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

034.

by Zinn


나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자세까지 고쳐 앉는 걸 보니 자기 말고 누구에게 보여줬는지 어지간히 애간장이 타는 모양이었다. ‘가족사냥’이 그렇게 대단한 시나리오였나?


“심동민.”


잔뜩 경직되어 있던 석 팀장이 나의 대답에 쓴 웃음을 지었다. 다른 잘 나가는 영화사나 프로듀서에게 보여준 게 아니라 17년차 감독 지망생 심동민에게 보여줘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담당 프로듀서인 자기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지 않아 서운한 모양이었다.


“뭐지? 그 웃음은? 동민이 무시하냐?”

“무시하는 건 아니고.. 참 대단한 우정이다 싶어서.. 니들 진짜 오래 간다.”


옛날에 써 둔 거라고 했으니 계약 위반은 아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내가 잘못한 상황은 아니니 당당해도 될 것 같았다.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꼬치꼬치 묻는 거야? 무슨 죄를 지은 건지 이유라도 좀 알자!”

“감독할 생각으로 써 둔 거겠지?”

“당연하지.”


내가 쓴 건 아니지만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면 자기가 감독하려고 쓰지 남 주려고 쓰진 않는다. 구창한 작가 겸 감독 지망생도 그랬을 것이다.


“일단 이거 나한테 파일로 보내줘. 그리고 ‘구멍가게’ 말고 이걸 우리 회사랑 하는 건 어때?”

“파일로 보내줄 수는 있지만 ‘구멍가게’는 어쩌고?”

“대표님과 이야기 해 봐야겠지만 이거라면 무조건 될 것 같아서 그래. 너 내가 ‘덱스터’ 좋아하는 거 알지? ‘가족사냥’이 ‘덱스터’보다 괜찮아. 최고야!”

“에이.. 그건 아니다. ‘덱스터’보다 좋을 수는 없지.”

“좋다니까 그러네. 진심이야.”

“대표님은 뭐라시는데?”

“아직 안 보여드렸지. 최 감독님 허락 없이 그럴 순 없지.”


맨날 야! 너! 하다가 최 감독님이라고 불러주니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대표님에게 보여드리는 건 최 감독님 컨디션 체크와 컨펌 다음이야.”

“그럼 이제 보여드리겠네?”

“정말 보여드려도 괜찮아? 이거라면 내가 20년 영화 인생을 걸고 메이드 시킬 자신이 있거든.”

“응 괜찮아.”

“밀리언 필름에 기회를 주는 거야?”

“대표님이 좋다고도 안 했는데 무슨 기회를 줘.”

“대표님이 싫다고 하면 어쩔거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해. 복잡하게 굴지 말고.”

“아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피디들 보는 눈도 있으니 일단 대표님에게 보여는 드릴게.”


석 팀장이 말문을 닫음과 동시에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서연이 테이크 아웃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석 팀장과 독대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서연의 눈빛이 마치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종종 접했던 잘 생긴 남자를 바라보는 여성 특유의 바로 그 황홀한 눈빛이었다.


내가 그 정도로 잘 생긴 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차기작 크랭크 인을 목전에 둔 대박 감독님으로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가족사냥’이 내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해명할 타이밍은 지나 버렸다. 창한이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웠다.


석 팀장과의 미팅이 끝나고 감독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창한이 보내준 파일을 열어 문서를 작성한 날짜를 오늘로 수정하고 마지막 저장한 사람 이름을 최경진으로 수정한 뒤 석 팀장에게 이메일로 전송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석 팀장의 카톡이 왔다. 강 대표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드렸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다 읽고 오시겠다고 했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강 대표가 싫다고 하면 자기가 밀리언 필름 때려치우고 독립을 해서라도 메이드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나 믿지?’


석 팀장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졌다. 애초에 밀리언 필름 그 누구에게도 시나리오를 읽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다. 이게 다 서연 때문이다. 난 그저 출력을 부탁했을 뿐이지 석 팀장에게 보여주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내가 보여줬지. 거짓말이 들킬까봐 불안 초조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석 팀장과의 카톡을 훈훈하게 마무리짓고 있는데 동민에게도 카톡이 왔다.


‘누가 쓴 거야?’

‘알아서 뭐하게. 어떤데?’

‘누가 썼냐니까?’

‘나.’

‘장난 치지 마.’

‘내가 썼으니까 너한테 모니터를 부탁했지. 남이 쓴 걸 뭐하러 보내?’

‘축하한다. 드디어 해냈구나.’

‘본론만 말해. 어땠는데?’

‘분하지만 훌륭해. 니가 쓴 것 같지 않을 정도야. 솔직히 못 믿겠어. 그런데 이거라면 메이드 될 것 같다. 다시 한 번 축하할게.’


동민이 내 시나리오에 대해 이 정도로 호평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물론 ‘가족사냥’이 내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읽는 사람마다 호평 일색이니 비록 내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목에 힘이 들어가며 폭망 감독에서 전도유명한 신인감독으로 레벨 업 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라면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동민이 뭐라뭐라 극찬하는 톡을 연달아 날렸는데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므로 읽씹하고 핸드폰으로 창한의 시나리오를 열었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읽으려니 글자가 너무 작고 눈이 침침해서 읽히지가 않았다. 집에 가서 출력해서 읽을까 했지만 회사 프린터가 있으니 굳이 돈 아깝게 집에서 출력할 이유가 없다. 내일 회사에서 읽어야지.


그나저나 창한에게는 뭐라고 모니터를 해 줘야 되나. 이젠 모니터가 문제가 아니겠구나. 해명을 해야 되나? 내 시나리오라고 거짓말 할 의도는 없었다는 변명? 아니면 나에게 시나리오를 넘기지 않으면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는 협박? 아니면 잘 구슬려서 조용히 시나리오를 넘겨받는 가스라이팅? 어느 하나 쉬울 것 같지 않았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내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말이 되는 건 나도 이런 거 쓰고 있었는데 아이템이 겹쳤을 뿐이라는 우연이었다. 원래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는 법이다. 하루 빨리 창한의 시나리오를 우라까이해서 새로 하나 써 둬야겠다. 나중에 표절이니 뭐니 따지면 옛날에 써 둔 건데 그저 아이템이 겹쳤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



다음 날 회사에 오니 책상 위의 컴퓨터가 바뀌어 있었다. 원래 있던 컴퓨터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번 컴퓨터는 최신형에 훨씬 더 빠릿빠릿했다. 시중에 나온 어지간한 게임은 다 돌아갈 정도의 고사양이었다. 시나리오 한 편 잘 썼다고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나? 그러고 보니 방에서 나는 냄새도 고급진 게 뭔가 달랐다. 왜 이런지 알아보려고 둘러보니 창가에 못 보던 방향제가 놓여 있었다.


감독 대접이 제대로였다. 출근하길 잘 했다. 에어컨이 빠방하고 공짜 커피와 프린터에 직원들도 내가 나타날 때마다 뭔가 시켜주길 바라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만 던져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줄 기세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폭망 감독에서 대박 직전 감독으로 거듭 나 있었다. 이제 ‘가족사냥’만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우라까이하면 진정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그러려면 일단은 읽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읽히지가 않았다. 남의 창작물을 훔치면 안 된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갔다. 그래. 어차피 ‘가족사냥’을 연출할 것도 아니니 서연이나 재웅에게 줄거리 요약을 부탁하려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재웅이 ‘가족사냥’의 줄거리 요약과 씬 리스트를 정리한 페이퍼를 갖다주었다.


“우와. 땡큐!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무 고마워.”

“무슨 말씀을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걸요. 감독님.”


재웅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간 뒤 줄거리 요약본을 읽어보었다. 별 거 없었다. 싸이코패스가 평범한 4인 가족의 가장을 죽이고 남은 가족을 차지하는 이야기였는데 이게 뭐 그리 대수라고 좋다고 난리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이 정도 이야기라면 충분히 우라까이를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슷한 이야기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수십 편은 될 듯 했다.


어떤 식으로 각색할 지 대충 그림이 그려져서 슬슬 작업에 들어가려는데 석 팀장이 둘이서 점심을 먹자고 불렀다. 보통 점심은 기획팀과 함께 먹는데 둘만 먹자고 하는 걸 보니 따로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간만에 유부녀랑 둘이서 밥을 먹으려니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석 팀장이 과거에 나와 썸을 탔던 건 내가 감독으로 잘 풀릴 줄 알아서였을 것이다. 설마 ‘가족사냥’을 보고 내가 잘 될 것 같으니까 다시 썸을 타고 싶은 걸까? 뭐 싫지는 않다만 유부녀는 사절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석 팀장은 나와 썸을 타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회사를 나와서 식당에 들어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줄창 강 대표 욕만 했다. 회사 직원들과 있을 때와는 전혀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이제야 내가 아는 석 팀장 다웠다.


“여기는 글렀어.”

“나 여기 출근한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김 빠지게 왜 그래?”

“강 대표는 영화사 대표를 하면 안 될 사람이야. 그럴 자격도 없고.”

“영화사 대표가 별 거야? 무슨 자격이 필요한데?”

“다른 건 몰라도 제작보다는 본인의 감독 데뷔에만 관심이 있는데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까? 길어야 3년 본다.”
“강 대표가 감독 지망생이었어?”

“그렇다니까! 맨날 사무실 나와서 뭐 하는 지 알아?”

“영화 보나?”

“대표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 시나리오 쓰신단다. 에휴. 그럴 거면 영화사를 차릴 게 아니라 스터디 카페나 다닐 것이지.”

“에이.. 그러다 말겠지. 원래 글 쓰는 게 제일 쉬워 보이잖아.”

“나도 그러다 말 줄 알았으니까 답답한 거지.”

“냅둬. 취미로는 나쁘지 않잖아?”

“취미로 끝날 것 같으면 내가 안 이러지.”

“설마.. ‘구멍가게’가?”

“맞아. 강 대표가 쓴 거야. 강 대표가 대충 후려 갈긴 걸 기획팀이 달라붙어서 시나리오로 만든 거고. 그 다음은 이현철 감독이 각색하다가 도망갔지.”


이제야 밀리언 필름에서 왜 그렇게 초짜가 쓴 것 같고 싼 티 나는 19금 떡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는지 미스터리가 풀렸다. 돈은 있다고 했으니 충분히 ‘구멍가게’보다는 괜찮은 시나리오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창립 작품이니 신중해야 할 텐데 19금 떡영화 ‘구멍가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창립작으로는 적절해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강 대표가 직접 쓴 작품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보아하니 주변에 아닌 건 아니라고 직언을 해 주는 직원도 없는 듯 했다. 석 팀장도 그럴 성격은 아니고.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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