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이 하자고 해도 안 한다는데

058.

by Zinn


차가 도착한 곳은 경기도 양평 외곽의 조그만 상가 1층에 위치한 개인 카페였다. 레트로풍의 싼티나는 디자인의 간판에는 ‘리멤버’라고 적혀 있었다. 상가 앞 주차장에는 차단기가 없고 광활해서 아무 데나 대고 차에서 내렸다.


“수아가 카페를 차렸어?”

“차린 건 아니고 아는 언니 카페인데 잠깐 도와주고 있대요.”

“배우 일은 완전 접은 모양이네?”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가요.”


카페는 2층 상가의 1층 구석 자리에 있었고 옆 가게는 치킨집이었다.


묵직한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테이블은 총 10개 정도로 밖에서 보이는 것보단 규모가 있었지만 커피 맛으로 승부하는 본격적인 바리스타 카페 같진 않았고 그냥 동네 장사 같았다. 혜나는 몇 번 와 본 듯 성큼성큼 먼저 안쪽 자리로 들어갔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쭈뼛쭈뼛 따라 들어갔더니 창가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수아가 보였다.


“반가워. 정말 오랜만이지?”


하이 텐션으로 인사를 건넸지만 수아는 무덤덤했다. 자기 관리를 잘 했는지 외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예전과 딴판이었다.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 바라보듯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혜나는 수아의 옆에 나는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수아는 여전히 멀뚱멀뚱 아무 말도 하질 않아서 내가 다시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

“네.”


단답형 대답 외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다.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다음 작품 캐스팅 어쩌구 이야기를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가 잠자코 있자 이번에는 수아가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면서요?”

“응 그랬지. 커피부터 시킬까? 자기도 마시고 싶은 거 있음 시켜. 여기 빵이나 케익 같은 것도 있나?”

“왜요?”

“배도 고프고 반갑기도 하고..”

“왜 오신 거냐고요?”


서먹한 분위기 좀 띄어볼까 했는데 닥치고 용건만 얘기하라는 분위기였다.


“혜나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음 작품을 곧 들어가게 될 것 같거든. 너무 늦어진 건 미안하고..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거든.”

“그래서요?”

“마침 수아에게 어울릴 만한 배역이 있어서..”

“말씀은 감사한대요 전 이제 연예계에 미련 없어요.”

“이번 작품은 ‘꼴리는 영화’랑은 달라. 19금이 아니라 정통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고..”

“봉준호나 박찬욱이 하자고 해도 안 할 거에요.”


말 문이 다시 한 번 막혀버렸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이 하자고 해도 안 한다는데 최경진 따위가 감히 무슨 제안을 하겠는가. 수아는 시종일관 차가운 눈빛에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배역 하나 따 내려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안달복달 하던 예전의 풋풋한 분위기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나도 할 말이 없어져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잠시 후 수아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사라져버렸고 결국은 커피 한 잔 시키지도 못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차라리 잘 됐다. 커피 맛이 있을 리가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수아는 진심으로 연예계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난니맨일 가능성 역시 제로에 가까웠다. 폭망 감독 최경진 따위와는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아깝다는데 굳이 난니맨이라는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서 악플을 달고 이메일을 보낼 시간과 정력이 있을 리가 없다. 난니맨이 수아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난니맨은 누구란 말인지.. 탑스타 차민오를 만나기 전에 난니맨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혜나는 내가 카페에서 나온 뒤 5분 정도 후에 따라 나왔다.


“수아는 어디 간 거야?”

“모르겠어요. 전화해도 안 받네요?”

“뭐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싫다는데.. 그럼 가 볼까?”


혜나는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근처 맛집에 들르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밥맛이 없어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러자 헤어지기 전에 최대한 어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본인이 ‘가족사냥’을 어떻게 읽었는지 감상을 늘어놓았다. 묵묵히 들어주긴 했는데 혜나는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작품은 혜나와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아직 통보는 이르다. 말을 하더라도 동민이가 만들 예정인 단편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시킨 다음에 해야 한다.


난니맨 찾기에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민오와의 미팅 준비를 소홀히 할 순 없었다. 혜나는 나를 사무실 앞에 내려다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 방에까지 따라 들어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직원들이 있을 지도 모르니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혜나의 등을 떠밀어 보낸 후 사무실에 올라왔는데 휴일이어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감독 방에 들어오자마자 딴 짓 안 하고 곧장 차민오 미팅 준비에 돌입했다. 석 팀장의 말에 의하면 민오 캐스팅을 성사시키려면 차민오의 왼팔인 백연희 이사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백연희라는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짤막한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잘 나가는 매니저들 인터뷰 연재 기사 중 하나였는데 확실히 잘 나가는 매니저는 맞는 모양이다.


백연희 이사는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엔터테인먼트 관련 전공을 했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며 차민오를 한류 스타로 만든 능력자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석 팀장 말로는 집도 부자고 아직 미혼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예쁘고 화려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섹시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는 혜나같은 스타일보다는 백 이사 같은 유능한 커리어 우먼에 끌리는 것 같다. 인터뷰 기사를 정독했으니 다음은 인스타다. 이 정도 캐릭터면 인스타 계정이 없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석 팀장의 인스타 팔로워들을 찾아보니 역시나 백연희 소유로 추정되는 계정이 있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싱글 그 자체였다. 명품 인증샷에 해외 여행에 연예인 친구들과의 셀카까지 연예인은 아니지만 거의 인플루언서나 다름 없었다. 팔로워도 만명 가까이 되는 걸 보니 이 정도면 협찬도 가능할 것 같았다.


진심으로 잘 보이고 싶었다. 연희도 석 팀장처럼 제작까지 꿈꾸고 있다니 잘 보여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문제는 폭망 감독인 나를 어떻게 볼 지인데.. 짐작은 됐지만 어차피 답이 없으니 슬그머니 긴장이 풀렸다. 미팅 준비는 이 정도면 됐으니 혜나를 해결해야 했다.


동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찮다고 안 나온다는 걸 밥 사줄테니 나오라고 하니까 못 이기는 척 사무실 앞으로 와 주었다. 휴일이서 백반 가게들이 문을 닫아 가까운 맥도널드로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동민과의 식사는 1인당 만원 이하가 적당하다. 그 이상은 사치다.


“무겁다 무거워.”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우는 소리를 했다.


“몸이? 그러고 보니 살 좀 찐 것 같은데? 운동 좀 해.”

“몸이 아니고 왕관의 무게가 무겁다.”


동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차민오 정도 되는 배우를 만나려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라구.”

“행복한 고민 하고 있으시네. 자랑하려고 불렀냐?”

“그건 아니고.. 오늘 아니면 당분간은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알잖아? 캐스팅 끝나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거.”


동민은 배가 아픈 얼굴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맨날 폭망 감독 보다는 지망생이 낫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그 폭망 감독이 스타 배우와 미팅 예정이라니 배가 안 아픈 게 비정상일 것이다. 아마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캐스팅이 무산되길 빌고 있을 것이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잘 나가는 건 상관없는데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잘 나가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넌 어때? 혜나와는 잘 지내고?”

“그냥 그렇지 뭐. 아 맞다. 니 영화에 캐스팅 될 거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니가 시나리오도 보내줬다며?”

“그렇게 얘기해?”

“응. 엊그제 통화했거든.”


내 이럴 줄 알았다. 동민에게 이야기 했을 정도면 주변의 동료 배우들에게도 다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떠드는 건 상관없는데 이 얘기가 석 팀장 귀에 들어가면 주변 관리 못한다고 또 지랄을 할 것이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혜나에게 전화해서 경고를 줄 수도 없고 갑자기 골치가 아파왔다. 동민은 나의 골치 아파하는 표정을 보고는 혜나의 얘기가 사실이 아니란 눈치를 챈 듯 했다.


“캐스팅 된 게 아닌가보네?”

“아직이야. 주연 배우 캐스팅도 안 됐는데 조단역부터 하진 않잖아.”

“조단역 아니라던데.. 그 얘기도 사실이 아닌가보네.”

“주연으로 캐스팅 됐다고 했어?”

“흠.. 역시 뻥이었군.”

“야 니가 좀 어떻게 해 봐. 너 혜나 좋아하잖아!”

“니가 문제지. 캐스팅 됐다고 생각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너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 내가 뭘 어쨌다고? 설마 무슨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게 아니면 혜나씨가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까?”

“이런 식이면 캐스팅을 해 주고 싶어도 못하지. 감독이랑 뭔가 있으니까 캐스팅됐다고 할 거 아냐! 내가 말하기는 좀 그러니까 니가 말 좀 해 줘. 쓸데 없는 말 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일이 되려다가도 만다고!”


동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산 너머 산이었다. 이러다 나와 혜나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날 판이었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고 동민이 일어나서 햄버거를 가지러 갔다. 더 이상 뜸을 들일 시간이 없다. 동민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뮤즈 프로젝트 가동이다!


“그러지 말고 너도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게 어때?”

“놀리냐?”

“시나리오는 그만 쓰고 영화를 만들라고! 평생 시나리오만 쓰다 죽을래?”

“햄버거가 상했어? 왜 시비지?”

“단편영화 어때? 혜나씨를 주인공으로! 장편은 몰라도 단편 정도 만들 능력은 되잖아?”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왜? 우리 혜나가 뭐가 어때서? 조단역 배우는 단편영화 주연하면 안 돼? ‘꼴리는 영화’ 출연했다고 무시하냐?”

“이 새끼가 진짜.. 됐다.”


동민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 먹던 햄버거마저 내려놓고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말을 하다 말아서인지 기분이 영 찝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탑스타 미팅한다고 자랑 먼저 실컷 하고 단편영화 만들라는 얘기는 마지막에 할 껄 그랬다.


그런데.. 아니 내가 무슨 못 할 말 했나? 평소 짝사랑하는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단편영화를 만들면 님도 보고 뽕도 따고 피차 좋은 일 아닌가? 그러다 감독과 배우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혼까지 간다면 자연스럽게 내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불미스러운 과거도 영원히 없었던 일이 될 텐데..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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