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에 쓴 시나리오를 매년 제목만 고쳐서 응모 중

031.

by Zinn


폭망 감독 주제에 후환 걱정은 사치다. 어차피 당분간은 잘 나갈 일도 없을 것이다. 차기작도 기약이 없다. 밀리언 필름에선 안 될 것이다. 여기선 서연만 건져도 남는 장사다. ‘구멍가게’는 대충 회의만 참석하면서 캐스팅 진행 상황만 두고봐야겠다. 제대로 된 배우가 출연할 일은 없으니 배우 핑계로 거절하기 위해서다.


‘유리아’를 주인공으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차라리 흑화한 혜나가 낫다. 그리고 내가 누구 좋으라고 온갖 험한 꼴을 감내하며 떡 영화를 또 만드나. 그런 건 안 만드는 게 낫다. 밀리언 필름과의 계약 기간은 얼마 남지도 않았고 끝날 때까지 버티는 건 일도 아니다. 대충 시나리오 고치는 척 하면서 시간만 끌어야겠다.


‘구멍가게’ 따위에 내 소중한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 잡일은 조감독에게 맡기고 난 내 오리지널 시나리오와 서연과의 라포에 전념할 것이다. 빨리 조감독이나 구해달라고 해야겠는데 조감독으로는 여러모로 내 사정을 잘 알아줄 자승이 말고는 대안이 없다. 조감독 딱 한 편만 더 하라고 내일 다시 연락해봐야지.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감독으로 잘 나갈 일도 없다고 생각하니 도대체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뭘 한 건지 한심하고 너무너무 쪽팔렸다. 쪽팔림은 나누면 반이 된다. 쪽팔림을 나누기엔 뭐니뭐니해도 나보다 못난 동민이 딱이다. 동민은 감독 지망생임과 동시에 공모전 지망생이기도 하다. 졸업과 동시에 거의 모든 공모전에 꼬박꼬박 작품을 응모했지만 당연히 당선 경력은 없다.


이번 시나리오 공모전에서도 동민의 이름은 수상자 명단에 없으니 지금쯤 나처럼 쪽팔림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동민은 내가 응모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동민을 불러내서 위로하는 척 하면서 약을 올려야겠다. 전화하니 바로 받았다.


“왜?”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무슨 일 있어?”

“없다.”

“설마 공모전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니겠지?”

“발표났어? 떨어진 줄도 몰랐네.”


나는 심동민이 이미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운 내라. 심사위원들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거야.”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야 너 전화 잘 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내일 시간 돼?”

“시간이야 되지. 사무실 놀러오려고?”

“응. 주소 찍어줘.”


전화를 끊고 동민에게 주소를 보낸 뒤 책상 위가 허전해서 뭔가 했는데 서연이 출력해서 갖다 준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누가 이면지인줄 알고 버렸냐? 아니면 유출?


덜컥 겁이 나서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연에게 톡으로 내 책상 위에 있던 구 작가의 시나리오 누가 가져갔냐고 물어보니 석 팀장이 가져갔다고 했다. 어디론가 유출됐다가 아이템을 도용당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구 작가를 두 번 죽일 순 없다.



***



동민은 점심 시간 한참 전에 사무실 근처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지만 올라오라고는 하지 않았다. 영화사 직원들에게 동민의 존재를 알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17년차 감독 지망생이라고 해야 하는데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나까지 동민과 동급으로 볼까봐서이다. 17년차 감독 준비생이자 만년 공모전 중독자가 친구라는 사실을 알면 나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질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서연에게만큼은 감독 지망생과 어울리는 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사무실로 올라오겠다고 할까봐 얼른 1층으로 내려가서 저 멀리 동민이 보이자마자 잽싸게 근처 부대찌개 집으로 데려갔다.


“왤케 일찍 왔어?”

“지하철 덜 붐빌 때 움직여야지.”

“물어본다는 게 뭐야?”

“밥부터 먹자. 법카 있지?”


법카로 부대찌개를 사 주고 부대찌개 집보다 회사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동민은 가까운 카페로 가지 왤케 멀리 가냐고 투덜댔다. 나는 커피가 맛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회사 근처 카페엔 회사 사람들이 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동민은 공모전 탈락 사실 확인 후 자학 모드였다.


“내 인생 마지막 공모전이었는데..”

“그 얘기 한 지 십년 넘지 않았냐?”

“그랬지..”

“만약 누군가 10년 전의 너에게 앞으로 너는 10년 내내 공모전에 응모하는데 계속 떨어지기만 할 거라고 얘기해주면 어떡할거냐?”

“닥쳐. 넌 꼭 내가 떨어졌다고 하면 그 소리 하더라? 너는 어떡할건데? 20년 전의 너에게 10년 뒤에 데뷔하는데 폭망하고 10년 동안 차기작을 못 만든다고 얘기해준다면?”

“내가 먼저 물어봤으니까 니가 먼저 대답해야지.”

“그만 하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재미도 없고 기운만 빠지고.”

“흠흠.. 이번엔 뭐 냈어? 설마 또 그거 낸 건 아니지?”


동민이는 언제 썼는 지도 모를 시나리오를 십여 년째 매년 제목만 고쳐서 응모 중이다. 나쁜 선택은 아니다. 언젠간 동민의 시나리오를 알아보는 심사위원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올해가 마지막이라 했지만 백프로 내년에도 낼 것이다. 동민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동민이 공모전에서 탈락한 이야기를 했으니 공평하게 나는 자승에게 조감독 제안했다 까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나리오도 못 쓰는 주제에 무슨 감독을 한다고 어이가 없네 어쩌구 저쩌구 자승의 뒷담화를 깠는데 맞장구를 쳐 줄 줄 알았던 동민은 예상 외로 자승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럴 만 하지. 자승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조감독 하고 싶겠냐. 우리 다 감독하려고 영화과 온 거잖아.”

“감독은 아무나 하냐? 기껏 지 생각해서 조감독 일 자리라도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니가 이해해라.”

“이해 못하지.”

“너도 조감독 하기 싫다고 임 감독님이랑 의절한 거잖아.”


말문이 막혔다. 동민이 이래서 안 되는 거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줘야 할 때가 있는 법인데 동민의 사전에는 맞장구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소리만 하다가 옥사할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임 감독과 의절한 건 꼭 조감독이 하기 싫어서는 아니다. 너무 오래 같이 지내다 보니 점점 공과 사의 경계가 무뎌지며 무슨 조선시대 노비 부리듯 오만가지 잡일을 다 시켰기 때문이다. 용돈이라도 적당히 챙겨줬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자기 말 잘 들으면 언젠가 감독 데뷔 시켜주겠다는 게 당근의 전부였다.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지가 뭐라고.


갑자기 잊고 있던 임 감독과의 더러운 기억들이 떠올라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동민과 입씨름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니 슬그머니 뒷담화의 대상을 박미나로 바꿔보았다. 동민도 박미나에 대한 감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숙이가 그렇게 잘 나가?”


박미나 얘기를 꺼내자마자 대뜸 지숙이라는 박미나의 개명 전 이름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이제야 제대로 된 공공의 적이 등장했구나 싶었다. 박미나의 원래 이름은 지숙이다. 하지만 지숙이라는 이름은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 2학년 때인가 휴학 후 6개월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면서부터는 지숙 말고 미나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착한 아이들은 지숙의 부탁대로 박미나라고 불러주었지만 나와 동민을 포함한 몇몇은 꿋꿋이 지숙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엄연히 지숙이라는 부모님이 지어준 한국 이름이 있는데 미나라는 국적 불명의 이름으로 불러달라니 기도 차지 않았다. 이름이 장난이야? 사실은 나도 지숙이를 박미나라고 불러준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데뷔작이 폭망하지만 않았어도 계속 지숙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마도 지숙이는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부탁한 시나리오에 대해 혹평을 퍼부은 것일 수도 있다. 지숙이는 대학 때도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빨랐다. 지금은 사회 생활을 했으니 더 업그레이드 됐을 것이다. 내가 지숙이 얼마나 잘 나가는지에 대해 브리핑을 해 주자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지숙이에 비하면 우리는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존재들이겠지?”

“야 우리라니! 난 그래도 데뷔는 했잖아. 너는 몰라도 나는 지숙이 발가락의 때는 될껄?”

“글세다. 안 하느니만 못한 데뷔였다고 본다. 폭망 감독보다는 감독 지망생이 낫지. 긁지 않은 복권인거잖아? 그리고 공모전에 당선만 돼 봐라. 바로 몸값 오르면서 여기저기서 엄청 찾을 걸? 폭망 감독은 그럴 일 자체가 없잖아.”


순간 한 소리 해 주려다가 꾹 참았다. 이 놈은 이래서 손절 저 놈은 저래서 손절하다보니 이제는 주변에 친구가 거의 남지 않았다. 아무 용건 없이도 편하게 불러낼 수 있는 친구는 이제 동민 뿐이다. 동민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이 타이밍에 발끈했다간 우월감을 느끼며 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 동병상련, 유유상종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우정은 시한부다. 동민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는 날 또는 내 차기작이 극장에 걸리는 날 끝날 것이다.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본다. 공모전 당선이나 차기작 개봉 같은 사건이 아니라도 점점 할 말이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잘 나가는 친구와는 카톡 하나만 주고 받아도 보람있고 뿌듯한데 동민과는 만나면 만날 수록 무기력해졌다. 일 없이 만나는 것 까진 좋은데 맨날 시나리오 공모전이나 지원 사업 소식 아님 서연들 뒷담화만 까다보니 헤어지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니가 부러워. 폭망했지만 데뷔도 했고 감독 방도 있고..”

“그러면 잘 써 봐. 잘 쓰면 다 해결돼.”

“쓰고 있어.”

“제목만 고치는 거 말고.”

“진짜 쓰고 있어.”

“뭐 쓰는데?”

“공모전에 냈던 거 고치고 있는데 완전 대공사여서 신작이나 다름없어. 이번에도 안 되면 정말 접는다. 내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내보려고.”


공모전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십여년 째 듣고 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주었다.


“이제 그건 접고 새로 써. 아님 보여줘봐. 진짜 신작이나 다름없는지 견적 내 줄게.”

“됐어. 니 얘기 들으면 힘만 빠져.”

“내 얘기는 힘 빠지고 시나리오 스터디 지망생들 얘기 들으면 기운이 나냐?”

“그냥 지망생들은 아니지. 대부분 공모전 당선이나 제작사 계약 경력은 있으니까.”

“그래봤자 지망생이지. 맨날 망생이들끼리 스터디만 하면 뭐 하냐? 지겹지도 않냐? 필드의 현역 영화인 얘기를 들어야 할 거 아냐?”

“됐어 꺼져.”


나도 한 때는 잠깐이지만 시나리오 스터디를 했었다. 임 감독 연출부 생활을 하기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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