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꼴리는 영화? 뭐가 꼴린다는 거야? 꼴리는 뭐 어떻게 되는데? 비포 앤 애프터가 달라지는 게 있나?”
석 팀장의 눈은 풀려 있었고 혀까지 꼬이기 시작했다. 서연 앞에서 더 이상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석 팀장의 말을 끊었다.
“하하하! 믿음을 주지 못했다니 내가 잘못했네. 앞으로 진짜 잘 할게. 믿음을 줘야지!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갑자기 잠이 쏟아져서. 둘 다 내일 출근해야 되지 않아? 석 팀장도 빨리 집에 가야지?”
“집은 무슨 집. 꼴리면 어떻게 되냐니까?”
“자~ 집에 갑시다!”
“안 돼. 2차 가. 할 이야기 있어.”
2차는 무슨.. 빨리 석 팀장을 보내버리고 서연과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2차를 못 가더라도 이 야심한 밤에 서연과 둘 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운이 좋으면 서연과 오붓하게 한 잔 더 할 수도 있다. 서연의 눈빛을 보니 내 마음과 같은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석 팀장이 2차를 외치며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마칠 동안 나는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석 팀장은 그 잠깐을 못 참고 서연을 먼저 집으로 보내버렸다. 나도 모르게 서연이 아니라 니가 갔어야지! 라는 말이 튀어 나올 뻔 했다. 막말을 퍼붓고 주사를 부리는 석 팀장과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석 팀장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흥이 나질 않고 기분도 다운되기 때문이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나 그런 얘기는 내일 사무실에서 하면 된다. 예의상 택시 타는 건 보고 가야겠지만 계속 집에 안 가겠다고 버티면 나 먼저 가버려야지. 잘 들어가든 뭐든 알게 뭐람. 나도 여기까지다. 둘만 있다간 대판 싸우게 될 게 뻔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아까 보니까 서연도 나랑 한 잔 더 하고 싶은 분위기였는데 ㅠㅠ 석 팀장은 2차로는 자기가 아는 바가 있다며 근처의 위스키 바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의외였다. 나랑 둘이서 술 마시는데 굳이 이런 가게에 올 필요가 있나? 설마..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에이 아니겠지..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석 팀장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카톡이 왔다. 서연이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감독님!’
‘나도. 아쉽네. 양 피디랑 한 잔 더 하고 싶었는데.’
‘저도요 ㅠㅠ 팀장님 미워!’
‘나도..’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고요 저는 내일 뵐게요 감독님..'
서연의 말 줄임표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여자인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낼 순 없으니까 남자인 내가 용기를 내라는 시그널 같았다. 그래! 나이는 숫자일 뿐 세상은 어차피 남자와 여자다. 차분히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타이핑을 했다.
‘다음엔 둘이서 한 잔 하자구!’
라고 큰 용기를 내서 톡을 보냈건만 곧장 “좋아요!”라고 답이 오질 않았다. 10여년 째 경력 단절 중인데다 중학교 다니는 애까지 딸린 중년의 유부남 감독이 20대 미혼 여성에게 단 둘이서 술 마시자고 하면 실례이기라도 한 건가? 난 순수한 마음으로 술자리를 제안한 건데 감히 자기를 어떻게 해 보려는 걸로 알고 모욕감을 느낀 건 아니겠지?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고 차라리 속 시원하게 거절 톡이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톡 옆의 1만 없어지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톡을 보내고 아직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다.
‘농담이야ㅋ’
라고 보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화장실에 갔던 석 팀장이 돌아와 얼른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 서연과 톡을 주고 받는 걸 들켰다간 분위기가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다. 질투를 못 이겨 내일 서연에게 히스테리를 부릴 수도 있다. 아까 배역별 캐스팅 후보 리스트 건으로 본의 아니게 조재웅 피디에게 폐를 끼쳤는데 서연에게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석 팀장은 술에 취했는지 취한 척을 하는 건지 내 옆에 앉아 흐느적거리며 나에게 기대왔다. 화장실에서 향수를 뿌렸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 나던 냄새가 났다. 진짜로 나를 어떻게 해 보려는 거야?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며 끈적하게 흘러갔지만 상대가 석 팀장이다보니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유정씨랑은 잘 지내고?”
“그냥 그렇지 뭐.”
“세미는? 아직 초등학생인가?”
“아이고 중2시다. 아주 그냥 질풍노도 그 자체지.”
“그렇구나. 많이 컸겠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겠네 이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길거리에서 만나도 아는 척 하면 안 돼.”
“왜?”
“나랑은 말 섞는 것도 싫어해. 징그러워하는 것도 같고. 딸들이 원래 그런다며?”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 너도 참 고생이다. 감독하랴 애 키우랴.”
“넌 잘 지내고? 우리 이런 이야기 오랜만이네?”
한 때 잠시나마 석 팀장과 발가벗고 한 침대에 누워 미래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십 몇 년 전이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요즘 성생활은 어떠니? 섹스는 자주 하고?”
얘가 미쳤나? 모처럼 추억 팔이에 분위기가 훈훈해지려는데 찬물을 확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감독 복귀를 앞둔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감사하다고 넙죽 받아 먹으려 했다간 너는 감독 자격이 없다고 꾸중만 들을 게 뻔한데 괜히 약만 올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연을 술자리에 부른 것에 대한 응징일 것이다.
“참 한국은 불공평하단 말야. 남자가 여자한테 이런 거 물어보면 죽일 놈이고 여자가 남자한테 이러는 건 쿨한 거고?”
“찐따처럼 왜 그래? 그럼 너도 물어보든가.”
“물어봤다가 또 무슨 난리를 치려고? 감독하겠다는 놈이 자기 관리를 못하네 어쩌네..”
“쫄보 새끼. 나 못 믿어? 물어봐. 물어보라고.”
“싫어. 내가 널 모르냐? 나중에 무슨 말 나올지 뻔하다.”
“그럼 그냥 얘기해주지. 난 성생활이 없어. 안 해. 남편과도 섹스리스였고. 안 한 지 백 년 넘었음.”
백 년 동안 안 했다는 사실보다는 석 팀장과 섹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나를 유혹하는 걸로 밖에 해석이 안 됐기 때문이다. 훤한 대낮에 얼굴을 보면 기분이 다운되는데 어두컴컴한 데서 봐서 그런지 싱숭생숭해졌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같은 배를 탄 사이니 안 될 건 없겠다만 지금은 아니다. 서연이 걸렸다. 석 팀장과 행여나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게 알려졌다간 서연이 나를 더럽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다. 아무리 같은 배를 탔다지만 사람 속은 모른다고 조만간 차기작을 찍을 감독으로서 약점을 잡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야. 원래 우리 나이쯤 되면 다 그렇게 살아.”
“과연 그럴까?”
그토록 도도하고 냉철한 석 팀장이 이렇게 끈적하게 구는 건 분명 속셈이 있을 거란 생각에 술기운이 달아났다.
“그건 그렇고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양 피디도 먼저 집에 보낸 거잖아?”
“아 그랬지.”
석 팀장은 내가 자신의 도발에 순순히 넘어오지 않자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나 밀리언 그만 두면 어떡할 거야?”
“왜 강 대표 때문에? 그러지 말고 대표님에게 잘 해. 우리 나이에 어디서 월급 받는 게 쉽니?”
“그만 두면 어떡할 거냐니까?”
“잘 할게. 내가 잘 할테니까 그 얘기는 회사 그만두고 나서 하자.”
그만 둔다는 말을 한 두 번 한 것도 아니고 또 이러다 말겠지 싶어서 잘리거나 회사가 망하기 전까진 열심히 다니라고 잘 타일렀다.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석 팀장과 모텔에 갈 것도 아니고 그저 빨리 집에 가고 발 닦고 잠이나 쳐 자고 싶을 뿐이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줄 듯 말 듯도 한 두 번이지.
“그만둔다는 게 빈 말 같구나? 통장 확인해 봤어?”
통장을 확인? 혹시나 해서 스마트폰으로 은행 어플을 열어 확인해보니 무려 천 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입금 시간을 보니 방금 전 석 팀장이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미쳤어? 아니 왜? 이게 무슨 돈이야?”
“우리 최경진 감독님 다음 작품 계약금. 너랑 나랑 계약금.”
“아직 계약서 구경도 못했는데?”
“감독님! 우리 사이에 그깟 종이 쪼가리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돈은 어디서 나서?”
“나 무시해? 그 정도는 있거든? 그러니까 감독님 다음 작품은 무조건 나랑 하는 거에요!”
“아.. 알았어. 해야지. 당연히 하는 거지. 감사합니다 대표님!”
백 만원도 아니고 천 만원이라는 액수에 놀라 절로 대표님 소리가 나왔다. 입만 산 줄 알았던 석 팀장에게 이런 과감한 면이 있었다니 조금은 놀랐고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이었다. 하지만 석 팀장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니 그렇게 무모한 베팅은 아니었다.
만약 앞으로 ‘가족사냥’이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극장 개봉 후 흥행에도 성공한다면 지금이 최경진 감독에게 베팅 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당장 탑스타 민오와의 미팅이 캐스팅까지만 이어져도 내 몸 값은 지금보다 최소 서너 배는 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석 팀장 같은 초보 제작자는 계약금을 싸들고 와도 나 같은 기성 감독을 잡기는 어려워진다. 특히나 천 만원으로는 택도 없지. 순간 자존감이 올라가는 동시에 아랫도리에도 불끈 힘이 들어갔다.
“할 말 다 했으니까 그럼 먼저 일어날게. 피곤할 테니까 빨리 들어가 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려는 석 팀장의 손을 덥썩 잡아 버렸다. 이대로 혼자 보내는 건 감독 이전에 남자로서의 매너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같이 있을까?”
하지만 석 팀장은 예상 외로 내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돌변했다.
“미쳤어? 유부남 주제에.. 확 신고해버릴까보다. 이혼한 여자라고 만만하다 이거지?”
마그네슘 부족인지 분노 때문인지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석 팀장을 보자 불끈 솟아 올랐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잦아 들었다. 졸지에 말 문이 막혀버렸고 석 팀장은 그렇게 내 손을 뿌리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천 만원은 고마운데 이럴 거면 왜 서연이를 먼저 보낸 거야! 지가 먼저 갈 것이지.. 입금은 내일 사무실에서도 해도 되잖아!
석 팀장은 떠났지만 석 팀장이 지른 내 가슴 속의 불길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문득 서연에게서 아직 답톡을 받지 못했던 게 떠올라 얼른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니 “좋아요!” 라고만 답이 와 있었다. 혹시 지금 한 잔 하자고 하면 집에서 다시 나오려나? 아니다. 서연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거절 당했다간 사무실에서 계속 봐야 하는 사이인데 엄청 민망하고 껄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혜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