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것

044.

by Zinn


아.. 내 영화 인생을 롤모델로 한 장편 시나리오라니..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했길래 그딴 걸 아이템이라고 던진 건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만한가? 만에 하나 장르가 블랙 코미디라면 흑역사가 아니라 회복할 길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잠깐이나마 아이템 회의를 빙자해 양서연 피디와 비밀 친구를 맺을 욕심을 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시나리오도 못 쓰는 주제에 머리에 피가 마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어린 애를 감독 데뷔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여러모로 좋지 않다. 양서연 피디의 마음은 내 마음과는 다른 것 같고 구창한 작가가 각색안을 잘 써주리란 보장도 없다. 각색 작가를 붙이는 건 영 내키질 않고 그렇다고 나의 각색안을 고집하다간 십중팔구 나가리다.


그나저나 아까 석 팀장은 왜 내 손을 살포시 잡은 거지? 혹시 그린라이트? 만약 그린라이트가 맞다면 계속 모른 척 하는 건 석 팀장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런 걸 고민하고 있을 때는 아니어서 잠시 후 화장실에서 돌아온 석 팀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이혼하고 지내기는 좀 어때? 여자 혼자 사니까 적적하지?”

“적적한 건 모르겠고 불쾌한데? 그런 질문 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우스워?”

“니가 먼저 내 손 잡았잖아!”

“다르지. 넌 의도가 불순하잖아!”


맹세코 석 팀장을 우습게 생각한 적은 없다. 무서워 했으면 했지. 그저 이혼 후 근황을 물었을 뿐인데 자기가 내 손을 잡는 건 격려고 나는 불순하다니 너무 불공평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연과 브레인스토밍 회의나 할 걸 그랬다.


술자리 분위기는 급흉흉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석 팀장은 술집에서 나가자마자 인사도 없이 바로 택시 타고 집에 가 버렸다. 차라리 잘 됐다. 그런 거 고민할 시간에 시나리오 고민을 해야지.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창한이 각색안을 잘 써오고 밀리언 필름에서도 그 각색안을 좋아하고 창한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주는 것이다. 아니 미쳤나봐. 내가 어쩌다 이런 생각까지;; 얼마나 시나리오에 자신이 없으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나는 정말 시나리오에 재능이 없는 걸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각색 작가를 허락할까? 아니야. 그랬다간 반드시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야 말 거야. 각색 작가가 글을 잘 쓰고 행여나 연출에 욕심이 있기라도 해봐. 그랬다간 진짜 나가리다. 내가 영화사 대표라도 폭망 감독보단 전도 유망한 신인을 밀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나저나 서연은 어떻게 말리지? 감독이 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 씨 괜히 도와준다고 했어..



***



어느 새 우리 둘 만의 아지트가 된 카페엔 여전히 손님이 없었다.


“아니 내가 뭐 그리 대단한 감독이라고.. 그리고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영화는 투자 받기도 힘들어. 그런 영화 중에 잘 된 거 있으면 하나라도 대 봐.”


최경진 감독의 영화 인생을 롤모델로 장편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아이디어에 대해 간곡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서연은 평소답지 않게 전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뚝심있게 밀어 부쳤다. 진심으로 이 아이템에 대한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딱이죠. 대단하지가 않으니까요. 별 볼 일 없으니까요. 흥행에 실패한 신인 감독의 일상을 소재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거 거든요.”


한국에서 폭망 감독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겠지.


“흥행에 실패한 신인 감독 이야기라면 영화보다는 다큐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보다 더 적합한 롤모델이 있을 거야.”

“롤모델로는 감독님이 딱이고요 다큐는 싫어요.”

“왜?”

“다큐는 재미 없으니까요. 자주 보는 편도 아니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 감독님보다 더 어울리는 감독님이 있을 수가 없죠. 감독님! 도와주실 거죠? 네?”

“그렇다면야.. 그냥 지금부터 쓰면 되겠네. 내가 뭐 도와줄 게 있을까?

“인터뷰요. 감독님을 취재하고 싶어요! 시나리오는 발로 쓰는 거 잖아요.”

“하..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 해 봤자 다 구질구질한 흑역사들 뿐이라..”

“그건 인터뷰를 해 봐야 알죠. 그리고 원래 거창한 성공담보다는 그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에요. 천만 감독이 법인 만들어서 강남에 빌딩 올린 얘기를 누가 돈 내고 보고 싶어 할까요?”

“음.. 틀린 말은 아닌데..”

“인터뷰 허락해 주시는 거죠? 그래야 저도 감독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도 될지 말지 감이 올 것 같거든요.”


그냥 영화감독 이야기도 아니고 나를 롤모델로 삼아 흥행에 실패한 신인 감독의 일상을 이야기로 써보겠다니.. 멕이는 건가? 존경한다 어쩐다 했지만 결국 서연은 나를 폭망 감독으로 보고 있던 것이다.


그래 좋다! 백 번 양보해서 까짓꺼 인터뷰를 해 준다 치자.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뭐지? 내가 뭐 아낌없이 주는 나무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짜증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지금 짜증냈다간 이보다 더 못나 보일 순 없을 것이다. 그냥 폭망 감독에서 찐따 폭망 감독으로 기억될 것이다.


얼떨결에 1차 인터뷰 날을 잡고 아이템 회의가 마무리됐다. 내적 갈등이 적지 않았지만 막상 인터뷰를 결심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연과의 관계잖아? 인터뷰도 허락했으니 기념으로 자리를 옮겨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서연은 질문지를 작성해야 한다며 곧장 집으로 가 버렸다.


서운했다. 내가 인터뷰 해 주면 뭘 해 줄 지에 대해 아무 얘기가 없는 것도 괴씸했고. 오늘따라 혜나가 그리웠다. 서연에 비하면 혜나는 천사다. 캐스팅이라는 분에 넘치는 꿈을 꾸고 있어 부담스러웠지만 최소한 기브 앤 테이크라는 개념은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워하지만 말고 불러볼까? 이번에 불러낸다면 지금까지 베푼 호의에 상응하는 청구서가 날아올 것 같아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었다.


이번에도 혜나는 부르자마자 달려나와 주었다.


“고마워. 늦었는데.. 밥은 먹었어?”

“생각은 해 보셨어요?”

“무슨?”

“우리 무슨 사이인지요.”


더 이상 막연한 호의는 베풀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부르자 마자 예쁘게 꾸미고 달려 나와줘서 고맙긴 한데 만나자마자 무슨 사이냐는 질문을 받자 흥이 확 식어 버렸다.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도 하기 전에 계산서부터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독과 배우 사이?”

“그렇군요. 그럼 사무실에서 봐야죠. 정식으로 미팅 잡아주세요.”

“원하는 게 뭐야? 혹시 내가 이혼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거야?”

“호호호. 감독님 재밌으시네.”


쿨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필이면 왜 오늘부터 왜 이러는 거지? 혜나는 이혼을 원하냐는 나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카페에서 나가버렸다. 석 팀장과 서연에 이어서 혜나까지. 나름 의지하고 있던 여자들에게 3연속 콤보로 까이자 자존감이 폭락했다. 내가 대박 감독이었다면 이렇게 대하진 않았겠지. 두고 봐라.


반드시 대박 감독으로 거듭나주겠다는 각오를 더욱 굳게 만든 건 강 대표의 호출이었다. 3연속 콤보로 까이고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자기 방으로 부를 때부터 느낌이 쎄했다. ‘가족사냥’ 이후엔 할 말이 있으면 자기가 내 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혹시 생각해둔 각색 작가는 있으실까요?”


다짜고짜 돌직구였다. 석 팀장이 분명 비밀로 해 준다고 했는데 설마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어 각색고를 강 대표에게 보여주기라도 한 걸까?


“아니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냥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각색 작가.. 제가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네? 지금 쓰고 계신 작품은 어쩌시고요?”

“저 요즘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거 아시죠? 7시에 나옵니다.”

“이야 역시 자기 관리가 철저하시네요.”

“8시부터 10시까지는 ‘가족사냥’에 올인하고 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바쁘실텐데.. 굳이..”

“감독님이 제 글 보고 기성 작가가 쓴 글인줄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죠.”

“그럼 자격은 되는 거잖아요?”

“그.. 그런 셈이죠.”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럼 석 팀장에게는 감독님이 추천해주시면 어떨까요? 명색이 회사 대표가 각색 작가를 하겠다는 얘기를 먼저 꺼낼 수는 없잖아요?”

“아.. 그러신가요?”


자기를 각색 작가로 써주길 바라는 강 대표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눈 앞이 깜깜해졌다. 창한 덕분에 간신히 재기하나 했는데 이번 프로젝트도 이렇게 엎어지는 걸까? 강 대표가 각색에 손을 대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이제는 십중팔구가 아니라 백퍼 나가리다.


사람 일 모른다지만 내 기구한 영화 인생의 마지막이 강 대표의 작가 도전이라는 삽질로 장식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민거리 하나는 없어졌다. 구창한 작가에게 범행 사실을 자수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어차피 엎어질 것이고 아무도 모를 테니까. 밤 바다 한 가운데 내리는 비처럼..


시간이 없다. 이게 다 내가 꾸물거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한가하게 창한의 각색안을 기다릴 순 없다. 이대로라면 잘 된다 해도 각본 타이틀을 강 대표에게 뺏기거나 공유하게 생겼다. 최경진 감독 오리지널로 우라까이를 하겠다며 여유 부리고 있을 때는 더더욱 아니다. 강 대표에게는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내 방으로 와서 곧장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각색안 다듬고 있었습니다. 감독님 말씀대로 고치니까 정말 글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아요.”

“궁금한 걸? 혹시 보내줄 수 있어?”

“지금요? 아직 미완성인데..”

“시나리오라는 건 극장에 걸리기 전까지 완성이란 없는 법이야. 괜찮으니까 보내봐.”

“하긴 그렇긴 하죠. 이렇게 또 배웁니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창한은 전화를 끊자마자 미완성이라는 파일을 보내주었다. 마음 같아선 각색 작업에 전념하는 척 하고 더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만사 제치고 창한이 보내준 파일을 열어보았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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