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턴 나만 잘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

038.

by Zinn


석 팀장이 건넨 시나리오 모니터 페이퍼를 받아들자 마자 손이 떨리며 트라우마 스위치가 켜졌다. 지난 10여년간 시나리오가 별로라고 까이기만 했기 때문이다. 캐릭터가 평면적이에요.. 전개가 작위적이에요.. 아이템이 올드해요.. 뻔해요. 식상해요.. 여자 관객들이 싫어할 것 같아요..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차분히 억누르며 천천히 읽어봤는데 지난 번 모니터와는 완전 반대였다.


장점이 한 페이지 가득했고 단점은 딸랑 한 줄인데 캐릭터가 비호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 호감형으로 바꿔달라는 게 다 였다. 딱히 단점도 아니었다.


“캐릭터를 호감형으로? 모호한데?”

“음.. 아무래도 주인공이 싸이코패스니까 관객들이 비호감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호감형 싸이코패스를 만들어달라는 거야?”

“가능하겠지?”
“생각은 해볼게.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미완성이고 대대적으로 각색할 예정이었으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혼자서 안 되면 각색 작가를 붙이면 되니까.”

“각색 작가는 필요 없는데?”


절대 필요 없다. 엔딩 크레딧은 ‘각본/감독 최경진’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참했던 지난 10년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외롭고 힘들잖아. 믿고 써 봐. 괜찮은 작가들 몇 있어. 도움이 될 거야.”

“이제와 각색 작가가 왜 필요하지? 나 못 믿어?”

“아이고.. 우리 감독님이 이렇게 까다로우신 분인줄 몰랐네.”

“아직 미완성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냐. 걱정 마. 완성도는 물론이고 싹 다 뜯어고쳐줄테니까.”

“싹 다? 절대 그러지 마. 우린 지금 이대로가 좋거든! 캐릭터만 호감형으로 바꿔주면 오케이야.”


당황스러웠다. 대대적인 각색을 통해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를 최경진 감독 오리지널로 환골탈태시키려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분위기였다. 캐릭터만 호감형으로 바꾸는 정도의 소소한 각색으로는 최경진 오리지널을 주장할 수 없고 그렇다고 창한에게 시나리오를 넘겨 받을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왜 이래? 선수끼리.. 캐릭터만 호감형으로 고친다는 게 말이 쉽지 한 두 씬만 고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알았어. 일단은 감독님이 무슨 말씀하시는 지는 알겠고 그러면 시간은 어느 정도 걸릴까? 대표님은 벌써 투자사에 시나리오 돌릴 준비 하고 있거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써둔 시나리오라서 예측이 안 되는 걸? 써 봐야 알 것 같아.”

“알았다. 그래도 생각해보고 대충 어느 정도면 되겠다 싶은 게 나오면 알려줘.”


석 팀장이 방에서 나가자마자 카톡 소리가 들렸다.


‘많이 바쁘실텐데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시나리오 읽느라 힘드시죠?’


구창한 작가의 카톡이었다. 5만원짜리 스타벅스 기프티콘과 함께였다.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창한의 귀에까지 내가 ‘가족사냥’을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어간 건 아니겠지?


밀리언 필름이라는 듣보잡 신생 영화사에서 ‘가족사냥’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창한에게 해 줄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만약에 들켰으면 어떡하지? 미안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나한테 넘기라고 해야 하나? 넘기긴 할까? 계속 이렇게 비밀로 진행하다 일이 커졌을 때 걸리면 신인 작가 작품을 훔친 감독으로 알려져 업계에서 매장당할 것이다. 네임드 감독이 그랬다간 백프로 기사까지 날 텐데 그나마 폭망 감독이라서 다행인건가?


역시 대대적인 각색 만이 답이다. 누가 봐도 최경진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싹 다 뜯어고쳐야 한다. 다행히 예전에 구상해두었던 캐릭터가 있다. 싸이코패스는 아니고 슈퍼 히어로인데 초능력만 빼면 ‘가족사냥’의 주인공으로 어울릴 것 같다. 비호감 싸이코패스 주인공을 내가 생각해 둔 호감형 히어로 캐릭터로 바꾸면 ‘가족사냥’은 완벽하게 최경진 오리지널로 거듭날 것이고 자연히 표절 의혹도 쏙 들어갈 것이다. 나중에 창한이 따지고 들면 미안한데 내가 쓰던 거랑 아이템이 겹쳤을 뿐이라고 하면 된다. 괜찮다. 다들 그러고 산다.


‘미안. 아직 못 읽음. 빨리 읽을게!’


창한에게 답톡을 보내고 모처럼 작업 모드에 들어가려는데 은행 어플 알림음이 들렸다. 확인해보니 밀리언 필름에서 천 만원이 입금되어 있었고 이어서 강 대표의 카톡이 왔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강 대표의 문자였다. 응원이라고 하는 걸 보니 격려금인 모양이다. 이런 돈은 고맙게 받으면 된다.


‘제가 더 감사하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로 유정에게 천 만원을 송금해주려다 꾹 참았다. 아직은 아니다. 나에게 여윳돈이 있다는 사실이 아내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지금은 작업에만 전념하자. 입금과 동시에 예술 혼이 불타오르며 나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가 마구 뿜어져나오려는데 바로 제동이 걸렸다.


‘근처에 왔는데 잠깐 들러도 돼요?’


혜나의 카톡이었다. 간만에 몰입해서 작업에 들어가려는데 산통이 깨졌고 잘못한 게 없는데도 불안 초조해졌다. 후회막심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 알았으면 혜나와 부적절한 관계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맺진 않았을 것이다.


‘미안. 회의중.’

‘캐스팅 회의중이요?’

‘아니. 끝나고 연락할게.’

‘연락 기다릴게요 감독님. 저 근처에요.’

‘오늘은 좀 그렇고 내가 다음에 연락할게. 안녕.’


혜나는 답이 없었다. 안녕이라고 보냈으니 설마 계속 기다리진 않겠지.. 그런데 계속 기다리면 어떡하지? 등골이 서늘해지며 식은 땀이 났다. 순순히 포기할 기세가 아니다. 캐스팅 안 해 주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다. 이제야 감독 대접 받으며 차기작 준비 좀 제대로 해 보려는데 삼류 여배우가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감독 나오라고 사무실 바닥에 떼굴떼굴 구르며 난리를 피우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을 것이다.


도저히 집중이 안 돼 커피나 한 잔 마시려고 탕비실에 갔는데 서연이 먼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혜나 때문에 축축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산뜻해졌다. 생각해보니 ‘가족사냥’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서연 덕분이니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뭐라고 말을 건네려는데 서연은 서운하게도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나랑 밀당하니? 생각해보니 ‘가족사냥’이 밀리언 필름에 노출된 이후엔 서연과의 접촉이 확연히 줄었다. ‘가족사냥’ 이전에는 내 담당 PD가 서연이어서 어지간한 얘기는 다 서연을 통해서 했는데 이제는 사소한 일이라도 무조건 석 팀장이 직접 내 방으로 와서 이야기했다.


차기작으로 대박이 날 감독님이시니 기획팀 막내 피디와 어울릴 급이 아니라고 배려를 해 주는 건 좋은데 예전처럼 회사에선 나에게 무관심하고 서연이랑 둘이서만 놀던 시절이 아주 잠깐 그리웠다.



***



‘가족 사냥’ 이후 사무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망해가는 듣보잡 신생 제작사 밀리언 필름을 살릴 구원투수이자 에이스로 등극한 것 같았다. 강 대표가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라지만 영화 한 번 제작해보겠다고 꼴아 박은 돈이 어지간한 서울 변두리 아파트 한 채 값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간 폭망 감독이라고 개무시하던 최경진이 뜬금없이 돈이 될 것 같은 시나리오를 들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독 대접을 받자 글도 잘 써지는 기분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은 고통 그 자체다. 하지만 나 정도 경력의 기성 감독에겐 남이 다 써 둔 시나리오를 내 버전으로 고치는 건 일도 아니다.


일이 잘 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열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난 열한 시였다. 이제는 굳이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지 않아도 시간이 잘 간다. 슬슬 집에 가려고 짐을 챙기는데 문 밖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인가? 한동안 대화가 없었으니 뭔가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걸 수도 있다.


똑똑.. 노크소리에 들어오라고 했더니 문이 열리고 석 팀장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김이 빠졌다.


“술 한 잔 할까?”

“누구랑?”

“둘이서.”


석 팀장은 어디선가 이미 1차를 끝내고 왔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내가 둘이서 뭔 술을 마시냐고 황당해하자 베시시 웃으며 캔맥주가 든 편의점 비닐 봉투를 들어 올렸다. 석 팀장은 40대 중반이지만 관리를 잘 해서인지 오늘따라 3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유부녀라서 영 내키지가 않았다.


“집에 가서 남편이랑 드세요.”

“남편 없어.”

“출장 갔어?”

“아니. 나 이혼했잖아. 몰랐지?”

“어.. 그랬구나.. 왜 말 안 했어? 아 먼저 유감이고..”

“유감은 무슨.. 사연 듣고 싶지?”


폭망 감독 시절엔 일절 사생활을 공유하지 않다가 ‘가족사냥’으로 잘 나갈 것 같으니 갑자기 친한 척인가? 괘씸해서 별로 듣고 싶진 않았으나 듣기 싫다고 하면 삐질 것 같아 예의상 듣고 싶다고 했더니 소파에 널부러져 하염없이 전 남편 욕을 늘어놓았다. 결정타는 남편의 외도였다는데 이상하게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이용해 자기 회사를 차리려는 야심이 느껴져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가족사냥’이 잘 되면 내가 회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하는 게 낫지 석 팀장이 차린 신생 회사에 고용 감독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 아니 잠깐.. 내가 제작사를 차려? 좋은 생각인데? 내가 제작사를 차리고 기획팀장으로 양서연 피디를 앉히는 거다.


내가 차릴 제작사에 석 팀장의 자리는 있을 수 없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직원으로 부리기엔 나이가 많아서 부담스럽다. 석 팀장이 내 말을 들을 리도 없고. 하지만 사람 일 모른다고 석 팀장에게 내가 모르는 카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이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곱게 하소연을 들어만 주었다. 석 팀장은 내가 자기의 과거사에 시큰둥하니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세를 고쳐 앉고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마감은 언제쯤이면 될지 생각해봤어?”

“한 달만 줘.”


석 팀장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딴엔 내가 자리를 옮겨서 2차를 가자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어딘지 모르게 서운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더 이상 예전의 폭망 감독 최경진이 아니다. 괜한 짓을 해서 석 팀장에게 발목이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양서연 피디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석 팀장의 은근한 유혹을 이겨낸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이제부턴 나만 잘 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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