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석 팀장을 따라 사무실로 올라오자 입구에 나와 있던 서연은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시다며 곧장 강 대표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어쩐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강 대표는 바깥 바람을 쐬고 와서인지 혈색이 좋아 보였다.
“네 덕분에요.”
“작품 잘 봤습니다. 아! ‘가족사냥’이요.”
“그냥 틈틈이 써 둔 건데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네?”
“‘구멍가게’는 없었던 일로 해 주시죠.”
“무슨 말씀인지..”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갔다. 분명 석 팀장은 강 대표가 ‘가족사냥’의 진가를 몰라볼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아닌 듯 했다.
“감독님만 허락해주신다면 ‘구멍가게’말고 ‘가족사냥’으로 함께 하고 싶습니다.”
“네?”
“이미 계약된 회사라도 있으신가요?”
“그건 아니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누구나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잖아요. 저에겐 ‘가족사냥’이 그 3번의 기회 중 하나입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강 대표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과는 180도 달랐다. 평소 은근히 깔려 있던 시건방진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 척일 수도 있겠지만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럼 ‘구멍가게’는 어떻게 되는 거죠?”
“서운하셨다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구멍가게’는 없었던 일로 해주시죠. 계약도 새로 하시고 원하시는 조건은 다 맞춰드리겠습니다.”
강 대표의 이런 저자세는 처음이었다.
“아.. 그게.. 음..”
내 시나리오도 아닌데 계약까지 하는 건 진짜로 선을 넘는 거여서 아무 대답 없이 미적거리자 강 대표는 초조했는지 구창한 작가가 나에게 모니터를 부탁한 ‘가족사냥’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이어갔다. 양심의 가책과 싸우느라 표정이 어두운 건데 강 대표는 내가 비싸게 구는 걸로 오해한 듯 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혹시 계약은 아니라도 이야기가 진행 중인 곳이 있나요? 석 팀장에게는 말 못하신?”
“아니요. 없습니다. 그냥 친한 지인들에게 모니터만 부탁한 정도에요.”
나도 모르게 긴장감을 조성한 셈이 되어 버렸다. 나와 친한 지인이라면 대부분 영화인들이므로 다른 영화사에 돌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강 대표는 내가 계약기간도 거의 다 끝나가는데 자꾸 ‘구멍가게’ 따위의 19금 떡 영화를 듣보잡 여배우나 데리고 찍으라고 압박했으니 ‘가족사냥’을 들고 다른 영화사에 가 버리겠다는 뜻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아직 미완성이라서요. 솔직히 양서연 피디에게도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미완성이 아니라 내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왜 이렇게 거짓말이 자연스러운 거지?
“미완성이라고요? 바로 촬영에 들어가도 될 정도였는데요? 아.. 역시 감독님이십니다. 정말 그동안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강 대표는 사극에 나오는 임금 앞의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거듭 사과를 했다. 바닥에 이마라도 찧을 기세였다.
“감동입니다 정말. 저는 진심으로 감독님과 이 작품 함께 하고 싶습니다!”
석 팀장에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그토록 꿈꿨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시나리오를 들고 혜성처럼 컴백! 모두가 내 시나리오에 열광하며 달려드는 바로 그 순간!
“말씀은 감사하고요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밀리언 필름이 괘씸해서 애간장을 태우고 싶다든가 석 팀장과의 부질없는 약속 때문이 아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그 시나리오는 내 시나리오가 아니라고 이실직고 하든가 구창한 작가에게 저작권이라도 넘겨 받아야 했다.
강 대표는 잘 부탁드리겠다고 거듭 고개를 조아렸고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 된 것 같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따가 약속 없으시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부담스러워서 사양하려는데 이미 근처 일식집을 예약해두었다고 해서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했다.
강 대표와의 면담이 끝나고 석 팀장에게는 뭐라고 해야 되나 고민이 됐다. 졸지에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석 팀장에게 “강 대표가 뭐래?” 정도의 톡은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보고해주길 기다리는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결국 석 팀장과는 아무런 소통 없이 저녁 시간이 됐다. 강 대표와 셋이서 저녁을 먹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싶었는데 저녁 자리엔 강 대표랑 둘만 갔다. 일 인분에 이십만 원 짜리 오마카세 집이었다. 강 대표는 정중하게 술을 따르며 다시 한 번 ‘구멍가게’는 잊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업계 사람들이 자기를 부잣집 아들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 다 안다고 그래서 더더욱 보란듯이 성공하고 싶다는 것이다. 영화사를 차리고 솔직히 지금까진 답이 안 보였는데 ‘가족사냥’을 읽는 순간 이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강 대표가 자꾸 비행기를 태워서 멀미가 났고 떨어지면 진짜 아플 것 같아서 두렵기만 했다. 역시 나는 죄를 짓고는 못 사는 스타일이다.
“혹시 생각해두신 배우는 있으신가요? 학교 선후배라든가.”
영화과 출신이다보니 연기하는 선후배가 있긴 하지만 딱히 함께 하고 싶은 이는 없었다. 얼굴에 분칠하는 것들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명 때부터 술 사주고 택시비 주고 평생 같이 가자고 약속도 하고 그렇게 챙겨준 배우들 중 스타가 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전화번호도 모른다. 당장 ‘꼴리는 영화’ 캐스팅 때 모두가 반대하는 걸 의리를 지킨답시고 출연시켜 준 배우들 중 몇몇도 영화가 망하고 나니 모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특히 현규. ‘꼴리는 영화’ 조단역으로 데뷔해서 이제는 글로벌 OTT 드라마에 주연급으로 출연할 정도의 탑스타가 됐지만 이제는 친하기는 커녕 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사이 아닌가.
“저는 학연 지연 같은 건 취급 안 하는 스타일입니다. 영화가 잘 되는 게 우선이거든요.”
“역시 훌륭하십니다. 사실은 석 팀장이 차민오 매니저랑 친하다고 해서요. 백연희라고 아시죠?”
“아니요. 석 팀장이 예전부터 발이 넓었어요.”
“‘가족사냥’주인공으로 차민오는 어떨까요?”
내 데뷔작에 조단역으로 데뷔해서 지금은 탑스타가 된 현규가 아니라 스타긴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로 몇 년째 흥행 실패 후 한 물 가기 직전의 차민오? 아.. 현규는 이제 캐스팅 물망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비현실적인 탑스타가 되셨구나.
“저야 감사하죠. 그런데 차민오라면 제가 민오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민오가 절 선택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말씀을요. 그래봤자 배우 주제에 무슨.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잖아요. 저는 감독님이 최우선입니다. 사실은 석 팀장이 민오에게 시나리오를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감독님이 허락해주신다면요.”
“허락하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감독님!”
내가 최우선이라니 빈 말이어도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민오라면 작년과 재작년 개봉작이 연이어 폭망하는 바람에 기세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캐스팅만 되면 투자가 보장되는 탑스타인데 아무리 석 팀장이 민오 매니저와 친하다고 해도 시나리오가 제대로 전달될 지는 의문이었다. 있어보이려고 괜히 해 본 말이겠지?
식사가 끝날 때쯤 강 대표는 자기가 자주 가는 바가 있다며 2차를 가자고 했지만 나는 집 안에 일이 있다고 뻥치고 도망나와 버렸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창한을 만나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했다. 창한의 시나리오를 내 시나리오라고 뻥을 치긴 했지만 아직 계약은 안 했으니 선을 넘은 건 아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카톡 창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자승의 톡이 왔다.
‘감독님! 가족사냥 넘 잘 읽었습니다. 이거 대박이네요. 조감독 할게요 연락주세요!’
모두까기로 유명한 자승까지 극찬이라니!! 이 정도면 ‘가족사냥’은 잘 쓴 작품임이 확실했다. 모두가 극찬하는 시나리오로 컴백하는 지난 10년간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왔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이게 다 창한 때문이다. ‘가족사냥’의 작가가 창한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나는 다시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추락할 것이다. 아니 생매장이다.
공동 작가는 어떨까 생각해봤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다들 내가 쓴 줄 아는 시나리오 덕분에 하루 아침에 예비 대박 감독으로 신분상승 했는데 뜬금없이 다른 작가와 함께 썼다고 하면 나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갈 것이고 남의 시나리오를 훔친 도둑놈 사기꾼으로 전락할 것이다.
설령 공동 작가의 존재를 모두가 납득한다 해도 나보다 젊고 잘 생기고 키도 크고 귀티 나는 창한이 공동 작가라면 십중팔구 ‘꼴리는 영화’ 감독 최경진은 아웃시키고 창한을 단독 각본에 연출까지 맡기고 싶어할 것이다. 요즘엔 감독도 잘 생기면 마케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창한을 오픈할 순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창한이 저작권을 넘길 리는 없으니 하루 빨리 ‘가족사냥’을 대대적으로 각색해서 최경진 오리지널로 만드는 것만이 답이다. 원작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훌륭한 각색이라면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이다. 마침 강 대표에게도 미완성이라고 했으니 많이 달라져도 이해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각색 작업에 들어가려다 웜업 차원에서 애널맨 블로그에 들어가 봤는데 비밀 덧글이 달려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난니맨이었다.
‘난 니가 누군지 알고 있다.’
애널맨이 최경진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폭망 감독 최경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가족사냥’이라는 차기작 크랭크인을 목전에 둔 예비 대박 감독 최경진이다.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간 다시 폭망 감독으로 아니 그 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구멍가게’ 감독으로도 실격이다.
***
소문은 빨랐다. 몇 년에 한 번씩 명절 카톡 정도나 주고 받던 매니저와 스태프들로부터 차기작 분위기가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축하 전화가 왔다. 당장이라도 사무실에 놀러오겠다는 걸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라고 말리느라 하루가 다 갈 지경이었다. 이러다 아무 일도 못할 것 같아 어지간한 연락은 다 무시하려던 와중에 절대로 그럴 수 없는 문자가 왔다. ‘꼴리는 영화’의 주인공 준철 형의 카톡이었다.
‘최감독 잘 지내? 난 좀 힘드네..’
카톡에 첨부된 사진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본 저녁 노을을 찍은 사진이었다. 안 그래도 준철의 연락은 ‘꼴리는 영화’ 폭망으로 인한 마음의 빚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는데 설상가상 준철이 보낸 카톡은 누가봐도 투신 자살을 암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