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이 없어도 마감은 정해두는 게 좋다

041.

by Zinn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싸이코패스 주인공을 호감형으로 바꿀 아이디어다. 설령 구창한 작가에게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없더라도 생각해보라고 하면 뭔가 나올 수도 있다. 일단 물어나 보자. 절대로 작품을 훔친 것도 모자라 아이디어까지 훔치려는 건 아니고 모니터를 부탁했으니 감상을 얘기해주려는 것 뿐이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고 전화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창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아우 감독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괜찮으니까 말 놓으세요. 민망합니다.”

“그래도 될까?”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잘 지냈지?”

“네 감독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글은 잘 봤어.”

“정말요? 아 감사합니다. 제가 먼저 연락드리고 찾아뵀어야 하는데..”

“그래? 올래?”

“어디세요?”

“난 지금 서울 아닌데 괜찮겠어?”

“당연하죠. 바쁘신 와중에 기껏 시간내서 말씀해주시는 건데요. 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예전에 임문호 감독과 종종 들르던 펜션에서 차기작을 집필 중이라고 하자 어딘지 기억하고 있다며 곧장 차를 몰고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다시 한 번 ‘가족사냥’ 시나리오 파일을 열어 보았다.


대충 내용은 알고 있지만 여기까지 와 준다는데 시나리오조차 안 읽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내 각색안이 혹평을 받은 이유도 원작을 제대로 안 읽어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구창한 작가의 원작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더 나은 각색안을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각 잡고 처음으로 ‘가족사냥’을 읽어봤는데 이건 이건 내가 우라까이로 넘어설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작가 지망생 구창한의 필력이 아니었다. 작가가 아니라 작가님으로 모셔야 마땅할 정도였다.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에 비하면 내 각색안은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이딴 걸 각색안이랍시고 모니터를 돌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마음 같아선 이런 시나리오를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영광이고 데뷔는 시간문제라고 극찬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전화를 끊고 정확히 3시간 뒤 구창한 작가님이 펜션에 도착하셨다.


“식사는?”

“네. 오는 길에 대충 먹었어요.”

“커피 한 잔 할래?”

“좋죠.”

“캡슐 커피도 괜찮지?”

“그럼요. 전 아무 거나 잘 마셔요. 작업 중이셨던 거죠?”

“응.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 자 마셔.”


창한은 내가 건넨 캡슐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감독님 노트북인가요?”

“응. 좀 오래되긴 했지만 유튜브도 벅찬 사양이라 집필에는 딱 좋아.”

“그렇겠네요. 유튜브가 잘 돌아가면 집중에 방해 되니까요.”

“노트북 좋으면 줄창 게임 밖에 더 하겠어?”

“그렇긴 하죠.”


‘가족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전에 과거에 임 감독이 갑질과 가스라이팅으로 구창한 작가의 작품을 강탈할 때 옆에서 방관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은근 슬쩍 임 감독 뒷담화를 깠다. 라포르 형성을 위해서다.


“감독들이 원래 욕심이 많아. 각본/감독 크레딧 그깟게 뭐라고. 결국은 그렇게 가실 것을.. 서운한 게 많았을 텐데 미안해. 진짜 미안하다.”


임 감독의 갑질과 가스라이팅은 내 잘못이 아니므로 하나도 안 미안한데 ‘가족사냥’에 대해선 본의 아니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보니 미안하다는 말에 진정성이 듬뿍 담겼다.


“아니에요. 감독님 잘못도 아니고. 저도 그렇게 잠수타는 게 아닌데.. 어린 나이에 철이 없어서.. 제 잘못이에요 힘들어도 끝까지 버텼어야죠.”

“아니야. 버텼어봤자 좋을 일은 없었을 거야. 그 때 그 멤버들 중 지금 잘 된 사람 한 명도 없어. 임 감독, 제작사 대표, 프로듀서 등등. 다 놀고 있을걸? 영화 일은 안 하는 아니 못 하는 게 확실하고. 우리 일이 잘 되면 모를 수가 없다는 특징이 있잖아?”

“그렇긴 하죠. 덕분에 저도 감독님 근황을 알 수 있었고요. ‘꼴리는 영화’요.”

“‘꼴리는 영화’ 얘긴 그만하자.”

“앗..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재밌게 봐서..”

“맞다. 시나리오 얘기 해 줘야지? ‘가족사냥’.. 나쁘진 않았어. 진심이야.”

“아.. 다행이네요.”


구창한 작가님의 시나리오를 본의 아니게 회사에 보여줬는데 다들 내가 쓴 걸로 오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 이거 딴 사람 보여준 적 있어?”

“아니요. 감독님이 처음이세요.”

“잘했어. 앞으로도 안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볼 때 이 시나리오는 아이템이 중요하거든. 구 작가도 임 감독에게 한 번 당해봐서 알겠지만 아이템은 먼저 만드는 사람이 임자잖아? 게다가 이건 선수 손에 들어가면 아이템만 쏙 빼내서 자기가 아는 작가에게 맡기기 딱 좋은 작품이야. 그 정도는 알고 있지?”

“네. 그래서 감독님에게 보여드린 거에요.”

“왜 나야?”

“감독님이니까요. 믿음이 갔어요.”


나를 믿는다고 말하는 창한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가족사냥'을 뺏는 건 창한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근데.. 이게 정말 초고야?”

“네. 완성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요.”

“그 동안 영화사 같은 데서 일한 경험은 없고? 기획 작가나 보조 작가나.. 괜찮으니까 얘기해 봐. 설마 내가 뒷조사라도 하겠어?”

“없어요 정말입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일단은 공모전에 내 볼 생각이었어요. 아는 영화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요. 감독님 말고는 딱히.”

“공모전이라.. 솔직히 말해서 아이템이 좋긴 한데 아직은 완성도가 떨어져서..”


창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 상태로 공모전에 냈다간 수상은 못하고 임 감독 같은 심사위원 만났다간 지난 번처럼 아이템만 빼앗기기 딱 좋을 것 같거든.”

“그런가요..”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야? 작가 데뷔? 아니면 감독?”

“아니에요! 제가 감히 어떻게.. 감독 데뷔 같은 큰 욕심은 없고요 작가 데뷔라도 할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잘 생각했어. 감독은 몰라도 작가 데뷔가 목적이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자기가 올해 몇 살이지?”

“서른 여섯 입니다. 작가 지망생 치곤 넘 많은가요?”

“무슨 소리! 좋은 나이야! 내가 그 나이 땐 돌멩이도 씹어 먹었어.”

“말씀 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니야. 내가 고맙지. ‘가족사냥’ 정말 잘 읽었어. 많이 늘었네 그 동안. 그런데 어설픈 상태로 영화사에 들어갔다간 이거 저거 백날 수정하란 얘기만 듣다가 세월 다 가는 거 알지?

“알죠.”

“영화사에는 가능하다면 토씨 하나 고칠 필요 없는 상태의 시나리오를 보내는 게 좋아.”

“네 감독님!”


창한의 눈빛을 보아하니 라포르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았다.


“나 믿고 한 번만 더 고쳐볼래? 지금 상태로 영화사를 알아봐주는 건 좀 그렇고 딱 한 번만 더 고쳐보고 생각해보자. 공모전은 잊어버리자고.”

“정말요?”

“내가 너 책임지고 데뷔시켜준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런 말 하는 사람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니까 믿지 말고. 어때? 형 한 번 믿어 보지 않을래?”

“영광이죠 감독님!”

“집필 말고 따로 하는 일은?”

“다 관뒀고요 글만 쓴 지 오래 됐습니다.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생활비는 있고?”

“괜찮아요 감독님. 지금 저에게 돈은 중요치 않아요.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벌겠다고 글 쓰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자세가 됐네! 우리 구 작가 금방 대성할 것 같아! 그럼 이제부터 시나리오 얘기를 해 볼까?”

“네 감독님!”

“다 좋은데.. 주인공이 문제야. 싸이코패스인건 알겠는데 너무 비호감이거든. 관객들이 비호감으로 느끼는 주인공이라면 스타 캐스팅은 어렵다고 봐야 돼. 스타 캐스팅이 안 되면 투자는 보나마나고. 구 작가. 이번엔 축복 받으면서 데뷔해야지?”


이어서 밀리언 필름 기획팀에서 받은 ‘가족사냥’ 장단점 모니터 의견들을 마치 내 생각인 것 마냥 창한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창한은 매우 공손한 자세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만 눈치를 보아하니 창한에게도 싸이코패스 주인공을 호감형으로 바꿀 수 있는 아이디어는 없는 듯 했다.


나도 대안이 있는 건 아닌데.. 라면서 은근슬쩍 나의 각색안을 구두로 던져 보았는데 창한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똑 부러지게 잘라버렸다. 확 빈정이 상해버렸지만 창한은 그래도 역시 기성 감독님이어서인지 인사이트의 차원이 다르다며 내 의견을 반영해서 고쳐보겠다고 했다.


의욕은 가상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초고를 잘 쓰는 것과 남의 의견을 반영해서 각색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색은 영화판에서 최소 10년은 굴러야 감을 잡을 수 있는 전문가의 영역인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최경진 오리지널이 애초의 계획이었으니까. 창한에게 시켜 보나마나 결과가 뻔할 각색까지 맡겨서 두 번 죽게 할 순 없다.


역시 나 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도전해 보자. 대폭 수정을 거쳐야 할 게 뻔하므로 자연스럽게 나의 오리지널이 될 것이다. 난 임 감독과는 다르다. 절대로 구창한 작가의 작품을 뺏는 것이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족사냥’이라는 제목도 바꿔버리자. 나중에 창한이 시비를 걸면 영감을 받은 정도로 퉁치자. 이번 작업은 어디까지나 내 오리지널을 쓰는 것이다.


오리지널 구상을 하느라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창한의 그늘졌던 얼굴에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동안 혼자 작업하면서 뭔가 부족하고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바로 그거였어요. 호감형 싸이코패스 주인공! 감독님 덕분에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어렴풋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한 번 고쳐볼게요.”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마감 아니 시간은 어느 정도면 될까? 어디 내야 되거나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정해두면 작업할 때 긴장감도 생기고 좋거든.”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빨리? 그럼 술은 다음 주에 마실까? 2고 모니터 하면서?”

“네 감독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창한은 감사하다는 말을 백번 정도 반복한 후 펜션을 떠났다. 든든했다. 아무도 모르는 보험 상품에 가입한 기분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밀리언 필름에서 최경진 오리지널 각색안을 또 다시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곧장 구창한 작가의 2고를 대안으로 들이밀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창한이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기성 감독인 최경진 오리지널보다는 못하겠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단 낫다. 괜히 혼자 끙끙대지 말고 더 빨리 연락할 걸 그랬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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