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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니맨은 놈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수아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이렇게까지 주도면밀하게 사이버 테러를 저지를 만한 주변 인물은 수아 말고는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수아라면 용서 가능이다. 그래.. 수아 너는 충분히 나에게 앙심을 품을 자격이 있어.
일단 수아를 만나보자. 난니맨이 수아인지 아닌지는 만나보면 감이 올 것이다. 내 감언이설에 속아서 베드씬을 찍는 바람에 인생을 망쳤다고 원망하고 있을 테니 만나면 진심어린 사과부터 하자. 문제는 내가 수아에게 잘못한 게 베드씬 권유 하나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한 게 그거 하나면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진 않을 것이다.
진짜 잘못한 게 있다면 쫑파티가 끝나갈 무렵 다음 작품도 함께 하자는 덕담 대신 내일 아침까지 둘이서 같이 있고 싶다고 추파를 던진 것이다. 길에서 마주쳤으면 눈길도 안줬을 동네 아저씨가 감독이랍시고 자기를 욕심 냈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내가 잠깐 미쳤던 것 같다.
사람들이 감독이라고 불러주고 수아같은 일반인 중에선 탑티어 급 미녀가 자꾸 말을 걸어주고 실 없는 농담에도 웃어주고 헛소리도 진지하게 들어주니까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줄 알고 주제파악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건 내가 미쳤거나 메타 인지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감독님 소리를 오래 듣다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조금씩은 맛이 가는 경향이 있다.
사실 내가 수아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건 따로 있다. 베드씬 권유는 나 혼자만 좋자고 한 게 아니라 흥행을 위해서였고 추파는 실수였고 영화가 폭망한 건 내 잘못은 아니다.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 건 베드씬의 음모 노출 컷이다.
‘꼴리는 영화’는 아직 죽지 않았다. 개봉 후 10년이 지나고 있는 오늘 날까지도 온라인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한국영화 베드씬 엑기스 모음’ 등의 동영상 파일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한국영화 베드씬 엑기스 모음’은 라인업에 따라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는데 ‘꼴리는 영화’의 베드씬은 어지간하면 포함되어 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나름 베드씬 모음 계의 헤드라이너인 것이다.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과 여배우의 몸을 사리지 않은 연기 때문이겠지만 아마도 잠깐 스쳐지나간 음모 노출 컷 때문일 확률이 크다.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그게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편집 때 음모 노출 컷을 실수로 포함시킬 순 없는 법이다. 삭제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영화가 소리 소문 없이 묻히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화제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에 나름 노이즈 마케팅을 한 것이다.
수아는 ‘한국영화 베드씬 엑기스 모음’을 보진 않았어도 존재를 알고는 있을 것이다. 얼마나 짜증스러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노이즈 마케팅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수아가 본인의 음모 노출 컷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있다면 익명의 사이버 테러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청부 살인을 저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히 편집 기사인 주미 누나는 입이 무거운 스타일이다. 자기는 음모 노출 컷을 삭제하려고 했는데 감독이 말렸다고 고자질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확히는 내가 말린 게 아니라 음모 노출 컷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제작사 대표가 말린 것이고 나는 공범일 뿐이다. 조금 억울하다.
결과적으로 노이즈 마케팅은 성공했다. 수아의 음모 노출 컷 덕분에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잠깐이지만 입소문이 났고 영화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됐으며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한국영화 베드씬 엑기스 모음’이라는 파일명으로 검색하면 다운로드와 감상이 가능하다.
문제는 입소문은 났지만 음모 노출 컷 하나 보겠다고 영화까지 찾아보진 않았는지 흥행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흥행은 커녕 네이버 영화 관람평 숫자를 보면 본편 감상까지 유입되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베드씬 하나만 딸랑 ‘한국영화 음모 노출’ 또는 ‘한국영화 베드신 모음’ 등의 파일에 포함되어 온라인 세계를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내가 수아라면 감독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버 테러는 아니지. 어떻게든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차기작을 만들게 되면 오디션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아니까 용서 가능이다. 만약 수아가 난니맨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폭로하지만 않는다면 오디션 기회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캐스팅을 시켜줄 것이다. 조연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폭로 당해도 별 타격은 없을 것이다. 10년째 놀고 있으니 이미 매장된 셈이나 다름 없고 사실상 거의 잊혀진 신세니 잃을 게 없는 것이다. 하나도 안 아플 것이다. 하지만 한 물 가기 직전이긴 하지만 엄연히 탑스타인 민오가 캐스팅 되고 나서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폭로 당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많이 아플 것이다.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차기작 개봉 직전에 협박을 당한다면? 더 아플 것이다.
‘꼴리는 영화’의 폭망 이후 10년째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사이버 테러를 시작한 건 내가 바닥에서 빌빌대고 있을 때 괴롭히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잘 나갈 때 괴롭혀야 더 고통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호락호락 당할 순 없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대로 무너질 순 없지.
그나저나 연락이 닿는다쳐도 수아를 어떻게 달래지? 오디션 기회를 준다 해도 주연 급은 아닐 테니 딱히 고마워할 것 같지 않다. 폭망 감독의 차기작이 그렇게 매력적인 거래 조건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온라인에 널리고 깔린 '한국영화 베드씬 엑기스 모음’ 동영상 파일 속의 음모 노출 컷들을 다 없애줄 순 없잖아? 일단 만나서 대화로 풀어보고 대화로 풀어질 분위기가 아니면 그냥 한 번만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싹싹 빌어보자.
창한에게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헤어진 후 곧장 수아의 연락처를 알만한 사람을 찾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꼴리는 영화’의 편집 기사였던 주미 누나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주미 누나와 수아는 학교에서 본 적은 없지만 같은 학교 연영과 선후배 사이라고 했다. 수아는 원래 연기 전공이 아니었고 연출 전공이었는데 단편 영화 촬영 도중 배우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대타로 연기를 시작했다가 매력을 느껴 연기로 전공을 돌렸다고 들었다.
“잘 모르겠는데?”
주미 누나는 수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했다. 수아와는 10년 전 내 영화 편집 도중 수아가 편집실에 놀러왔을 때 한 번 본 게 다고 그 이후로는 통화는 커녕 전화 번호 조차 없다고 했다. 뻥 같지는 않았다. 내가 맨 처음 수아에 대해 물었을 때 수아가 누구? 냐며 기억도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한참을 설명하니까 그제야 아~ 하더니 모른다고 했고 마지막 대사는 내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였다. 몇 년만의 통화였지만 통화 시간이 1분이 되지 않았다. 근황조차 묻지 않았다. 그래.. 폭망 감독이라고 무시한다 이거지? 주미 누나는 안타깝지만 내 차기작 ‘가족사냥’ 편집 기사 후보에서 탈락이다.
주미 누나에서 막혀버리니 더 이상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동민에게 도움을 청했다. 잠깐 통화를 해 보니 동민은 수아에 대해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아가 내 영화 출연 이후 임 감독의 작품에 출연할 뻔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임 감독님이 내 영화 현장에 놀러 왔다가 수아와 잠깐 커피를 마시러 갔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동민에게도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수아의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나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기 직전 혜나라면 수아의 근황에 대해 알 지도 모른다고 알려줬다. ‘꼴리는 영화’ 촬영하면서 친해져 이후에도 둘이 종종 만났고 가끔 프로필 투어도 함께 다녔다고 했다. 아 맞다! 그랬던 것 같다. 촬영 막판에 혜나와 수아가 친해 보였던 게 생각났다. 하지만 하필이면 혜나와 친하다니.. 다시 한 번 혜나에게 연락하는 수 밖에 없다.
“무슨 일이시죠?”
“수아 알아봐준다고 했잖아? 어떻게 돼가는지 궁금해서..”
“아 수아요?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왜 아무도 모를까?”
“그야 저도 모르죠. 개명하고 잠수했다는 말도 있고.. 아닌가? 자살인가?”
자살이라니.. 순간 눈 앞이 깜깜해지며 현기증이 났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감독님! 들리세요?”
이제야 내 영화 인생이 폭망과 꼬임의 연속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수아의 저주였던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야 무릎을 꿇든 주연 급으로 캐스팅을 시켜주든 뭐든 해서 용서를 빌 수 있을 텐데 자살했다면 답이 없다. 저주를 풀어야 되는데 용한 무당을 써서 굿을 하면 되려나? 한 물 가기 직전이지만 엄연히 탑스타인 민오가 내 작품을 읽어준다는 건 우주의 기운이 모이고 있다는 뜻인데 수아가 날 저주하고 있다면 우주의 기운이 모이다가 말 것이다. 정말 수아가 자살했다면 민오가 내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 최소한 무덤에라도 찾아가 사죄를 해야한다.
“어 들려. 확실해? 자살?”
“그랬다는 말이 있다니까요. 저도 확실친 않죠.”
“미안한데 수아 근황에 대해 확실히 알아봐 주면 안 될까? 부탁할게.”
“내가 왜 그래야 되는 데요?”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나 혼자 잘 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고..”
혜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잠깐 텀을 둔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뭔데?”
“감독님 시나리오 읽어보고 싶어요.”
“내 시나리오를? 왜?”
“왜?? 지금 왜라고 하셨어요? 나 같은 듣보잡 배우는 감독님 시나리오를 읽을 자격조차 없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야. 듣보잡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혜나가 자격은 차고 넘치지. 읽어주면 영광이고! 알았어. 내가 지금 당장 보내줄게!”
혜나는 시나리오를 그냥 읽어보고 싶은 게 아니라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배역을 고를 기세였다. 혜나라는 배우의 급을 봐선 주조연 급 이상을 욕심냈다간 김치국이 될 확률이 크지만 일단 시나리오를 보내주었다. 캐스팅을 시켜주겠다고 거짓말을 하긴 싫은데.. 에라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수아가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