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석 팀장은 둘째치고 양서연 피디에게 실망이다. ‘구멍가게’가 강석현 대표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밀리언 필름을 다니고 있다고?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주 똑똑한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영화과 들어가서 감독 병에 걸렸겠지.
“아하.. 그래서 시나리오가 그 따위였구나?”
“대표가 정신 못 차리고 방에서 자기 글만 쓰고 있는 회사에 미래가 있을까?”
“왜 그러는 걸까?”
“만만하잖아. 개나 소나 글은 쓸 수 있으니까. 집에 돈은 있으니 자기 이름으로 된 영화가 극장에 걸리면 명예도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겠지. 그리고 사실 이건 나만 아는 얘긴데 ‘구멍가게’ 그거 자기 엄마 얘기야.”
“진짜? 강 대표 엄마가 구멍가게 사장님이셨어?”
“응. 구멍 가게부터 시작해서 건물주까지 올라간 거래.”
“그런 엄마를 주인공으로 19금 시나리오를 썼다고? 미친 놈 아냐?”
“꼭 자기 엄마 이야기라기보다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구멍가게 운영하는 걸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잘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19금으로 풀어낸 거겠지.”
예술가를 꿈꾸는 일반인들에겐 유난히 영화가 만만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미술은 언뜻 생각해봐도 진입장벽이 높고 오랜 기간 교육과 피나는 훈련이 필요하니 꿈도 못 꾸지만 영화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내가 만들어도 저거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졸작이 많으니 해 볼 만 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야 왜 강 대표가 그런 시나리오를 들이밀었는지 미스터리가 풀렸다만.. 노답이네. 이거 완전 그거네. 밀리언 탈출은 지능순? 넌 여기 망하면 뭐 할거야?”
“독립해야지. 마침 그럴 나이도 됐고.”
“나이는 이미 차고도 넘치지. 어떻게 독립할 건데?”
“니가 도와야지.”
“내가? 너를?”
“섭섭하게 왜 이래? 내가 믿을 감독이 너 밖에 더 있니?”
그제야 석 팀장이 둘만 따로 밥을 먹자고 한 이유를 알았다.
“내가 아니라 ‘가족사냥’을 믿는 건 아니고?”
“그게 그거지. 솔직히 난 좀 섭섭해.”
“왜?”
“나한테 제일 먼저 보여줬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 미안하다.”
“진짜 미안하긴 해?”
“조금은.”
“미안하면 믿을 수 있게 해 줘.”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석 팀장의 눈빛이 오늘따라 끈적끈적했다. ‘가족사냥’을 들고 밀리언 필름을 탈출하고 싶은 열망이 잘 전달되었다. 최경진 감독도 포함인 지는 모르겠지만.
“독립하는 거 돕고는 싶다만.. 이미 강 대표 보여줬다며?”
“니가 양 피디 고 년에게 먼저 보여줬으니까 어쩔 수 없이 넘긴거지. 세상에 비밀이 없잖니.”
“강 대표가 ‘가족사냥’ 좋다고 하면?”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까 걱정 마. 아무튼 나랑 가는 거 맞지?”
내 시나리오도 아닌데 덜컥 같이 간다고 했다가 진짜로 퇴사라도 할까봐 맞장구를 쳐주진 않았다.
“퇴사는 언제쯤?”
“내가 바보니? 창업 준비는 회사 다니면서 하는 거야. 투잡인 셈이지.”
“나가면 힘들텐데.. 회사 밖은 지옥인 거 알지? 영화판은 빙하기고.”
“끓는 물의 개구리 신세보단 낫겠지. 이젠 나이도 찼고 시간이 없어. 뭐든 해야 돼.”
같은 40대로서 이해는 한다만 역시 석 팀장 다웠다. 예전에 나와 썸을 탈 때도 양다리였다. 상대는 지금의 남편.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차고 넘친다. 내가 금방 감독 데뷔에 성공할 줄 알고 숟가락을 얹었는데 차일피일 늦어지자 기다리다 지쳐 다른 남자로 갈아탄 것이다.
“또 양다리야?”
“또라니. 말 이상하게 한다? 밀리언 필름에는 안 들키게 잘 준비할테니까 걱정 말고. 그나저나 마음에 둔 조감독은 있어?”
“음.. 자승이? 한 편 같이 해서 내 스타일을 알고 호흡도 잘 맞는 편이고.”
다른 건 몰라도 조감독은 내 편이어야 한다. 자승이가 비록 나이 먹고 머리가 굵어지고 감독 준비한다고 버릇이 없어지긴 했지만 ‘꼴리는 영화’ 조감독 시절엔 그 누구보다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자승이가 시나리오를 읽어달라고 할 때마다 군소리 없이 읽어주는 이유도 바로 그 때의 고마운 기억 때문이다.
***
점심을 다 먹자마자 석 팀장은 강 대표가 오후에 사무실에 들어올 수도 있다며 먼저 들어갔다. 나는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을 하면서 제발 조감독 좀 해 달라고 설득도 할 겸 자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 만나서 얘기 좀 하자는데 자승은 집에서 시나리오 집필 중이라며 미팅을 거부했다. 그럼 ‘가족사냥’이라고 시나리오 모니터 하나만 부탁하자고 하려는데 뜬금없이 까맣게 잊고 있던 인물에 대해 물어보았다.
“형 혹시 수아 씨 근황 알아요?”
“‘꼴리는 영화’에 나온 수아 씨?”
“네.”
“내가 그걸 알 거라고 생각하냐? 수아는 왜?”
“인스타를 열심히 했었는데 갑자기 계정이 폐쇄되고 카톡 프로필도 없어지고 전화 번호도 없는 번호라고 나오고.. 완전 사라져버렸어요.”
“설마.. 너 수아랑 잤냐? 이 새끼 이거.. 완전 여배우 킬러네.”
자승인 잘 생긴 건 아닌데 지금은 95키로그램에 육박하지만 한 때는 깡 마르고 키가 커서 나름 퇴폐미가 있는지 종종 자승이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수아가 딱 그랬던 모양이다.
“만나는 사이까지는 아니고요..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 술 한 잔 하고 인친이어서 서로 좋아요 눌러주는 사이였거든요.”
“너도 인스타를 해?”
“네.”
“계정이 뭔데?”
“그게 좀.. 프라이버시라서요. 이해해 주세요.”
수아도 아는 인스타 계정을 나에게는 안 알려준다고? 빈정이 상해서 욕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나라도 임 감독이 인스타 계정을 알려달라고 하면 꺼려질 것 같다.
“됐어. 니 인스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아. 수아는 신경 끄고. 그 정도면 이꼴저꼴 다 보기 싫다는 거네.”
수아를 생각하자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졌다. ‘꼴리는 영화’ 촬영 도중 투자사에서 뜬금없이 여배우의 노출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는데 만만한 여배우가 조단역이던 수아였다. 영화를 위해 노출이 필요하다고 가스라이팅을 시도했고 고맙게도 넘어가주었다. 넘어가 준 척일 수도 있지만.
“수아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 되는 거 알지? 어떻게든 대중에게 너를 그리고 우리 영화를 알려야 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너를 알리기만 하면 연기력이 받쳐주니 영화도 뜰 수 있을 거야.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알았어요. 대신 감독님이 저 책임지셔야 해요.”
“그래! 책임질게. 책임지면 되잖아! 나 믿고 시원하게 가 보자!”
나의 부탁 아닌 부탁에 수아는 시나리오에 없던 노출과 내친 김에 베드신까지 화끈하게 소화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수아를 책임지지 못했고 설상가상 쫑파티 땐 연애 한 번 하자는 실언까지 내 뱉고야 말았다.
“내가 쉬워 보여요?”
수아의 싸늘한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렸다. 수아가 그렇게 차가울 줄이야. 내가 수아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꼴리는 영화’ 개봉 며칠 전이었는데 수아는 그딴 영화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고 근황을 묻는 질문에도 시종일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다음 작품도 같이 하자는 말엔 아무 반응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그로부터 얼마 뒤 배우 활동보다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바로 그 인스타그램이 폐쇄되었다는 얘기다.
수아는 나의 흑역사다. 수아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수아의 인스타그램에도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다. 수아도 ‘꼴리는 영화’ 시절은 생각하기 싫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사냥’ 최경진 감독이라면? 됐다. 나 싫다는 배우는 나도 싫다.
“수아는 됐고 시나리오 모니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구멍가게’ 말고 이거라면 조감독 해 줄래?”
“뭔데요?”
“내가 옛날부터 틈틈이 써 둔 거 있어.”
“한 번 보내보세요. 내 꺼 집필 중이라 바로는 못 읽습니다. 한 번 집중 깨지면 오래 가거든요.”
“그래. 시간 날 때 읽어줘. 부탁한다.”
집중이 깨져서 바로는 못 읽는다고? 하 이 건방진.. 어이가 없었지만 자승의 ‘가족사냥’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 궁금한 터라 공손히 전화를 끊어주었다.
불현듯 수아가 난니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충분히 가능하다. 수아라면 분명 나를 싫어하는 걸 넘어 증오하고 있을 테니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 정도의 악플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내 감언이설에 속아 배우 인생을 망쳤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수아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근데 어떻게 연락을 하지? 찾으면 뭘 어떡하려고?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고? 아니면 용서해달라고? 악플 좀 지워달라고 하면 지워주려나? 악플을 지워주는 대신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꼴리는 영화’의 자기 노출과 베드씬을 먼저 삭제해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나저나 내가 난니맨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스토킹? 생각난 김에 네이버에서 수아의 필모그래피를 검색해보았는데 아예 검색이 되지 않았다. 본인이 네이버 측에 삭제 요청을 한 것이다. 설마 죽은 건 아닐테고.. 안 죽었으니까 ‘꼴리는 영화’에 악플을 달았겠지.
어쩌면 수아가 아니라 수아 주변인의 소행일 수도 있다. 수아의 성격상 뒤에 숨어서 악플 테러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수아를 아끼는 누군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수아를 짝사랑하는 찐따 같은 애가 수아를 대신해 나를 응징하려는 것이다. 뭐가 됐건 수아의 마음을 풀어줘야 난니맨 사태도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줘야 할 지 모르겠어서 갑갑한 와중에 석 팀장에게 카톡이 왔다.
‘대표님 오셨다. 언제 들어와?’
‘십분 뒤.’
산책 코스를 밀리언 필름 쪽으로 바꿔 10분 쯤 걷자 석 팀장이 건물 앞에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석 팀장은 나를 보자마자 잽싸게 달려오더니 으슥한 건물 뒤로 끌고 갔다.
“왜 이래?”
“강 대표가 ‘구멍가게’말고 ‘가족사냥’ 하자고 하면 어떡할거야?”
“무슨 소리야? 싫어할 거라며?”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지. 거절할거지?”
“당연하지. 대표가 방 구석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만 쓴다며?”
“너만 믿는다.”
“믿어. 내가 폭망은 했어도 바보는 아니야. 곧 망할 회사에 시나리오를 넘길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