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양서연 피디에게 아무 사전 설명 없이 ‘가족사냥’ 각색안을 카톡으로 띡 보내고는 회사에는 아직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 톡을 남겼다. 동민에 이어 자승에게까지 혹평을 듣고 나니 술 생각이 간절했다.
산책을 중단하고 펜션으로 돌아와 소파에 널브러져 냉장고에 쟁여둔 맥주를 마셨다. 탈고하고 마시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쓴맛이 났다. 한 캔 다 마실 때쯤 서연에게 전화가 왔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회사 밖으로 나가서 전화하는 모양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집필은 잘 되시고요?”
서연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운됐던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다. 마음 같아선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회사에 별 일은 없었는지 시시콜콜 스몰톡을 나누고 싶었으나 감독님이 그러면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애써 자제했다. 지금은 작품 이야기만 하는 게 맞다.
“어땠어?”
“아..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감독님의 개성이 확실히 드러난 건 좋은 것 같은데요.. 진짜 누가 봐도 최경진 감독 작품이겠더라고요.”
“그런데?”
“원작이랑은 좀 멀어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별로라고? 아님 더 좋다고?”
“개인적으로는 좋았는데요 회사에서 어떻게 생각할 지는 잘 모르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좋았어?”
“당연하죠! 전 감독님 평생 팬인걸요!”
“빈 말이라도 고맙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기획팀에서도 아이디어들을 좀 드려볼까요?”
“아니야. 괜찮아. 설마 팀에 공유한 건 아니지?”
“당연하죠. 감독님이 회사에는 아직 보여주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잘 했어. 이번 버전은 여러가지 안 중의 하나일 뿐이야. 양 피디는 안 읽은 걸로 하자. 잊어.”
“정말 그래도 될까요? 저는 좋았는데..”
“빠른 의견 고맙고 이 버전은 정말 잊어주면 좋겠어. 진심이야. 그럼 다시 연락할게.”
“있잖아요 감독님!”
“응?”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무슨 말인데?”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앗 지금 회의 들어가야 돼서요.”
“알았어. 수고하고.”
괜히 보여줬다. 나에 대한 존경심에 금이 갔을 게 분명하다. 만회할 방법은 훌륭한 결과물 뿐인데 이젠 마감까지 얼마 남지도 않아서 새로 쓰기엔 시간이 모자란다.
삼진 아웃. 세 명에게 보여줬는데 세 명 다 별로라고 했으면 게임 오버다. 더 두고 볼 것도 없다. 혹시나는 역시나다. 석 팀장에게 보여줘봤자 욕만 먹을 게 분명하다. 최악의 경우 내 허락도 없이 각색 작가를 붙여버릴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나에 대한 유무형의 감독 대접이 다운 그레이드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나저나 서연인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거지? 설마 보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난 유부남이라고.. 하지만 보고 싶다 정도는 괜찮은가? 일은 손에 안 잡히고 서연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스타에 들어갔는데 별 특이사항은 없었다. 카페 집필 인증샷 뿐이었다. 그래. 서연은 잘못이 없다. 서연을 너무 높이 평가한 내가 잘못이다. 데뷔는 커녕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것도 아닌 단지 자기 글 쓰고 싶은 철없는 지망생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다.
마감까지 며칠 안 남았지만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 하려고 한글 창을 열었으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취기가 훅하고 올라왔고 설상가상 밤을 새워서인지 잠이 밀려들었다. 아 맞다! 마감을 연기해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일주일 정도는 용서해주겠지 뭐. 아님 어쩔 건데?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노트북은 접어 버리고 맥주 한 캔을 더 따서 홀짝이던 중 문득 난니맨의 악플이 떠올랐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데뷔작은 이미 세상에서 잊혀졌고 누가 감독하라고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다. 진짜 바꾸는 게 맞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네 다시 스르륵 잠이 들려는데 신경질적인 초인종 소리에 눈이 떠졌다. 도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무례하게 초인종을 누르나 싶어 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석 팀장과 서연이다.
“왜 왔어?”
“어휴 술 냄새. 왜긴 왜야! 일 잘 하고 있나 감시하러 왔지!”
“그래도 연락은 하고 와야지.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화장실 어디야?”
석 팀장은 기세등등 펜션 안으로 밀고 들어와 곧장 화장실에 갔고 서연은 쭈뼛쭈뼛 따라 들어왔다.
“죄송해요 감독님. 책상 위에 출력해 둔 걸 팀장님에게 들키는 바람에..”
“석 팀장이 본 거야?”
“네.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뭐 어쩔 수 없지. 허락도 없이 남의 책상 들여다 본 사람이 이상한 거지.”
석 팀장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석 팀장과 서연이 나를 만나러 온 건 회사에는 비밀이라고 했다. 이 각색안을 강 대표에게 보여줬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될 것 같아서 만사 제끼고 달려왔는데 강 대표는 직원들이 자기 몰래 일을 진행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이다.
“강 대표에게 이거 보여줬다간 정말 큰 일 난다.”
“큰 일은 무슨.. 어쩔 건데? 짤리기라도 하겠어?”
“이제부터 자기가 쓰겠다고 할 거야.”
현기증이 났다. 강 대표가 작가 데뷔에 욕심이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희생양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잠시 잊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각본에 강 대표 이름이 단독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대표님은 아직 안 봤으니까 걱정 말고 서연이 넌 잠깐 동네 한 바퀴 돌고 와.”
“네 팀장님.”
밀폐된 공간에서 석 팀장과 둘이 있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나름 배려해서 한 행동일테니 가만히 있었다. 서연이 나가고 나자 석 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렇게 고치랬어?”
“아니 세상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도 몰라? 그걸로 어떻게 영화를 찍어?”
“쓰레기가 아니었는데 쓰레기가 됐으니까 문제지. 원래대로 돌려놔. 호감형 싸이코패스 캐릭터는 우리가 어떻게든 만들어 볼게.”
석 팀장은 초고가 훨씬 낫다며 이런 식으로 혼자서 오락가락하다간 ‘가족사냥’도 엎어지거나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지더라도 폭망할 거라며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런데 약간 의기양양한 게 신나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면서 역시 나에겐 객관적으로 글을 가이드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넌 내가 필요해. 나 없음 안 돼! 라고 이마에 적혀 있었다.
“올 해 안엔 꼭 재기하셔야죠 감독님! 이번에 엎어지고 컴백까지 십년 넘기실 거에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폭망 이후 벌써 10년이다. 다음 프로젝트가 아무리 빨리 진행된다 해도 3년 안엔 어려울 것이다. 영화 감독을 꿈꾸던 고1 때부터 평생의 미스터리였던 나에게 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의 답도 나오는 셈이다.
석 팀장과는 과거 전도 유망한 조감독 시절 잠깐이나마 공동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는 편이었고 석 팀장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석 팀장은 너 그렇게 남의 말 안 듣고 니가 쓰고 싶은 대로만 쓰면 폭망할 거라고 했고 나는 그럴 일은 없다고 했지만 결국엔 석 팀장의 말이 맞았다.
그런 과거가 있다보니 석 팀장의 피드백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 각색안을 밀어부쳤다가는 이대로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진심어린 조언이 고맙긴 했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고 시놉시스 따위는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자꾸 혜나가 보고 싶어졌다.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준 혜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혜나와의 하룻밤이면 바닥을 친 자존감을 회복하고 다시 글을 쓰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만 더 주면 안 될까? 진짜 저대로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구.”
여기 내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었는데 지금은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서 비굴해졌다. 하루 아침에 폭망 감독 최경진으로 원상복구 됐다. 비장의 히든 카드들이 싸그리 짓밟혔으니 그럴 수 밖에. 데뷔도 못했다고 무시했던 구창한 작가가 거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저 막막할 뿐이다. 내 글이 그렇게 구리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잔소리 해도 될까?”
“응.”
“주인공이 너무 비호감이야. 이렇게 놔두면 절대로 캐스팅 안 될 거야. 어떻게든 호감형으로 바꿔야 해.”
“가장을 죽이고 남의 가정을 뺏는 싸이코패스에게 호감을 느끼게 바꾸라는 말이지?”
“자신 없으면 각색 작가 붙여줄까? 기획팀까지 다 붙어서 공동 집필 시스템으로? 강 대표의 지도 편달 받으며?”
“미안하다. 내가 잘 할게.”
“지금 이대로는 스타 캐스팅은 꿈도 못 꿔. 차기작도 저예산으로 찍고 싶은 건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다. 스타 캐스팅이 안 되면 제작비도 쪼그라든다. 아무도 모르는 배우 데리고 가난한 영화를 찍는 게 얼마나 서럽고 비참한 일인지는 한 번 경험해봐서 충분히 알고 있다.
비상 대책 회의는 마감을 일주일 뒤로 연기하는 걸로 결론을 내고 마무리 됐다. 글 쓰느라 고생했다고 근처 맛집이라도 데리고 가 줄 줄 알았는데 석 팀장과 서연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혼자였을 땐 몰랐는데 사람이 있다가 없으니까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외로웠다. 혜나를 부르면 와 줄 것 같긴 한데 부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캐스팅을 시켜주긴 커녕 이대로라면 십중팔구 엎어지거나 나가리 될 걸 뻔히 알면서 감독 대접을 받으려는 건 사기다. 양아치는 되지 말자.
그래! 다시 한 번 도전하자! 마감을 연기했으니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삼진아웃 당한 시놉시스는 삭제해버렸다. 잊어버리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걸로 치자. 그리고 다시 한글 창을 열었다. 폭망 감독도 감독이고 영화판에서 구른 세월이 있는데 한낱 작가 지망생보다 못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년 영화 인생을 걸고 딱 일주일만 올인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노답인 건 주인공이다. 싸이코패스 주인공을 어떻게 호감형으로 바꾼단 말인가! 대안이 떠오르긴 커녕 또 다시 몇 년을 영화판 언저리를 빌빌대며 허송세월하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이거다 싶은 대안이 없는 채로 어거지로 쥐어 짜낸 각색 고는 계속 시원찮을 테고 영화사에서는 실망을 거듭하다 내가 뭘 하든 무관심해 질 것이고 그러다 결국은 방치되고 연락이 두절될 것이다. 나는 또 다음 영화사를 수소문하겠지만 아마도 나를 찾는 영화사는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대략 2년 쯤 걸리고 나면 폭망 후 12년간 영화를 못 만든 감독이 되는 셈인데 그런 감독은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구멍가게’같은 저예산 19금 떡 영화 연출 제안조차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구창한 작가에게 물어볼까?
어쩌면 원작자니까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다. 내가 아무리 절박해도 그건 아니지. 인간은 못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창한의 목숨과도 같은 작품을 훔친 것도 모자라 각색까지 시키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손가락은 이미 핸드폰에 저장된 창한의 번호를 검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