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회사 같지도 않은 회사는 때려치우는 게 정답이지만

042.

by Zinn


창한이 떠난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최경진 감독 오리지널에 도전해봤지만 구창한 작가라는 보험에 들어둬서인지 당췌 글이 써지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괜히 일을 두 번 할 필요는 없지. 나중에 창한이 2고를 보내준 걸 보고 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마음 고생이 심했으니 푹 자고 한숨 돌리려고 했는데 창한은 바로 다음 날 ‘가족사냥’ 2고의 1차 각색안을 보내왔다. 왜 이렇게 빨리 보냈냐고 물어보자 내 말씀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서둘렀다고 했다. 창한의 1차 각색안은 나쁘진 않았으나 아직은 주인공의 호감도가 부족했다. 하지만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기를 죽일 필요는 없고 방향은 잘 잡았으니 이대로 잘 진행해보라고 했다.


계속 작업을 할 것도 아니어서 더 이상 펜션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얼른 짐을 차에 싣고 펜션을 떠나 집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는데 나의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정과 세미는 거의 한 달만의 재회였지만 마치 아침에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딱히 반기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 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슬슬 ‘가족사냥’ 대박을 전제로 다른 인생을 설계해봐야겠다.



***



감독 방 책상 위에는 커다란 택배 박스가 놓여 있었다. 서연에게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보낸 사람 이름은 구창한이고 포장을 뜯어보니 신형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펜션에서 내 구형 노트북을 보고는 선물을 보낸 것이다. 제법 비싸 보였다. 사실은 나도 신형 노트북이 좋다.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최신 게임 등이 안 돌아가는 구형 노트북을 쓴다고는 했지만 돈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나중에 ‘가족사냥’에 영감을 받은 내 차기작이 잘 되면 ‘땡스 투’ 크레딧에는 반드시 창한의 이름을 올려줄 것이다. 바로 감사 톡을 보내려다가 2차 각색안을 읽고 한꺼번에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점심은 패스하고 오후 내내 감독방에 틀어박혀 신형 노트북을 갖고 놀고 있는데 서연에게 카톡이 왔다.


‘저녁 때 시간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혹시 무슨 일인지?’

‘드릴 말씀 아니 상담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그래 이따 봐.’


퇴근 후, 어느 새 우리 둘 만의 아지트가 된 카페에서 007 작전 하듯 비밀 리에 접선했다. 서연은 입구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에 대한 존경심을 깎아 먹었을 게 뻔한 지난 번 각색 안에 대해 해명 아닌 해명을 하려는데 서연은 내가 맞은 편에 앉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 기획팀 그만두려고요.”

“아니 왜?”

“퇴사하고 빨리 내 영화 만들고 싶어서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나도 예전에 기획팀 해 봐서 아는데 오래 할 짓은 못 돼.”

“감독님은 기획팀 왜 그만두셨어요?”

“음.. 얘기하면 긴데. 짧은 버전으로 할게.”


짧은 버전으로 하려 했지만 길어질 것만 같은 운명적인 느낌이 왔다.


“결국은 내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였지. 아마 임 감독님이 연출부로 써주지 않았다면 계속 다녔을 지도 몰라. 그런 면에선 감사한 분이지 정말로..”


나름 감회에 젖어 본격적으로 기획팀 퇴사 후 연출부 시절 이야기를 늘어 놓으려는데 서연은 전혀 관심이 없는지 핸드폰을 힐끔 거리고 있었다.


“음.. 그래서 기획팀 관두면 다음 계획은 있고?”

“퇴사하고 내 영화 만들어야죠.”


계획이 없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요.. ‘남친이 상했다’를 장편 시나리오로 발전시키고 싶은데 이게 메이드가 될 지 잘 모르겠어서요.”

“그렇지. 그건 아무도 모르지.”


지난 번에 나에게 보내 준 ‘남친이 상했다’라면 개발하나 마나겠지만 굳이 직언을 하고 싶진 않았다.


“조금 더 발전시킨 버전이 있는데 보내드려봐도 될까요?”

“되지! 그런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충분히 다듬어서 보내줘도 돼.”

“아니다. 이거 말고 제가 예전부터 생각해둔 아이템이 있거든요. 그걸 발전시켜서 보내드릴게요.”

“그래. 그럼 그거 보내줘. 궁금하네. 양 피디 아이템.”


서연은 차분한 외모와는 달리 기복이 좀 있는 스타일 같았다. 이야기를 해 준다고 했다가 말았다가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살짝 짜증은 났지만 이상하게 서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저 입가에 미소만 지어졌다. 하지만 상의할 게 있다고 불러놓고 상의를 하려다 말아버리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서연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말 없이 커피만 홀짝이고 있었다. 내가 리드해줘야 하나?


“양 피디는 결국은 감독을 하고 싶은 거지?”

“네. 졸업 작품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감독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졸업 작품 따윈 중요치 않아. 다음에 무슨 영화를 만들고 싶은 지가 중요하지.”

“솔직히 지금 아이템도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안 들어서요. 이러면 감독은 무리일까요?”

“아니야. 그건 나도 마찬가서인걸? 바로 이거다 싶은 아이템을 찾는 것도 감독의 일이라고 생각해.”


나름 멋있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서연은 감동받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이템 찾는데 올인해도 될까 말까잖아요. 기획팀 일 때문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일이 그렇게 많아?”

“일이 많다기 보단 강 대표가 자꾸 귀찮게 해서요.”

“귀찮게? 설마 직장 내 괴롭힘 같은 건가?”

“그 정도는 아니고요. 중요한 사람들 소개 시켜준다고 자꾸 술자리에 데리고 다녀서요.”


아하! 강 대표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았다. 명문대에 어리고 예쁜 여직원이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다. 20년 전이라면 석 팀장이 딱 그 역할이었을텐데 세월이 무상했다.


“처음엔 좋은 분들 소개시켜줘서 재밌었는데 이제는 내 시간만 뺏기는 것 같고 아저씨들이 너무 귀찮게 굴어서.. 지난 번 워크샵도 완전 지옥 같았거든요.. 그래서 관두려고요.”

“워크샵 때 무슨 일이 있었어?”

“장기 자랑.. 아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안 봐도 비디오다. 직원들 장기 자랑 같은 거 시키고 지는 뒤에 떡하니 사또 모드로 앉아서 관전했겠지. 상금이랍시고 푼 돈 걸고. 이딴 회사 같지도 않은 회사는 당장 때려치우는 게 정답이지만 서연이 없는 밀리언 필름에서 무슨 낙으로 버틸 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런 비전 없는 듣보잡 신생 제작사는 관두는 게 맞아. 하지만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 회사는 언젠가는 그만둬야 하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 아이템을 찾으려면 브레인스토밍을 해야 하는데 브레인스토밍이라는 건 원래 딴 짓을 하거나 멍 때리고 있을 때 잘 되는 법이거든. 회사 월급 받으면서 자기 작품을 준비하는 기회가 쉽게 오는 건 아니야. 귀찮게 불려 다니는 건 줄여나가면 되고 업무 시간에 강 대표나 석 팀장이 일을 많이 시키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해요.”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나도 도울 테니 정기적으로 만나서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처럼 퇴근 후에 일주일에 한 두 번쯤? 양서연 감독님 데뷔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인생을 걸고 올인할 만한 아이템을 찾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지. 퇴사 타이밍은 아이템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때쯤 다시 상의하면 좋을 것 같고.”

“감독님 바쁘실텐데 정말 그래주시겠어요?”

“양 피디만 좋다면 나도 좋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잘 해 주시는 거죠?”

“왜냐면.. 뭐랄까.. 음.. 양서연 감독님의 데뷔작을 보고 싶은 순수한 팬심으로 생각해주면 될 것 같아. 지난 번에 보여준 시나리오 마음에 들었거든. 다음 작품도 보고 싶어. 궁금해. 그리고 당분간은 비밀 리에 진행하자. 아직은 너무 초기 단계이기도 하고 남들 귀에 들어가봤자 좋을 거 없잖아? 특히 석 팀장이 알면.. 아휴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마음 같아선 영원히 비밀로 진행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해할 수도 있으니 당분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내가 서연이라도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면 감동의 눈물이 흐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지금은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지만 다다음번 쯤엔 술집에서 만나야지.



***



마침 잘 됐다. 어차피 본격적인 작업은 창한의 2차 각색안을 보고 시작할 생각이었으니 출근해서 할 일이 마땅치 않았는데 서연과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비밀 리에 회의를 빙자한 데이트를 하면 시간도 때울 수 있고 서연과 둘 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어 꿩먹고 알 먹기였다.


책상 앞에 앉아 다다음번 쯤 회의 장소가 될 핫플레이스 술집 검색을 하고 있는데 강 대표가 노크도 없이 불쑥 감독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손에 두툼한 A4 뭉치가 들려있었다.


“감독님! 안 바쁘시면 이거 한 번 읽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게 뭔데요?”

“그냥 한 번 읽어보세요. 한 시간이면 될까요?”

“지금 뭘 좀 하고 있긴 한데..”


강 대표의 얼굴에 지금 바로 읽으라고 적혀 있어서 감히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네..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한 시간 뒤에 다시 올게요.”


황당했다. 다짜고짜 방으로 쳐들어와 정체 불명의 종이 뭉치를 읽어보라고 툭 던지고 나가다니..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도대체 왜 저러나 궁금해서 첫 페이지를 넘겨 보았더니 시나리오 형식의 문서였다. 앞 장에 제목과 작가 이름이 적혀 있진 않았지만 어쩐지 강 대표의 작품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나리오는 금방 읽혔다. 페이지 수에 비해 글자 수는 적고 컸기 때문이다. 꼼꼼히 읽을 필요도 없었다. 완전 초짜에 아마추어 습작 수준도 못 되는 시나리오였다. 심지어 ‘구멍가게’보다도 별로였다. 그래도 ‘구멍가게’는 19금 떡 영화라는 존재 이유가 있고 작가의 체험이 바탕이어서인지 현실감은 있었는데 이건 도대체 왜 읽어 보라고 한 건 지조차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고 강 대표가 돌아왔다.


“어떠셨어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강 대표의 비장한 눈빛을 보아하니 이건 분명 강 대표 본인이 쓴 게 확실했다. 솔직히 영화과 1학년이 쓴 것 만도 못한 시나리오지만 아니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 학생이 쓴 것만도 못한 시나리오지만 차마 그렇게 말 할 순 없었다.


굳이 직언을 해서 밉보일 이유가 있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영혼까지 끌어모아 극찬 융단폭격을 퍼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언을 할 게 아니라면 제대로 빨아주자.


“뭐랄까요.. 거칠고 투박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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