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내가 감독이 아니었음 거들떠도 안 봤을 거면서

056.

by Zinn


이럴 땐 혜나가 딱이지.


밤이 늦었지만 나오라고 하면 바로 나올 거야. 어쩌면 늦은 밤이니까 더 좋아할 지도? 나만 좋은 건 아니었을 거잖아? 차라리 잘 됐어. 혜나에 비하면 서연은 여러모로 애매하다. 게다가 석 팀장이 천 만원이나 쏴준 당일 석 팀장의 팀원에게 찝적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기껏 믿어줬는데 감독 답지 못한 행동으로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혜나는 서연에 비해 마음도 훨씬 편하다. 통화 목소리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시나리오 어떻게 봤는 지 궁금해서 전화했다고 말하면 되니까 명분도 있다. 바로 그 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혜나에게 먼저 카톡이 왔다.


‘감독님 시나리오 정말 잘 봤어요!’


이어서 궁금하지도 않은 시나리오에 대한 감상이 이어졌다. ‘감독님 최고’, ‘감동이에요.’, ‘다 읽기도 전에 눈물 났어요.’ 등등. ‘가족사냥’이 슬픈 이야기는 아닌데 왜 눈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캐스팅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잘 봐줘서 고마워.’

‘에이 고맙긴요. 우리 사이에ㅎ’


너무 노골적으로 캐스팅 욕심을 드러내니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혹시 수아는 연락 됐어?’

‘아 죄송해요. 아직이에요.’


선 캐스팅, 후 연락 이라는 뜻이겠지.


‘통화 괜찮으세요?’


오늘따라 유난히 부담스러워서 안 괜찮다고 하려는데 불쑥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밖이세요? 이 시간에?”

“응. 술자리가 방금 끝났거든.”

“무슨 술자리였는데요?”

“응. 그냥 아는 제작사 대표님.”

“아 그러셨구나. 잘 나가시네요?”

“무슨.. 그 정돈 아니야..”

“수아는 꼭 찾으셔야 되는 거죠?”


차마 수아가 난니맨인 것 같아서 찾으려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수아에게 마음의 빚이 있잖니.. 그렇게 열심히 연기해줬는데 빛도 못 봤고..”

“그래서요?”

“이번 작품으로 빚을 갚을 방법이 있을지 얘기해보고 싶어서. 물론 수아가 원한다면.”

“마음의 빚? 수아랑도 뭔 일 있었어요?”

“뭔 소리야? 아무 일도 없었어! 촬영 끝나고 본 적도 없고. 알겠지만 인터넷에 수아 베드씬이 짤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잖아. 그게 너무 미안해서.”

“에게? 고작 그거 땜에 수아를 찾는 거였어요? 진짜 소심하시다. 그럼 나는요? 서운해요 감독님! 나도 감독님 작품에서 베드씬 찍었고 심지어는 현실에서도 찍어드렸으니까 주연 시켜주셔야겠네요?”

“아 잠깐만!”


현실에서 베드씬이라니.. 얘가 큰 일날 소리를 하고 있네.


“주연 시켜주신다고요?”

“기다려봐. 이 바닥 잘 알면서 왜 이러니? 아직 캐스팅 단계는 아니고 주연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서운해 하지 말고.”


혜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정 그러시다면야.. 알았어요. 수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연락 안 된다며?”

“이런 일로 연락 하긴 좀 그렇긴 한데 감독님이 정 원하시면 만나게 해 드릴게요. 언제가 좋으세요?”

“빠르면 빠를 수록 좋지.”

“내일 만나요. 전화 끊고 톡으로 주소 보내드릴 테니 2시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아요.”

“어디로 가는데?”

“내일 알게 되실 거에요.”

“그래.. 암튼 진짜 고맙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내일 물어보면 안 될까? 오늘은 좀 피곤하네.”

“감독님 저 사랑해요?”


하.. 이걸 또 물어보네. 점점 더 혜나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런데 뭐.. 사랑한다는 말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어차피 다 비지니스고 떡정도 정이니까.


“사랑하지.”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에요?”

“사랑하는 사이?”

“아내 분은요? 아내도 사랑해요?”

“사랑하지. 가족이잖아. 자기는 엄마 아빠 사랑 안 해?”

“감독님 나쁘다.”


혜나는 무례하게 인사말도 없이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지도 내가 차기작 촬영을 목전에 앞 둔 기성 감독이 아니었음 거들떠도 안 봤을 거면서 왜 순수한 척이지? 수아 일만 마무리 되면 바로 손절이다. 이 추세대로라면 머지 않은 미래에 난니맨보다 더 골치아픈 시한폭탄이 될 게 뻔했다.


내일 수아까지만 같이 만나면 바로 출구 전략 돌입이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결혼과 동시에 은퇴인데 만나는 남자가 있으려나? 그냥 남자는 많아도 결혼할 남자까진 없는 것 같으니 언제 동민이랑 셋이서 자리 한 번 마련해줘야겠다. 동민이라면 수아가 결혼하자고 하면 얼씨구나 할 거야.


밤거리를 한참 걸었지만 석 팀장이 지른 마음 속의 불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어릴 땐 이 시간에 불러내도 튀어 나올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씨가 말랐고 딱히 부르고 싶거나 보고 싶은 사람도 없다. 설상가상 오늘따라 택시도 안 잡혔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창한 뿐이다. 망설임 없이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고 언제나처럼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창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넵! 감독님!”

“어디야?”

“집이요. 집필 중이었습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넵! 감독님! 무슨 일이신지..”

“술자리가 좀 늦게 끝났는데 택시가 안 잡히네?”

“넵 알겠습니다 감독님! 바로 나가겠습니다. 주소 찍어 주세요.”


창한에게 주소를 찍어주자 금방 차를 끌고 달려나왔다. 확실히 비싼 차여서인지 활짝 열린 조수석 창문으로 들어오는 밤 공기도 고급진 느낌이었다. 늦은 시간에 나와준 게 고마워 일단은 칭찬으로 시작했다.


“시나리오 좋던데? 옛날에도 나쁘지 않았지만 정말 많이 늘었어.”

“에이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 해도 그건 다 감독님 덕분이고요.”

“인성까지 합격! 넌 역시 될 놈이었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무슨.. 속는 셈 치고 이번 작품에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할 수 있지?”

“네 감독님! 그럼 이제부턴 뭘 할까요?”

“하긴 뭘해. 일단 좀 쉬고 있어. 원래 건물 지을 때도 양생이 필요하잖아. 시나리오도 똑같아. 시나리오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그냥 놀아. 정 심심하면 다른 일이라도 하고 있든가.”

“다른 일 할 건 없는데요.”

“대답이 이상하네. 나만 믿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니까? 나 못 믿어?”

“믿죠. 죄송해요. 제가 괜히 조급해서요. 계약은 언제 할 수 있을 지도 궁금하고..”

“계약은 생각도 하지 마. 아직 멀었어. 지금 단계에서 영화사들에 시나리오 돌렸다간 아이템만 뺏기고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어. 그 정도는 알잖아? 안 겪어본 것도 아니고.”

“사실은 다음 달이 부모님 기일이어서요.”

“아 미안하다 그것도 모르고.”

“아니에요 감독님. 제가 말씀 안 드렸잖아요.”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작가로 데뷔하지 못한 게 너무 죄스러웠는데 이번 기일엔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에 작가 계약서를 올리고 싶다는 것이다. 감히 계약 이야기를 꺼낸 벌로 혼꾸녕을 내 주려는데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김이 빠졌다. 설상가상 부모님 돌아가시고 외롭고 힘들게 살아온 작가 지망생의 작품을 도둑질 했다는 애써 잊고 있던 죄책감도 되살아났다.


창한 덕분에 10년 만에 감독 대접을 받게 됐고 탑스타와의 캐스팅 미팅도 성사 직전이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차기작을 찍을 수 있게 됐으니 나도 창한에게 뭔가 도움을 주어야 마땅했다. 작가 데뷔를 시켜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겠지만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니 선물이라도 해 줄까? 마침 석 팀장이 쏴 준 천 만원이 있으니 명품 시계라도? 아니면 양주?


“감독님은 혹시 고아가 된 기분 아세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한 동안은 티비에서 고아들 나오면 남 일 같지 않고 다 내 동생들 같고 그러더라고요. 아 맞다. 저 고아 맞네요! 부모님 없으면 고아죠. 연락되는 친척도 없으니..”


바로 그 순간 번개처럼 굿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창한에게 가장 필요한 건 명품 시계나 양주가 아니라 가족이다. 그래! 가족이 되어주자!


“야 이 새끼야. 니가 왜 가족이 없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네?”

“니가 그런 말 하면 나는 뭐가 되냐? 너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니?”

“감독님은.. 감독님이죠.”


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형님이라고 불러.”

“네? 감히 제가 어떻게 감독님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이 새끼야.”


작가 데뷔 따위야 언제든 기회가 되면 할 수 있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만약 창한과 내가 가족 같은 사이가 된다면 작품 한 편 도둑질 한 것 정도는 용서가 될 것이다. 원래 가족은 그런 거니까. 등에 칼 꽂힘이나 뒤통수 가격 따윈 그러려니 하면서 평생 같이 가는 사이.


나만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다. 원래 신인은 데뷔가 어렵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시나리오만으로는 일이 되지 않는다. 기성 감독이 나서니까 일이 되려는 것이다. ‘가족사냥’이 대박이 난다면 그로 인한 수익도 공평하게 나누어줄 것이다. 그래도 나나 되니까 나중에 창한을 끌어줄 생각을 하는 거지 진짜 양아치 같은 놈들에게 걸렸다간 작품만 뺏기고 끝났을 것이다.


가족끼리는 간이나 신장도 떼어 줄 수 있는 판에 내가 간이나 신장을 떼달라는 것도 아니다. 고작 시나리오 한 편일 뿐이다. 창한은 아직 젊고 재능이 넘치니 또 쓰면 되지만 나는 아니다. 내일 모레 오십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창한은 나를 쉽사리 형님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일이 되려면 기세와 타이밍이 중요하다. 헤어지기 전까지 형님 동생하는 가족같은 사이로 발전시키려며 지금 밀어부쳐야 한다. 결정타를 고민하는 사이 창한의 차가 우리 아파트 단지 주차장 입구에 멈추었다.


“도착입니다. 감독님.”

“앞으로 한 번만 더 감독이라고 불렀다간 진짜 화낸다. 저기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네?”

“지하에 주차하라고!”

“주차를요? 저는 내려드리고 바로 가면 되는데요?”

“우리가 남이야? 동생이 형님 집까지 왔는데 올라가서 형수님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조카 용돈도 챙겨주고 싶으면 말리진 않을게. 하하.”


새벽 1시였다. 지금 창한을 데리고 올라갔다간 내일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다 우리 가족 모두 잘 살아 보자고 하는 일이다. 이해는 나중에 구하자.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먼저 내렸고 창한이 지하에 주차하러 간 사이에 석 팀장이 보내 준 천 만원 중 백 만원을 유정의 계좌로 송금 후 잽싸게 인증샷을 보냈다. 바로 답톡이 왔다.


‘에그머니나.’

‘내 마음.’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동생 한 명 데리고 올라간다 술상 차려 놔.’

‘ㅋㅋㅋ’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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