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현관에 나와 있던 유정은 짜증보다는 황당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차마 그런 유정을 맨 정신으론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만취해서 인사불성인 척 했고 창한은 그런 나를 부축해 거실 소파까지 옮겨 주었다. 그래도 유정은 생각보다 길길이 날뛰거나 지랄을 하진 않았다. 의외로 상냥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눈빛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고작 백 만원 때문에 이런다고? 납득이 되질 않는 가운데 창한은 나를 소파에 눕혀놓고 얼른 나가려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가!”
나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창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 동생 나랑 한 잔 더 해야지. 야 술상은?”
유정은 팔짱을 낀 채 가관이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서서 뭐해? 동생 왔는데 얼른 술상 차려오지 않고!”
“아 진짜 괜찮아요 감독님! 전 이만 가볼게요.”
생전 안 하던 상남자 코스프레여서인지 영 어색했고 대사가 입에 맞지도 않았다. 이해해 줘 유정아. 이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야! 내가 나중에 따로 해명할게. 유정은 내 눈빛을 읽고는 뭔가 있다는 눈치를 챘는지 순순히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아까부터 느낀건데 아주 불쾌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더 용기를 내 보았다.
“우리 딸은 자나?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난 창한을 끌고 세미의 방으로 가서 인사를 시켜주려고 했는데 방문은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방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감독님! 그러면 운전해야 되니까 물 한 모금만 마시고 갈게요.”
한사코 나가려던 창한은 나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못 이기는 척 다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창한은 물을 나는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한참을 달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가족 같은 사이가 됐으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한 번쯤은 용서해주리라는 믿음 때문인지 슬그머니 긴장이 풀렸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잠이 들었다.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유정과 세미는 부엌 식탁에서 아침 밥을 먹고 있었다. 새벽에 난동을 부린 게 미안해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려는데 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네?”
“응. 창한인?”
“갔지. 자기 뻗자마자 나갔어.”
유정은 괜찮아 보였다. 다음은 세미다. 심야에 방문을 억지로 열려던 게 미안해서 세미의 눈치를 살폈는데 의외로 평온해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험악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나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는 사실.
“그 오빠 누구야?”
“오빠?”
“어제 아빠가 데리고 온 오빠.”
“아 구 작가? 오빠라니. 아저씨지.”
“잘 생기면 오빠지. 아 누구냐니까?”
“아빠랑 같이 일하는.. 아니 예전에 같이 일했던 작가야.”
세미는 호기심이 해결됐는지 고개를 끄덕거렸고 유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작가가 잘 생겼네!”
“잘 생기긴.. 어라? 그런데 세미랑 인사했어? 자는 거 아니었어?”
“당신 잠든 다음에 나와서 잠깐 인사했어. 용돈도 주던데?”
“얼마나 줬는데?”
“십 만원. 잘 생긴 오빠가 용돈까지 줬다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제야 꼭두새벽의 행패에도 집 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던 미스터리가 풀렸다. 잘 생긴 오빠가 십 만원이나 줬는데 싫을 리가 없는 것이다. 유정도 말은 안 하지만 젊고 잘 생긴 놈이 싫진 않았을 것이다. 새삼 놀랍고 부러웠다. 똑같이 난동을 부려도 젊고 잘 생긴 남자와 늙고 못 생긴 남자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다르다. 물론 창한이 난동을 부린 건 아니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젊고 잘 생긴 남자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나저나 창한이 이 정도로 잘 생겼나? 난 모르겠던데. 약간 얍삽한 쪽 아닌가? 요즘 트렌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세미는 밥을 다 먹자마자 친구랑 약속 있다고 나갔고 유정은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했다. 오늘따라 유정의 뒤태가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젊고 잘 생긴 남자 창한에 대한 괜한 경쟁심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설거지 중인 유정의 뒤로 다가가 꼭 안아주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용서해줄 거지?”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야?”
“계약금 같은 거야. 지금 작품 진행이 잘 되고 있으니까 미리 묶어 놓으려고 한달까?”
“웬일이니? 진짜 잘 되고 있나보네?"
“응. 조만간 자기도 아는 탑스타랑 미팅 하기로 했어. 누군지 아직은 비밀.”
“하나도 안 궁금하지만 다행이다. 부디 이번엔 좀 다르면 좋겠네.”
데뷔하자마자 폭망에 이후로도 줄줄이 엎어지기만 10년이라 더 이상 기대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이러면 나중에 엎어져도 부담이 덜하다. 나는 은근슬쩍 유정의 몸을 더듬었고 유정도 의외로 싫진 않은 눈치였다. 이 기세를 타고 안방으로 끌고 가서 침대에 눕히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질 않았다. 한참을 낑낑 대자 유정이 말했다.
“알았으니까. 비켜 무거워!”
“알긴 뭘 알아! 내가 오늘은 본 때를 보여주마. 아주 그냥 혼꾸녕을..”
“아 됐다고! 쪼그만게 서지도 않으면서.. 그냥 한 걸로 쳐.”
“이상하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비켜!”
혜나랑은 잘 됐는데 유정이랑은 왜 안 되는 거지? 유정이 화장실에 간 사이 차분하게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아마도 남의 작품을 도둑질 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자수해서 광명 찾으면 다시 잘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유정이랑 잘 해 보겠다고 자수했다간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문제는 차기작을 찍고 생각하자. 감독으로 컴백하고 대박 나면 자연스럽게 해결 될 것이다. 그나저나 유정인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설마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상상도 하기 싫지만 막상 유정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투샷이 떠오르자 기분이 묘했다. 은근히 자극돼서 다시 한 번 도전하려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유정이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세미 오디션 본대.”
“오디션? 무슨 오디션?”
“무슨 지자체에서 지원 받은 독립영화라고 하던데?”
세미의 오디션 얘기가 나오자 욕구가 확 사그라 들었다.
“아우 진짜! 안 된다니까!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을 반복 시키는 거야! 안 된다고! 아니 자기는 지금 세미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빠가 영화 감독인데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잖아!”
“안 되는 거 뻔히 아니까 그렇지! 그 얼굴로는 안 된다고!! 동네에서 제일 예쁜 애도 연예계 오면 평범한 일반인이야. 예쁜 걸로 날고 기어도 될까 말까라고! 세미가 우리 눈에나 예쁘지 남들한테도 그런 줄 알아? 솔직히 못 생겼다는 소리만 안 들어도 다행인 수준이라고!”
여배우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야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영화에 출연한 혜나와 수아만 봐도 알 수 있다. 내 딸이 그녀들과 비슷한 인생을 사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아빠 미워!”
유정에게 쏴대고 있는데 뒤에서 세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들은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한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못 생겼단 얘기를 들었으니 가뜩이나 예민한 사춘기인데 큰 상처가 됐을 것이다.
“세미야. 잠깐 아빠 말 좀 들어봐.”
세미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뛰쳐 나가버렸다. 오랜만에 아빠에게 먼저 말 걸어 줘서 행복했는데 한동안은 말을 걸어주긴 커녕 말을 섞을 일도 없을 것이고 다시 대화가 가능해지려면 몇 년이나 걸릴 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지난 번엔 처음이니까 미안하다는 말로 대충 넘어갔는데 두 번은 안 될 것이다. 갑자기 숙취에 두통이 밀려와서 침대에 드러누워 끙끙 앓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혜나였다. 유정이 볼 새라 얼른 폰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에요 감독님.”
“응. 그래.”
“집이세요?”
“응.”
“혼자?”
“아니.”
“아 그러시구나. 어쩌실 거에요? 수아 만나러 가셔야죠.”
“그래 고마워. 주소 찍어줘.”
“주소는 무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저랑 같이 가요.”
“나야 고마운데 안 바빠?”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사이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서운하죠.”
행여나 밖에 있는 유정에게 혜나의 목소리가 들릴까봐 통화 볼륨을 최대한 줄였다.
“그나저나 축하드려요.”
“뭐라고?”
“축하드린다고요!”
“뭘 축하해?”
“탑스타님과 미팅한다는 얘기가 들려오더라고요?”
“진짜? 누구한테 들었어?”
“글세요. 어디선가 들려왔네요.”
“신기하네. 알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텐데.”
“이 바닥 좁잖아요. 아시면서. 감독님 주소 보내주세요. 지금 바로 모시러 갈게요.”
“알았어. 바로 보내줄게.”
“전화하면 나오세요.”
“전화하지 마. 톡 해.”
혜나에게 집 주소를 알려줘도 괜찮을까 잠깐 걱정이 됐지만 데려다 준다니 거절하기 힘들었다. 잠시 후 혜나의 도착 톡을 받고 나가보니 아파트 주차장에 못 보던 대형 SUV가 세워져 있었다. 플래그십이라 가격이 1억이 넘는 고급 외제차였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혜나가 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니 무명 여배우가 어디서 돈이 나서 이런 차를 모는 거지? 잘 사는 집 딸이었나?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고급진 향기가 풍겨왔고 나를 모시는 혜나의 태도는 극진 그 자체였다. 간만에 받는 제대로 된 감독 대접이었다. 탑스타와 캐스팅 관련 미팅을 한다니 이번 작품은 메이드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혜나가 수아를 만나게 해 주고 함께 가 주는 것까진 고마웠지만 캐스팅은 다른 얘기였다. 고작 수아 만나는 거 도와줬다고 캐스팅까지 시켜주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혜나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잘조잘 하소연 타임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 매니저를 새로 소개 받았고 이번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좀 겪어보니 사기꾼이었다며 기분 다운돼서 폭음 폭주하느라 피부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들어보나마나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여서 화제도 돌릴 겸 한창 바쁘고 신경 쓸 일도 많은 시기에 이렇게까지 해 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그렇게 고마우시면 시나리오 얘기도 해야 하니까 술이나 한 잔 사라고 했다. 어쩐지 곱게 술만 마시고 끝날 분위기는 아니어서 벌써부터 부담스러워졌다.
하루 빨리 혜나와 동민의 만남을 주선해야겠다. 그냥 만나라고 하면 안 만날 테니 동민에게 단편영화라도 만들라고 부추겨서 혜나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는 것이다. 동민이의 뮤즈가 되면 나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뮤즈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