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가만히 듣고 있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마빡에 딱밤 한 대 날려도 되나? 무작정 날릴 순 없으니 가위 바위 보 해서 진 사람이 딱밤 맞기 게임 하자고 해 볼까? 더도 말고 딱 한 대만 영혼이 담긴 딱밤을 날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없어 보였어?”
“응. 없어 보이는 동시에 싸 보였어. 특히 실없는 아재 개그는 극혐.”
조언이 아니라 가스라이팅이었다. 내가 자기 패싱하고 백연희 이사랑 친해지는 걸 사전에 차단하려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독이고 배우 미팅을 앞두고 기를 살려줘도 모자랄 판에 왜 기를 죽이려 드는지 모르겠지만 천 만원이나 쏴줬으니 잠자코 있었다.
그래 천 만원 받았으니 이 정도 갑질은 당해줘야지. 짓밟힌 자존감은 다른 곳에서 회복하자. 마음 같아선 천 만원 돌려주고 할 말 다 하고 싶었지만 차민오 캐스팅 전까진 참아야 한다.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석 팀장은 나에게 천 만원을 쏜 걸 후회하는 눈치 같기도 했다.
“시나리오 수정은 가능하겠어?”
“해 봐야지.”
“취재는? 싸이코패스 살인마는 어떻게 취재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난 좀 이따가 연희랑 같이 점심 먹기로 했거든. 먼저 사무실에 가 있을래?”
“알아서 가 있을게. 사무실이든 어디든.
“네가 이해해. 백 이사가 아주 못된 애는 아닌데 말을 좀 직설적으로 하는 스타일이거든.”
“아니야. 차라리 그 편이 나아. 나도 내 영화가 자랑스럽진 않거든. 어쨌든 내가 과거를 숨기고 이름을 바꾸면 출연해준다는 거잖아? 그럼 바꿔야지. 최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니다. 이왕 바꿀거 영어로 바꿀까? 초이진 어때? 사람 일 모른다고 헐리웃 진출까지 대비해서.. 헤헤.”
실없이 웃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던 게 떠올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석 팀장은 무표정으로 인사도 없이 카페에서 나가버렸다. 그나저나 둘이서만 점심을 먹기로 했다니 벌써부터 귀가 간지러웠다. 아마 둘이서 내 얼평부터 시작해서 별 소리를 다 할 것이다.
도저히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다들 미팅 결과를 궁금해 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험한 꼴을 겪으며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회의가 들던 중 카톡 도착음이 울렸다. 혹시나 백 이사랑 셋이서 같이 밥 먹자는 석 팀장의 카톡인가 싶어 잠깐 설렜는데 뜬금없는 윤보영 감독 누나의 카톡이었다.
윤보영 감독 누나의 장편 독립영화 시사회 정보 링크였다. 상영 시간은 오늘 저녁. 내가 아무리 폭망 감독이어도 그렇지 당일 초대는 예의가 아니지 않나? 부를 관객이 어지간히 없었던 모양이고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아니지. 이렇게라도 생각해준 걸 고마워해야지. 내가 무슨 대단한 감독도 아니고.
‘너무 늦게 보내서 미안. 요즘 내가 정신이 없다.’
윤보영 감독 누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바로 양해를 구하는 톡을 보내왔다. 지난 번 심 대표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 들은 얘기론 조촐하게 개봉을 준비 중이라고 했지만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은 번듯한 멀티플렉스였다. 배급사를 잘 만난 듯 했다. 평상시 같으면 시사회를 하든 말든 관심조차 없겠지만 문득 양서연 피디가 윤보영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당장 서연에게 윤 감독의 독립 장편영화 시사회 링크를 카톡으로 전달했다.
‘관심 있어?’
안 그래도 자존감이 바닥인데 서연에게 읽씹까지 당하면 어떡하나 두근두근 조마조마 했는데 5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답이 왔다.
‘우와!!! 감사해요 감독님! 저 이거 보고 싶어요. 데려가 주실 거죠?’
***
윤 감독의 작품을 독립장편 영화라고 무시했지만 번듯한 극장에서 시사회를 하는 걸 보니 배가 아프면서도 부러웠다. 데뷔작은 처절하게 폭망하고 차기작은 만들어보지도 못한 채 10년이 지났고 드디어 기회가 올 것도 같은데 3시간 미팅 대기부터 시작해 개명 요구 등등 온갖 험한 꼴은 다 겪고 있는 나와는 달리 윤 감독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나도 독립영화나 할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노선을 변경한다면? 아니다. 비록 폭망은 했지만 나는 엄연히 상업 영화 감독이다. 처음부터 독립영화를 했으면 몰라도 상업영화로 데뷔하고 차기작으로 독립영화를 만들면 누가 봐도 상업 영화계에서 퇴출 당해서 그런 줄 알 것이다.
솔직히 이런 독립영화 시사회에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오늘이야 서연에게 점수를 따려고 왔지만 독립영화든 뭐든 시사회 자체를 안 간 지 오래다. 예전에야 비즈니스를 한답시고 온갖 시사회랑 뒤풀이를 꼬박꼬박 참석했지만 이젠 아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잘 쓰고 영화만 잘 만들면 다 해결된다. 백날 시사회랑 뒷풀이 돌아다녀봤자 아무 소용없다.
더 큰 이유는 행여나 어정쩡하게 끝난 시절 인연과 재회할까봐서다. 이 바닥에서 구른 지 얼추 20년이 넘어가다 보니 우연히 마주치면 불편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설상가상 다음 작품 준비는 잘 돼나갸는 질문을 수십 번 받아야 한다. 다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오랜만에 만나면 꼭 그것부터 물어본다.
빚진 건 아닌데 빚진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인물도 꼭 한 두 명 씩은 만난다. 계약금 받고 캐스팅이 안 돼 무산된 작품이 몇 편 있는데 캐스팅이 안 된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제작자야? 시나리오 썼으면 됐지 배우까지 데려오게?
그럴 거면 내가 제작사 차려서 투자 캐스팅 다 하고 말지. 사실 그럴 때가 되긴 했다. 진짜 제작자나 해볼까? 밀리언 필름의 강 대표 같은 듣보잡도 제작을 하겠다고 나대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있나?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에 일찌감치 도착했지만 행여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양서연 피디가 검정 가죽 자켓과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평소답지 않은 옷차림이라 살짝 설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 화장도 평소와는 달랐고 사뭇 긴장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오늘따라 뭔가 강렬한 캐릭터로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하! 감독님 모드구나. 서연은 나를 보자마자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우와 못 보던 옷이네? 이렇게 밖에서 보니까 멋있다 양 감독!”
“헤헤. 별 말씀을요 고마워요. 감독님.”
저예산 독립영화 시사회여서인지 다행히 잘 나가는 영화인은 안 보였다. 어정쩡하게 아는 사람도 안 보였다. 하지만 서연이 화장실에 간 사이 남자 화장실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야 말았다. 이름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오다가다 만난 매니저인데 ‘꼴리는 영화’에 자기네 회사 소속 여배우를 꽂으려다 실패한 인연이 있다.
당시 나에게 술도 사고 나름 로비를 했지만 캐스팅이 무산되어 감정이 안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안면이 있고 눈도 마주쳐서 살짝 목례를 했는데 날 멀뚱히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휙 하고 가 버렸다. 폭망 감독이니 쌩 까도 된 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분 탓인지 주변에서 킥킥 거리는 것 같고 어이가 없고 무안해서 얼굴이 벌게지려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서연이 나왔다.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서연을 티켓 나눠주는 데스크 근처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 중이던 윤 감독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 때 말했던 우리 회사 피디에요. 누나 팬!”
서연은 감독님 존경해요 롤모델이에요 어쩌구 저쩌구 호감을 표했지만 윤 감독은 별 반응이 없었다. 고맙다는 미소로 화답해 줄 법도 한데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감독은 원래 이래야 되는 건가? 저러니까 뭔가 더 있어 보이고 감독답게 느껴지긴 했다.
서연이 무안해할까봐 걱정됐지만 딱히 무안해하는 눈치는 아니었고 오히려 윤보영 감독을 소개해 준 덕분에 나에 대한 존경심이 회복된 듯 했다. 비록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매니저에게 험한 꼴을 겪었지만 여기까지 온 보람이 차고도 넘쳤다.
윤 감독의 영화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주인공은 평생을 차별과 불공정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끝이 난다. 그래도 윤 감독이 힘들게 만든 영화니까 크레딧 올라가는 거랑 무대 인사까지 다 보고 극장에서 나왔다. 정확한 손익분기점은 모르겠지만 이런 걸 수십만명의 관객들이 돈 주고 보러 오는 광경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역시 나는 독립영화 쪽이랑은 맞지 않는다.
**
밤 공기가 상쾌했다.
서연은 윤 감독의 이번 작품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했다. 어릴 땐 이런 영화를 좋아했는데 나이 먹고 취향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이런 영화를 좋아 한다면 상업영화 판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마음 같아선 맥주라도 가볍게 한 잔 하고 싶었지만 부담스러워할까봐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 하니까 “바로 집에 가시게요?”라고 했다.
귀가 의심스러웠다. 놀랍게도 헤어지기 싫은 눈치였다. 서연은 20대 미혼이고 나는 40대 유부남이란 자격지심에 차마 맥주 한 잔 하자는 말을 못한 건데 역시나 우린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맥주 딱 한 잔만 어때요?”
“그럴까?”
우리는 곧장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윤 감독의 영화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감상과 함께 향후 본격적으로 진행 될 양서연 감독의 데뷔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연은 시나리오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이니 곧 모니터를 부탁하겠다고 했다. 어쩐지 내가 제작자가 된 기분이었는데 나쁘진 않았다.
맥주는 정말로 딱 한 잔 씩만 마셨다. 헤어질 때도 지하철역 앞에서 쿨하게 돌아섰다가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마침 계단을 내려가던 서연도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눈이 딱 마주쳤다. 수줍은 듯 베시시 웃는 서연에게 미련이 남았는지 딱 한 잔만 더 하자고 붙잡을까 고민도 했지만 이 타이밍에서 그랬다간 감독답게 보이지 않을까봐 애써 억눌렀다.
서연의 뒤태가 눈 앞에 아른거려 이대로는 도저히 집에 갈 수는 없었다. 혜나를 불렀다간 큰 일 날 것 같고 동민은 지겹고 역시나 만만한 건 창한이었다. 마침 창한에겐 할 말도 있었다. 전화를 걸자 언제나처럼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네 감독님!”
“시간 괜찮으면 잠깐 작품 얘기 좀 할까?”
창한은 여느 때처럼 불러내자마자 곧장 차를 끌고 튀어 나왔다.
“밤 공기가 상쾌하네. 오늘은 드라이브나 하자!”
“좋죠!”
“그럼 운전하면서 들어. 내가 다시 읽어보니 아쉬운 게 있어서..”
“네 말씀만 주십쇼. 감독님.”
“그러니까 음.. 이거 혹시 더 진짜 같을 순 없을까?”
“진짜 같이요?”
“응. 마치 실화처럼. 취재는 하고 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