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데뷔 전엔 끝나지 않는 망생이 라이프

032.

by Zinn


시나리오 스터디가 즐거운 나이가 있다.


이십대 후반에서 늦어도 삽심대 초반까지. 영화라는 같은 꿈을 꾸는 동료들과 모여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합평이 끝나면 자리를 옮겨서 술을 마시고 니가 맞네 내가 맞네 토론하고 티격태격하고 그러다 눈이 맞으면 연애도 하고..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언젠가는 되겠지 넋 놓고 있다 보면 3~5년은 금방이다.


시나리오 공모전은 매년 열리니까 내년에는 당선 될 것 같지만 냉정하게 잘 생각해보고 영영 안 될 것 같거나 선배 당선자들의 근황을 조사해보고 당선 돼도 별 게 없겠다 싶으면 하루 빨리 포기해야 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다 나이만 먹으면 그 때부턴 할 일이 없어서 죽기 전까지 망생이 짓만 해야 하는 울며 겨자 먹는 현실이 펼쳐진다.


동민이 딱 그 꼴이다. 나는 안 될 것 같다 싶을 때 바로 연출부로 노선을 변경한 덕분에 공식적으로는 망생이 인생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이 점은 임 감독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공모전 떨어지면 망생이 생활 접는다는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 죽기 전엔 안 끝날 것 같다.”

“동감. 망생이 라이프는 죽기 전엔 끝나지 않지.”


동민과 나는 공모전에 당선이 되고 데뷔를 한다 해도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달라질 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힘만 빠지니까. 만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맨날 하는 뻔하고 답도 없는 대화를 나누다보니 가슴 한 켠이 갑갑해왔다.


“야. 망생이 생활 그만 포기하고 내 영화 조감독이나 하는 건 어때? 간만에 현장 경험하면서 감도 찾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글만 쓰는 것보단 집필에도 도움이 될 걸?”

“싫어.”

“왜 싫어?”

“신춘문예 준비해야 돼.”

“소설도 써?”

“아니. 신춘문예도 시나리오 받는 데 있어.”

“상금은 얼만데?”

“삼백만원.”

“삼천만원?”

“아니 삼백만원.”

“시나리오 공모전 상금이 삼백만원이라고?”

“응. 신춘문예잖아. 돈보다 명예지.”

“오케이.”


그래. 애초에 동민이 조감독 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임감독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듯 나도 동민에게 도움을 되어주면 어떨까 싶었는데 이런 식이면 데려와봤자 나만 고생이다. 망생이 따위를 상전으로 모시고 일하고 싶진 않다.


“넌 거기서 얼마 받고 일하냐?”

“삼천만원.”

“감독료가?”

“아니 각색료. 감독 계약은 각색 하는 거 봐서 하기로 했어.”

“너무 비굴한 거 아니냐? 최소 1년은 하는데 오천은 받아야지. 그래도 기성 감독인데 그런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그럼 각색고 맘에 안 들면 감독 계약 안 해주는 거야?”


동민은 막 분개하면서 그딴 회사는 당장 때려 치우라고 되지도 않는 오지랖을 떨었다. 아니 니가 돈 줄 거야? 지 앞가림이나 잘 할 것이지. 망생이 생활을 너무 오래 해서 감을 잃은 것이다. 딱히 해 줄 말이 없어 가만히 있자 혼자서 씩씩거리다가 뜬금없이 혜나 이야기를 꺼냈다.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솔직히 말해주라. 너 혜나 씨랑 잤니?”

“안 잤다고 했잖아. 왜 자꾸 물어봐? 누가 나랑 혜나 씨랑 모텔 들어가는 거 보기라도 했대?”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지만 혜나랑 잤다고 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혜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동민이 나와 혜나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혹시 혜나에게 자백을 받고 나와의 우정을 시험하기 위해 물어보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동민은 그럴 놈은 아니다.


“잤냐니까?”

“아니라고.”


동민과 나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어쩐지 거짓말이라는 눈치를 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동민은 내 말을 믿고 싶은 듯 했다.


“고맙다.”

“뭐가?”


혜나와 안 잤다고 거짓말을 해줘서 고맙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알고 있는 건가? 어쩔 수 없다. 한 번 거짓말을 했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자. 공모전 탈락의 슬픔을 반으로 나누고 우월감을 느끼려고 불렀지만 그냥 찝찝하기만 했다. 괜히 불렀다. 당분간은 안 봐야겠다.


그나저나 나도 신춘문예나 내 볼까? 상금 삼백이면 경쟁률도 낮을 것 같은데.. 나야말로 돈보다는 명예가 급하잖아? 떡 영화 감독이지만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자라면 과거 세탁으로 딱인데? 영양가는 1도 없는 만남있었지만 의외로 뭐 하나 건졌다!


동민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심쿵했다. 설마 공모전에서 내 시나리오를 괜찮게 본 후 작가와의 미팅을 원하는 제작사의 전화일까? 번호가 02로 시작하는 걸 보니 사무실 전화임이 분명했기에 감독다운 점잖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경진 감독님 핸드폰이죠?”


최경진 감독님?


최경진 감독님을 찾는 전화라면 언제든 대환영이다. 이 전화 한 통이 꿈에도 그리던 차기작으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장난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듣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톤이 중후한 걸 보니 영화사 대표나 최소 이사 급일 확률이 높았다.


“네.. 그런데요.”


멀쩡한 감독 느낌을 주려고 최대한 차분하고 점잖은 톤으로 대답했다. ‘꼴리는 영화’가 데뷔작이다보니 그런 제목에서 연상되는 느낌의 영화 밖에 못 만드는 감독이라는 이상한 선입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제대로 보고 남들이 캐치 못한 가능성을 알아보고 전화를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저로 말씀드리자면 감독님 영화를 괜찮게 본 사람입니다. 다음 작품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자기 소개가 이상했다. 내 영화를 괜찮게 본 건 고마운데 보통 이름이나 소속을 얘기하지 않나? 어쩐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장난 전화 같았다. 만약 동민이 내 앞에 없었다면 동민이 목소리를 변조해서 장난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세요?”

“네? 우리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아..”

“장난 전화는 아닙니다만..”


장난 전화 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점잖고 올드해서 소름이 끼쳤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우리는 모르는 사이라니까요.”


차라리 장난 전화가 낫다. 미친 놈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는 번호로 최경진 감독을 찾는 전화가 왔다고 잠깐이나마 심쿵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빨리 대박나서 매니저를 두던가 해야지.


“모르는 사이인 건 알겠는데요 누군지는 알아야 통화를 하지 않을까요?”

“감독님 다음 작품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어서 전화드렸고요 언제쯤 시간 괜찮으실까요?”


이 놈은 진짜라는 감이 왔다. 이른 바 찐 광기?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한데 제가 감독 계약이 되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만.”

“그런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져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전화를 걸어서 확 욕을 싸지르고 싶지만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자제해야 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모르는 사이에서 악플을 남기는 사이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지금 악플 테러라도 당했다간 평점이 3점대로 내려갈 지도 모른다.


일단은 어디서 건 전화인지 번호를 검색해보았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어디 번듯한 영화사의 전화 번호라면 얘기가 다르다. 바로 다시 전화해서 방금 전에 전화주신 최경진 감독인데 말씀드렸던 감독 계약은 곧 끝날 예정이오니 다음 작품 상의도 드릴 겸 편한 시간에 사무실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번듯한 영화사의 전화 번호는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는 극과 극인 변두리 동네의 프랜차이즈 치킨 집 전화 번호였다. 한 때 영화를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치킨 집을 운영하고 있는 전직 영화인의 전화로 추정되었다. 만나봤자 별 볼 일 없을 게 뻔하다.


전직 영화인과 폭망 감독. 우리는 만나면 안 되는 사이다.


다시는 모르는 전화번호가 떠도 심쿵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번듯한 영화사에서 나에게 작품을 의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번듯한 영화사 직원이라도 10년 전에 개봉과 동시에 폭망한 ‘꼴리는 영화’ 감독 최경진을 찾진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폭망 후 10년이나 지났는데 왜 이런 전화가 왔지? 심동민 같은 망생이랑 어울리니까 루저가 꼬이는 건가? 내가 실수한 건 없지만 혹시나 해서 내 영화 평점을 검색해보니 다행히 악플은 달려있지 않았다. 잠깐 욱했지만 예의 바르게 끊은 건 잘 한 일이다.


“누군데?”


전화를 끊고도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동민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안 알려주네.”

“장난 전화야?”

“그런 셈이지. 유명세라고나 할까? 기성 감독은 어느 정도는 공인이잖아? 최경진 감독님을 찾는 모르는 전화가 종종 오곤 해. 그나저나 넌 혜나씨랑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마음 있으면 남자답게 고백을 하든가!”

“모르겠다.”

“쉽지 않을 걸. 혜나 씨는 그래도 여배우야.”

“누가 뭐래?”


동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조만간 또 보자는 말도 없이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동민과 동급이 된 듯한 우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우울함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슬슬 밀리언 필름 사무실에 혜나를 불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미쳤지.


만약 사무실에 CCTV라도 달려 있었다면 어쩔 것인가! 폭망 감독이 사무실에 삼류 여배우를 데려와서 이상한 짓 했다는 소문이라도 났다간 ‘구멍가게’조차 못 만들게 될 것이다.


그나마 여기에서 그치면 다행인데 더 나아가 동민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어갔다간 치정 사건의 주인공이 되거나 우정과 완전범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보니 집에 와서도 꿈자리가 뒤숭숭해져 잠을 설쳤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사무실에 나갔는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특히 나를 바라보는 양서연 PD의 표정이 범상치 않았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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