아직 잘 모르거나 헛똑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말해줘봤자 꼰대 소리나 들을테니 잠자코 있었다. 확실한 건 1년 안에 관둘 거라는 사실이다. 백퍼다.


조단역급 배우 리스트를 보는 건 ‘꼴리는 영화’ 이후 거의 10년 만이어서 못 보던 얼굴들이 많아 신기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창한이랑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이었는데 사진 밑에는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고 몇 안 되는 출연 작품들은 모르는 영화들 뿐이었다. 검색해보니 나오지도 않고 감상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사진은 아무리 봐도 창한이었다. 창한이 연기를 했었다는 얘긴 없었는데 왜 숨겼을까? 아니면 그냥 닮은 사람인걸까? 쌍둥이나 도플갱어가 아니고선 이 정도로 닮을 순 없기에 찝찝해서 전화해서 배우 활동도 하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석 팀장의 카톡이 왔다.


‘사무실이야?’

‘응. 좀 아까 왔어.’

‘끝나고 술 한 잔 할까?’

‘좋지.’

‘나 먼저 나가 있을게. 30분 정도 이따가 천천히 나와.’

‘애들도 부를까?’

‘애들은 왜?’

‘다들 고생하는데 너무 나 몰라라 한 것 같아서.’

‘무슨 고생?’

‘아니 캐스팅 리스트도 정성껏 만들어주고..’

‘캐스팅 리스트?’


아뿔싸! 조재웅 피디가 나에게 배역별 캐스팅 후보자 리스트를 만들어 준 걸 석 팀장에게는 비밀로 해 달랬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발설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잔뜩 썩어 있을 석 팀장의 얼굴이 그려져 절로 식은 땀이 흘렀다. 한참 침묵만 흐르다 새로 톡이 왔다.


‘서연이만 불러.’


석 팀장은 서연도 안 불렀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자기랑 둘이 있으면 술 맛도 안 나고 재미 없어 할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걸 눈치 챘는지 마지못해 서연만 불러주었다. 당장 서연에게 회식 공지를 날렸고 끝에 조재웅 피디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재웅에게 미안했다. EQ가 딸려서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앞으로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석 팀장을 시작으로 무슨 비밀 군사 작전하듯 각자 따로 회사를 나와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했다. 좌 석 팀장 우 양 피디. 기획팀 미녀 둘을 마주보고 술을 마시고 있으려니 흥행에 성공한 감독이 된 기분이었다. 이보다 더 술술 잘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안주는 강 대표였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만 있지 머리에 든 게 없다느니 아직까지 회사가 안 망한 게 신기하다느니 감독님 아니었음 올해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라느니 꼴에 작가 데뷔 욕심까지 내는 걸 보니 주제 파악을 못한다느니 그럴 거면 회사 때려 치우고 작가 교육원을 다니라느니 등등.


다들 번갈아가며 강 대표 뒷담화를 갈겨주자 답답한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런데 석 팀장과 서연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애잔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마냥 그냥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석 팀장이 아무리 관리를 잘 하고 왕년엔 영화판 3대 미녀 중에 하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뻤어도 20대 양서연 피디 옆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세월의 흔적이 숨겨지질 않았다.


엄마와 딸이라고 해도 그러려니 하겠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거의 스무살 가까이 연상이니 실제로도 엄마 뻘이 맞다. 석 팀장이 이 정도면 자기 관리는 커녕 왕년에 잘 생겼다는 소리 한 번 들어 본 적 없는 나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 지 생각하고 싶지조차 않아 잔에 담긴 소주를 물처럼 마셔 없앴다.


서연은 그동안 나에게 석 팀장 뒷담화를 깔 땐 언제고 막상 석 팀장 앞에선 여우처럼 아부를 퍼부었고 강 대표 뒷담화에도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부자라고는 하는데 생각만큼 돈이 많은 집은 아닌 것 같아요”, “자꾸 누구 소개시켜 준다고 해서 부담스러워요”, “자기가 동안인 줄 알아요” 등등..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영화 감독을 꿈꾸는 모여라 꿈동산 같은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사회 생활도 잘 하는 걸 보니 대성할 조짐이 보였다. 어쩐지 지금은 메이저 영화사의 잘 나가는 한국영화 팀장인 영화과 후배 박미나의 대학 시절을 보는 기분이 들어 술맛이 썼다.


강 대표 뒷담화 거리가 다 떨어질 무렵 석 팀장은 슬슬 먼저 보내고 서연과 둘이서만 한 잔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석 팀장에게만 자꾸 술을 권했는데 석 팀장은 마시라는 술은 안 마시고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믿음을 달라는 것이다.


“난 진짜 우리 최경진 감독님을 믿고 따르고 싶어.”

“헤헤. 고마워.”

“그런데 왜 믿음이 안 가지?”

“미안해. 내가 더 잘 했어야 되는데.”


폭망 감독을 믿지 못하는 석 팀장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꼭 우리보다 한참 어린 양서연 피디 앞에서 이래야만 하는 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쩐지 내가 석 팀장에겐 소홀하고 서연에게만 눈길을 줘서 삐진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질투. 설상가상 눈이 살짝 풀려 있는 걸 보니 내일이면 기억이 안 난다고 주장할 게 뻔한 막말을 퍼부을 준비가 된 듯 했다. 듣지 말아야 될 말이 들려오기 전에 빨리 일어나야 했다. 설마 서연과 나의 관계를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그래서.. ‘가족사냥’은 도대체 의도가 뭐야?”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경고랄까?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 하자는?”

“왜 쓴 건데? 내가 앞으로 시나리오 쓸 때는 나한테 컨펌 받고 쓰라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뭐?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자는? 민오가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거야?”

“너무 준비된 답변 같나? 마치 영화제에서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나 나올 법한? 하하.”


마음 같아선 분위기 썩창내지 말고 좀 웃으라고 한 소리 하고 싶었으나 감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점점 흉흉해지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실없이 너털 웃음을 지어도 봤지만 석 팀장의 얼굴은 여전히 썩어 있었고 서연은 옆에서 오들오들 떨며 석 팀장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석 팀장은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분위기가 더 숙연해지기 전에 일어날 준비를 하려는데 석 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격. 넌 감독 실격이야.”


둘이 있을 때면 모르겠는데 내가 영화과 갓 졸업한 20대도 아니고 우리보다 한참 어린 피디 앞에서 망신을 주니 더 이상 억지 웃음조차 안 나왔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화를 냈다간 분위기가 더 우스워질 것 같아 말 없이 술 잔만 내려다 보고 있는데 석 팀장은 이 정도면 충분히 갈궜다고 생각했는지 술자리 시작 후 처음으로 서연에게 말을 건넸다.


“서연이 너 내일까지 예상 질문 뽑아와. 차민오 배우님이 우리 감독님에게 궁금해 할 만한 것들로.”

“네 팀장님.”

“아니다 지금 해 보자. 질문 해봐.”

“네?”

“니가 민오라 생각하고 최경진 감독에게 질문해보라고.”


서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무 말 못한 채 나와 석 팀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석 팀장은 서연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질문이 없어? 그럼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거나 물어봐바. 뭐 평소에 감독님에게 궁금한 거 없었어? ‘꼴리는 영화’는 봤을 거 아냐? 안 봤어?”

“아니요! 봤어요.”

“잘 됐네. 물어봐. 영화를 봤으면 궁금한 게 하나는 있을 거 아냐? 하다 못해 제목은 왜 그 따위로 지었는지 안 궁금해? 나는 궁금하던데?”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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