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없이 웃지 말고 웃을 때 헤헤거리지 마 없어 보여

059.

by Zinn


17년째 감독 지망생 동민과 어색하게 헤어지고 나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불현듯 수아의 캐스팅 거절 멘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짜로 봉준호나 박찬욱이 하자고 해도 안 할 건가? 그럴 리가. 봉준호나 박찬욱이 하자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목숨 걸고 하겠지. 내가 폭망 감독이고 다음 작품도 보나마나 엎어질 게 뻔하다고 무시한 것이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고 사람 일 모른다는 말을 모르나? 그러니까 조단역 배우로 끝난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동민에게 혜나와 단 둘이서 양평 카페에 드라이브 다녀왔다는 말은 안 하길 잘 한 것 같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 제2의 난니맨으로 거듭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동민에게 단편영화를 만들겠다는 확답은 못들었지만 단편영화 만들라는 얘기는 던져놨으니 조만간 만들겠다고 할 것이다. 재능이 없어서 시나리오는 못 쓰고 감독님 소리는 듣고 싶은데 아무도 감독 대접을 안 해주는데 여배우와 연애는 하고 싶을 테니 자기 돈으로 만드는 단편영화 말고는 답이 없다.


사무실에선 딱히 할 일이 없었지만 바로 집에 가 봤자 머리만 아플 것 같아 남은 햄버거를 다 먹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는 집보다 사무실이 더 편했다. 잔소리 하는 사람도 눈치 볼 사람도 골치 아플 일도 없다. 나중에 대박나면 반드시 강남에 개인 사무실부터 얻는다.


오랜만에 내 영화 평 검색을 했는데 평점은 그대로였고 난니맨의 악플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난니맨의 정체를 짐작할 만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려나 구글을 뒤져봤지만 새로운 흔적은 전혀 검색되지 않았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아 짜증난다 이것도 영화라고 만들었냐.’


언제 봐도 기분 나쁜 관람평이다. 묘하게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마력이 있다. 하루 빨리 난니맨의 정체를 알아내서 이 놈의 기분 나쁜 관람평을 삭제시키고야 말겠다.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사실 악플은 이거 하나가 아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차고 넘친다. 대부분 악플이다. 수십여개의 악플들을 찬찬히 다시 읽고 있노라니 비록 지금은 한 물 가기 직전이지만 지난 몇 년간 한국 최고의 탑스타였던 차민오가 ‘꼴리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한다는 건 거의 로또 당첨급 기적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탑스타라면 ‘꼴리는 영화’로 데뷔한 최경진 감독의 차기작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출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출연은 커녕 미팅도 사절이다. 만약 시나리오가 정말 너무너무 좋아서 남 주기 아까울 정도라면 시나리오만 사거나 감독을 교체하지 절대 출연은 안 한다. 누가봐도 당연한 얘긴데 그렇다면 왜 만나자는 걸까? 설마 시나리오만 넘기고 빠지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겠는데?



***



차민오와의 미팅을 위해 민오네 소속사 사무실로 가야 하는데 내 차를 끌고 가기엔 외제차가 아니어서 부끄러웠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니 가오가 빠져서 고민이었는데 다행히 석 팀장이 집으로 데리러 와 주었다. 운전 내내 차민오의 오른 팔인 백연희 이사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강조했다. 민오를 캐스팅하려면 그 전에 백연희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민오 소속사가 위치한 빌딩은 압구정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차민오가 주인이라고 했다. 부동산 기사에서 본 것도 같았다. 200억쯤이었던 것 같다. 주차장 입구에 차를 들이밀자 관리인 아저씨가 마중 나왔고 미팅하러 왔다고 하자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로드 매니저가 헐레 벌떡 뛰어와서 발렛 파킹을 해 주었다.


잘 나가는 회사여서인지 밀리언 필름과는 인테리어의 차원이 달랐는데 엔터 관련 회사에 가면 꼭 한 두 개씩은 있는 마블 피규어는 물론이고 그 흔한 애니메이션 피규어 하나 보이지 않아 신뢰가 갔다.


어지간한 여배우 뺨치게 예쁜 데스크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벽이 유리로 되어 있는 큰 회의실에 들어가 있자 잠시 후 백연희 이사가 들어왔다. 기사에서 본 까칠하고 유능한 커리어 우먼 이미지 그대로였다. 차민오 회사에서 미팅이니 차민오도 나오거나 최소한 얼굴이라도 구경시켜 줄 알았는데 오늘은 우리끼리만 미팅이라고 했다. 어쩐지 이 건물 안 어딘가에 차민오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우리는 그 분을 알현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김이 빠졌다. 진정한 감독이라면 이럴 때 화를 내야 하나? 카리스마 있게? 최소한 언짢은 기색이라도 드러내야 하나 고민이 됐는데 아직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잠자코 있었다. 석 팀장도 가만 있는데 내가 뭐라고. 게다가 석 팀장이 잘 보이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예의 바르게 자기소개를 하려는데 백연희 이사가 먼저 명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최경진 감독님! 석 팀장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 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으셨을까?”

“아주 대단한 분이시니 잘 보여야 한다고요. 하하.”


나름 아이스 브레이킹을 한답시고 실없이 웃었는데 아무도 따라 웃지 않았다. 석 팀장은 무표정이었고 백연희 이사는 은은하고 희미하게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잘 나가는 감독이 실없이 웃었으면 다 같이 크게 웃었겠지?


“아 맞다. 음료는? 커피? 녹차?”

“괜찮아. 방금 마시고 왔어.”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석 팀장이 됐다고 잘라버리자 백 이사는 곧장 시나리오 이야기로 들어갔다. 시나리오 잘 봤다는 영혼없는 접대성 멘트조차 없었다.


“제가 좀 직설적인 성격이어서 바로 본론부터 들어갈게요. 감독님 혹시 이름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왜요?”


백 이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석 팀장은 나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눈치를 줬다. 백 이사는 한 호흡 쉬고 말을 이었다.


“감독님 데뷔작 때문이에요. 영화는 잘 만드셨겠지만 안 봐서 모르겠는데 제목이 너무.. 그래서 고민이에요. ‘가족사냥’은 시나리오는 좋지만 그런 영화를 만든 감독의 차기작에 우리 배우를 출연시키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거든요. 베스트는 아닌 거죠. 그래서 가능하다면 감독님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숨긴 채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 진행하고 싶어요. 영원한 비밀은 없다지만 개봉 전까지만이라도요.”


내가 아무리 폭망 감독이어도 그렇지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 말 안 하고 있자 백 이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게 감독님에게도 좋을 거에요. 솔직히 말씀드려서요 감독님! 민오는 내가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출연시킬 수 있지만 ‘가족사냥’의 감독이 ‘꼴리는 영화’로 데뷔한 최경진 감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투자 자체가 무산 될 수 있어요. 솔직히 저는 그 제목을 입에 담는 것조차 민망해요. 그 정도는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수많은 배우들과 스테프들에게도 민폐죠. 솔직히 그들이 무슨 죄에요. 최소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바치는 건데 감독님 때문에 피해보는 일은 없어야죠. 초면에 너무 솔직한 건 죄송요.”


구구절절 동감이고 틀린 말은 아니어서 할 말이 없었다. 석 팀장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백 이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도 솔직한 거 좋아하고요 마땅히 솔직해야죠. 솔직히 저도 제 데뷔작이 자랑스럽진 않아요. 그래서 예명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막 던져보는 건데 최진이라는 이름은 어떨까요? 외자로 강렬하게요. 암튼 이렇게 먼저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헤.”


거꾸로 솟는 피는 진정시켰으나 현기증과 함께 오바이트가 넘어오려 했다. 백 이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도 내 데뷔작이 부끄럽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자랑스럽진 않은 선에서 타협했다. 모름지기 감독은 자기 작품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건 작품을 함께 한 배우와 스테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폭망 후 10년간 험한 꼴은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험한 꼴은 처음이었다. 내가 오바이트를 억누르려 애쓰는 걸 아는 지 모르는지 백 이사는 차민오 배우의 취향을 얘기해주며 시나리오 수정 요구 사항들에 대해 짧고 굵게 읊어주었다. 일단은 내 대답과 태도는 합격인 모양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무조건 고쳐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우리 배우 취향을 말씀드린 거죠. 민오는 진짜를 중요시하거든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시나리오가 더 진짜 같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마치 실화처럼요.”

“고쳐야죠. 오늘 아침에도 시나리오를 고치다 나왔습니다. 고치면 고칠 수록 더 좋아진다는 말을 믿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더 진짜처럼 실화처럼 고쳐볼게요. 가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건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 취재는 하신 건가요?”

“무슨 취재요?”

“이런 싸이코패스 살인마를 제대로 진짜 같이 그리려면 취재를 하셔야 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맞고요. 당연히 취재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아직 싸이코패스 섭외가..”

“흠.. 일단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 미팅은 시나리오 고치신 거 보고 결정할까요? 우리가 결이 맞는지 확인도 해 볼 겸요. 긴 여행을 함께 해야 할 수도 있는데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면 좋잖아요.”


미팅은 여기까지였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백 이사는 다음 미팅이 있다며 배웅 못 나간다 했고 우리가 회의실에서 나오자 바로 다음 미팅을 기다리고 있던 팀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리는 쓸쓸히 건물에서 나와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야 현기증 난다. 시원한 커피 한 잔만 마시자. 목도 마르고..”


석 팀장은 자리에 나를 앉혀두고 커피를 주문하러 갔다. 기운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역대급으로 참신한 험한 꼴이었다. 최경진이라는 이름으로는 투자도 캐스팅도 힘들 테니 이름을 바꾸라니.. 데뷔작이 폭망으로 마무리 될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이 됐다. 내 지난 영화 인생 전부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동민이가 이겼다. 폭망 감독보다는 감독 지망생이 낫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폭망 감독 최경진은 시나리오를 잘 쓴다 해도 차기작을 만들 수 없는 불가촉 천민 신분인 것이다. 적어도 지금 세상이 원하는 건 오직 내가 쓴 시나리오 뿐이다. 아니 그럼 이름은 뭐하러 바꾸래? 이게 이름을 바꿔서 해결될 일이야? 이름을 바꾼다해도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심란한 가운데 석 팀장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울고 싶었지만 감독답게 신뢰를 줘야 하므로 여유로운 척 미소 짓고 있었는데 석 팀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언 하나 해도 될까?”

“감사하죠. 얼마든지 환영입니다요.”

“사람 만날 때 실 없이 웃지 말고 웃을 때 헤헤 거리지 마. 없어 보여.”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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