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본격 각색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지난 십여년간 모아 왔던 시나리오 작법서들을 복습하는 것이다. 그래야 초심으로 돌아가 이 작품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을 수 있고 최신 작법 트렌드에 맞는 각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데뷔 이후 10년이 지났고 나이도 적은 편이 아니어서인지 절대로 올드해졌다거나 감이 떨어졌다는 소리만큼은 듣고 싶지 않다.
내 방 책꽂이에 꽂혀 있던 작법서들을 쭉 훑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확실히 도움이 됐다. 이젠 쓰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아직은 아니다. 다음은 레퍼런스 연구다. ‘가족사냥’과 비슷한 영화, 드라마, 소설들을 모조리 찾아서 장단점을 분석해야 한다. 이 작업은 표절 시비를 피해가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수십여편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연구하는데 또 다시 일주일이 걸렸다. 일주일로는 부족했지만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 더 이상 이 단계에 시간을 쓸 수 없었다.
지난 10여년 간 출간된 시나리오 작법서들을 쭉 훑었고 레퍼런스 연구까지 마쳤으니 드디어 각색 작업 착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무실에선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독방 말고 조용한 작업실이 필요했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오로지 집필 만을 위한 공간. 너무 낯선 곳은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릴 테니 적당히 익숙한 곳이어야 했고 마침 그런 곳이 있다.
바로 임문호 감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펜션 타운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가족사냥’의 집필은 반드시 그 동네에서 해야 할 것 같은 운명적인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돌이켜보면 연출부와 조감독 시절 그 동네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영화들은 다 흥행 성적이 좋았다.
‘꼴리는 영화’도 그 동네에서 썼어야 했다. 당시 그 동네에서 시나리오 작업하는 게 지겹다고 그냥 꾸역꾸역 집 근처 조용한 카페들을 돌아다니며 썼는데 그래서 폭망한 것 같다.
마감까지 2주 남았다. 한 시가 급하다. 어느 펜션이 좋을 지 검색을 해 보았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펜션이 나오지 않았다. 좀 찝찝하긴 하지만 임 감독의 단골 펜션을 검색해보았는데 예상 외로 아직도 영업 중이었다. 임 감독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간 펜션이라는 소문이 나서 망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석 팀장은 척하면 척이었다. 석 팀장도 예전에 임 감독과 함께 그 동네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경험이 있다. 조용한 장소에서 집중을 해야겠다며 그 펜션을 언급하자 곧장 예약해주었고 직접 차로 모셔다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알아서 갈 테니 2주 뒤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노트북과 가장 아끼는 작법책 서너 권을 챙겨 아내 명의의 차 트렁크에 넣은 후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펜션으로 향했다. 든든했다. 이 작법책들만 있으면 절대로 작업 도중에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펜션은 임 감독 사건 이후 주인이 바뀌고 인테리어도 다시 해서인지 예전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덕분에 이틀 정도는 낯선 공간에 적응하느라 시간을 써야 했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에는 작업 루틴을 만드느라 또 하루가 필요했다.
원활한 집필을 위해서는 루틴 확립이 필수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고 저절로 글이 써지는 게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하게 사과와 토스트 그리고 계란 후라이를 먹은 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온다. 산책을 해야 혈당 스파이크를 막을 수 있고 전신에 피가 돌며 작업 모드로 전환이 되기 때문이다.
이 동네에 온 게 거의 10년만이다보니 집필에 최적화된 산책로 개발에 또 다시 이틀이 필요했고 평지만 걸으면 운동이 되지 않아 뒷산 산책로까지 개척하느라 이틀이 더 소요되었다. 뒷산 정상 부근에 방치되어 있는 녹슨 컨테이너를 찍고 내려오는 코스가 딱 적당했다.
식사도 중요하다. 살도 뺄 겸 빵이랑 달걀만 먹으려고 했는데 영 부실해서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근처에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들을 사 오긴 했지만 막상 직접 요리를 해 먹으려니 보통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땅한 밥 집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슬슬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졌지만 작업을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그럴 순 없었다.
달력을 보니 마감 일주일 전이었다. 슬슬 불안해졌다. 이러다 영영 못 쓰는 거 아닌가? 시나리오를 잘 쓰는 능력이 없다는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최적의 작업 환경을 갖추겠다는 핑계로 시간만 떼운 거 아닌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렇게까지 오래 안 써지는 건 정상이 아니다. 너무 오래 집필을 쉬어서 감을 잃은 것일 수도 있다. 한창 땐 쓰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써 졌다. 작업실이나 루틴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왕성하게 글을 쓰던 선배들을 보면 결국엔 글을 안 쓰게 되던데 나도 그렇게 된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이제 꼴랑 한 편 만든 폭망 감독이 그나마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집필 능력까지 상실했다면 은퇴말곤 답이 없다. 혹시 남의 글을 도둑질 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인가? 뭐가 됐건 너무나도 쓰기 싫었지만 ‘꼴리는 영화’ 한 편으로 영화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이를 악물고 노트북을 펴고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펴기까지가 힘들지 막상 펴고 나면 뭐가 됐든 글은 써지는 법이다.
대략 해가 질 때쯤 본격 집필을 위한 웜업 따윈 건너뛰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A4 열 장 가량의 시놉시스를 완성하고 나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밤을 새운 것이다. 중간 중간 딴짓의 유혹이 있었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다행이다. 하니까 되네. 당분간은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다.
여기까진 좋았지만 배가 고파서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커피 한 잔으로 머리를 깨운 뒤 밤 새 집필한 시놉시스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이대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도 될 지 확신이 들진 않았다. 석 팀장에게 시놉시스 모니터를 부탁할까 했지만 아무리 한 배를 탄 사이라 해도 일단은 부담스러웠고 반응이 별로라면 간신히 다잡은 멘탈이 흔들릴 것 같았다. 조금 더 만만하고 편한 상대가 필요하다.
자승이 떠올랐다. 자기 글은 못 쓰지만 남의 글은 잘 보는 편이고 조감독 일도 똘똘하게 잘 해서 믿을만 했다. 동민도 나쁘진 않지만 나에 대한 질투로 인해 객관성을 상실한 상태이다보니 믿음이 덜 간다.
‘뭐하냐?’
자승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읽지도 않았다. 아직 오전이어서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나면 연락 좀.’
하지만 자승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엔 나의 참을성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객관성은 상실했지만 그 누구보다 솔직한 반응을 해 줄 동민에게 시놉시스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자냐?’
‘아니.’
‘아침인데 웬일이냐?’
‘집필 중이시다.’
‘뭐 하나만 읽어줄 수 있냐?’
‘뭐?’
‘시놉시스.’
‘니꺼야?’
‘응.’
‘새로 쓴 거?’
‘아니 가족사냥. 기획팀 모니터 반영하려고 수정 중이거든.’
‘이왕 쓸거면 나한테 구두로 컨펌받고 쓰지 그랬냐. 보내봐라.’
동민에게 카톡으로 시놉시스를 보내고 신선한 아침 공기도 마실 겸 동네 산책을 나왔다. 뒷산 정상에 있는 컨테이너를 찍고 펜션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답이 올 텐데 아마도 훨씬 더 나아졌다는 극찬일 것이다. 대기만성? 아니면 거장의 각성? 뭐 이런 느낌 아닐까? 밤샘 집필 하느라 고생한 나에게 상을 주고 싶어서 나름 지역 맛집으로 유명한 해물 칼국수집으로 가고 있는데 동민에게 전화가 왔다.
“이거 뭐냐?”
“각색안.”
“원래꺼 좋았는데 왜 바꾸려고? 별로야. 걍 그대로 찍어.”
“니가 본 건 초고라서 그대로는 못 찍어. 어떤 점이 별론데?”
“그게 초고라고? 그럴 리가..”
“어떤 점이 별로냐니까?”
“20자 평을 하자면 초고는 최경진 감독 작품 같지 않았는데 이건 딱 최경진 감독의 작품 같다.”
“일단 니 평은 20자 평이 넘으니까 20자 평은 아니고 혹시 니가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그러니까 만년 망생이 신세겠지.”
“야 너 설마.. 니가 쓴 거 맞지?”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역시 동민은 안 된다. 질투심에 눈이 먼 놈이다. 나와 혜나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으니 글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집필에 쓴 시간은 10시간 가량이지만 구상에 쓴 시간까지 포함해서 대략 한 달 정도를 부정당한 기분에 입맛이 달아나버렸다. 지역 맛집이고 뭐고 냉장고 속에 넣어 둔 캔맥주 원샷이 간절했다. 칼국수를 먹으려다 말고 펜션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자승에게 전화가 왔다.
“톡을 지금 확인했어요.”
“그래. 지금 당장 뭐 하나 읽어줄 수 있어?”
“네. 시나리오요?”
“아니 시놉시스.”
“누구 껀데요?”
“일단 읽어봐. 바로 보내줄게.”
자승에게 시놉시스를 전송하고 펜션으로 가고 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전화가 왔다.
“다 읽었어요.”
“열 장을 벌써 다 읽었어?”
“그럼요 조감독 할 건데 바로바로 파악해야죠. 이거 설마 ‘가족사냥’ 각색안인가요?”
“응. 그런 셈이지.”
“작가가 누구에요?”
“나도 몰라. 회사에서 보내준 거야.”
“이런 각색은 반댑니다. 원작의 매력이 다 사라진 것 같아요. 한 마디로 별로에요.”
“알았다.”
“거기 기획팀 안 되겠네요. 이딴 걸 각색안이라고 감독님에게 보내다니요.”
더 들었다간 내상이 커질 것 같아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승이도 안 되겠다. 자기 글은 못 써도 남의 글은 잘 보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자기 글 쓰느라 너무 오래 고생을 했는지 감을 잃은 것 같다. 이럴 때 믿고 따르는 선배가 있으면 딱 좋으련만 이젠 멀쩡한 선배가 남아 있지 않다. 대부분 은퇴했거나 연락이 두절됐거나 해원 형처럼 연락은 할 수 있는 경우엔 내가 내키지가 않았다. 그들과는 반대로 아예 잘 나가는 극소수가 있지만 그 분들은 내 글 따위는 모니터 해줄 시간이 없다.
나는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일까? 전자거나 전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그러니 더 더욱 이번 작품은 잘 돼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동민과 자승은 둘 다 한 물 간 영화인들이다. 그들에게 모니터를 부탁한 내가 잘못이다. 삼 세번이라고 딱 한 명에게만 더 모니터를 받아보고 그도 아니라고 하면 내 각색안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자.
바로 떠오른 후보는 양서연 피디다. 서연의 평가라면 믿을 수 있다. 진흙 속에 묻혀 있던 ‘가족사냥’을 발굴한 장본인이니 이번 각색안도 정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