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내가 쓰진 않았지만 내가 썼다 치고 관객과의 대화

033.

by Zinn


처음엔 지난 밤에 혜나와 사무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걸 들킨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양서연 PD의 눈빛에 혐오의 감정은 담겨있지 않았다. 어쩐지 자기가 모니터를 부탁한 시나리오 리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럴 만 한 게 내가 출근을 늦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시나리오를 읽느라 밤을 꼴딱 지새워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난감했다. 아직 한 줄도 안 읽었는데.. 지금 당장 어떻게 읽으셨냐고 물어보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대충 잘 봤다고 둘러댈 순 있지만 디테일하게 치고 들어오면 안 읽었다는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아직 퇴근까진 서너 시간 남았으니 집중해서 읽으면 퇴근 전까진 완독 가능이다.


설마 다짜고짜 감독 방으로 들어와서 자기 시나리오를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얼른 컴퓨터를 켜고 서연이 보내준 시나리오 파일을 모니터에 띄우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서연이 방으로 들어왔다.


당황스러웠다. 퇴근 후면 몰라도 업무 시간에 자기 시나리오 모니터를 받으려고 감독님 방에 쳐들어온다고? 얌전한 모범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은근히 저돌적인 스타일인가보다.


“아 미안. 서연씨. 아직 다 못 읽었..”

“감독님! 정말 최고에요!”

“응?”


시나리오를 받은 지 하루 밖에 안 지났으니 아직 못 읽었다고 해도 삐지지 않을 것 같아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데 다짜고짜 내가 최고라니 무슨 얘기지? 서연은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고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감독님 이번 시나리오 정말 좋았어요!”

“무슨 시나리오?”

“허락도 없이 먼저 읽어봐서 죄송해요. 첫 페이지 읽고 너무 재밌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냐 괜찮아.”


도대체 무슨 시나리오를 읽고 이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르겠어서 어리둥절했다. 설마 내가 석 달 전에 보낸 ‘공소시효’를 이제야 읽은 건가? 뭐 그렇다 해도 맨날 욕만 먹다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사실은 너무 재밌어서 팀장 님에게도 보여드렸는데 괜찮으신 거죠?”


석 팀장에게 공유했다고? 그럼 ‘공소시효’ 얘기는 아니다. 혹시 구창한 작가가 모니터를 부탁한 시나리오를 내가 쓴 시나리오라고 알고 있는 걸까?


“그런데 무슨 시나리오 얘기하는 거지?”

“아 제가 감독님 책상 위에 올려뒀던 시나리오 ‘가족사냥’이요. 어제 저에게 출력 부탁하셨던.. 페이지 넘버가 제대로 됐나 체크하려고 했을 뿐인데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팀장님에게 너무 재밌다고 얘기했더니 한 번 가져와 보라고 해서 갖다드린 거 거든요. 허락도 없이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석 팀장 보여주려고 쓴 건 아니지만.. 재밌게 봤다니 고맙긴 한데..”


서연이 읽은 건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였다. 구 작가가 나에게 모니터를 부탁한 시나리오 제목이 ‘가족사냥’인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사태를 정리해보자면 내가 서연에게 출력을 부탁하고 서연이 내 책상 위에 올려뒀던 구 작가의 시나리오를 서연이 내 허락도 없이 읽고는 재밌다고 석 팀장에게 갖다준 것이다.


감독님 책상 위의 물건을 감히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건드리다니.. 내가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분명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이 맞지만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 서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화가 나지 않았다. 화는 커녕 괜찮다고 토닥토닥 꼭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다.


이제야 잘 나가는 감독들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이런 우쭈쭈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다보니 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 못 가 감이 떨어지고 접대 술에 뇌가 녹아 망가지는 거겠지. 난 잘 나가도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각오를 다지면서도 그들이 부럽고 질투가 났다. 한 1년 정도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감히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읽은 감독님 시나리오 중에서 ‘가족사냥’이 제일 좋아요. 아니 제가 밀리언 필름 들어와서 읽은 시나리오 중에서도 최고에요. ‘공소시효’ 다음에 쓰신 거에요? 이런 걸작을 석 달 만에? 정말 대단하세요!”


‘가족사냥’은 내가 쓴 게 아니라 내가 아는 작가가 쓴 거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지만 존경심을 넘어 찬양에 가까운 서연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들통날 때 나더라도 최대한 서연의 존경과 찬양을 만끽하고 싶은 가운데 순식간에 해명할 타이밍이 지나갔고 나도 모르게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음.. 석 달 만에 쓴 건 아니고.. 옛날부터 틈틈이 써 둔 건데..”

“정말 최고였어요. 제가 장담하는데 석 팀장님도 좋아하실 걸요?”


서연은 작가에게 물어야 할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졌고 나는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그냥 내가 썼다 치고 대답해주었다. 대화를 진행하다 보니 서연이 차분한 이미지와는 달리 야심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획 PD로서 공은 세우고 싶지만 기회가 없어서 답답한 와중에 내 시나리오가 눈에 들어왔으니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기획팀 일이라는 게 그렇다.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없어서 보통은 일을 만들어서 하거나 좋은 시나리오 또는 크리에이터를 발굴해야 하는데 서연 같은 신입의 경우엔 인맥도 경험도 부족하니 누군가 일을 주기 전엔 사무실에 틀어박혀 원작 발굴한답시고 멍만 때리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석 팀장이 내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서연이 발굴한 셈이 될테니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가족사냥’은 비록 내가 쓴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덕분에 서연의 나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갔으니 나로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구창한 작가의 시나리오가 그렇게 재밌나? 듣보잡 감독 지망생 따위의 습작을 읽어볼 가치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면 구 작가는 마냥 듣보잡은 아니다. 십여년 전에 시나리오 공모전 최종심까지 오른 적이 있는 필력 하나 만큼은 임 감독도 인정한 작가님인 셈이다. 그 당시에도 글이 나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났으니 훨씬 업그레이드 됐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연의 안목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했다.


마침 동민도 그 당시 구 작가의 작품을 알고 있고 동민의 모니터라면 신뢰 할 수 있다. 비록 동민은 자기 글은 못 쓰지만 남의 글은 까칠하게 잘 보는 편이기 때문이다. 서연이 나에게 보내준 시나리오 모니터도 빠른 시일 안에 해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얼른 동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하냐.”

“그냥 있어.”

“뭐 하나 보내줄 테니 읽어봐.”

“뭔데?”

“읽어보면 알아. 그냥 솔직히 얘기해주면 돼.”

“싫어. 내꺼 쓸 시간도 없어.”

“닥치고 읽기나 해.”


동민에게 구 작가의 시나리오를 카톡으로 보내고 나도 읽어보려는데 정말 더럽게 읽기가 싫었다. 서연은 첫 페이지 읽고 너무 재밌어서 다 읽었다지만 난 첫 페이지조차 읽히지 않았다.


‘가족사냥’이라는 제목부터 마음에 안 들었고 다시는 안 찍겠다고 다짐했던 19금 떡 영화 ‘구멍가게’를 연출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다. 동민에게 시나리오를 보냈으니 뭐라고 하는 지 들어보고 재밌다고 하면 읽고 아님 말아야지 생각하고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다 집에 가려는데 방금 전 양서연 PD에 이어 이번엔 석 팀장이 노크도 없이 불쑥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 감독. 잠깐 시간 돼?”

“왜?”

“작품 얘기 좀 하자.”

“해.”

“회의실로. 5분 뒤에 봐.”

“알았어.”


왜 부르는 거지? 석 팀장은 보통 할 말 있으면 카톡으로 하거나 툭 던지고 마는 스타일이다. 폭망 감독의 대답 따윈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좀 아까는 평소와는 달랐다. 얼굴 표정도 경직되어 있고 진지한 느낌이었다. 설마 ‘가족사냥’ 때문에? 밀리언 필름에서 의뢰한 각색 작업 할 시간에 딴 일을 한 걸 문제 삼아 계약 해지라도 하려는 걸까?



***



석 팀장의 말대로 정확히 5분 뒤에 회의실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계약 위반 운운하며 위약금을 내라고 하면 ‘구멍가게’ 연출료로 퉁 치자고 던져봐야겠다. 받아주려나? 그냥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까? 싱숭생숭한 와중에 석 팀장이 여전히 경직된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석 팀장의 손에는 ‘가족사냥’ 출력본이 들려 있었다.


“이 시나리오 혹시 다른 회사 보여준 데 있어?”


석 팀장은 테이블 위로 ‘가족사냥’을 올려놓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양서연 PD처럼 석 팀장 역시 ‘가족사냥’을 내 시나리오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최소한 실 없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했다. 이제와서 내가 쓴 게 아니라고 하면 다시는 서연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언제 쓴 거야?”


순간 아차 싶었다. 말 실수를 한 것이다. 아까 서연에게는 두 달 만에 쓴 건 아니고 틈틈이 썼다고 했는데.. 밀리언 필름의 계약 기간과 겹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질 내가 아니다. 옛날부터 틈틈이 썼다고 하면 된다. 실제로도 틈틈이 썼다고 했지 밀리언 필름에서 각색을 의뢰한 ‘공소시효’ 계약 기간 중에 썼다고 한 건 아니다. 뭐라고 따지고 들면 밀리언 필름과의 계약 이전에만 틈틈이 써 둔 거라고 둘러대면 될 일이다.


“그냥 옛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써 둔 거야.”


석 팀장의 표정이 석연 찮았다. 당장이라도 내용증명을 보낼듯한 분위기였다.


“언제 썼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역시 석 팀장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정말 다른 회사 보여준 데 없는 거지?”


응? 예상 외의 전개인데?


“그렇다니까!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그냥 아주 오래 전부터 틈틈이 써 둔 거라니까! 심심풀이로!”


계약기간에 딴 거 썼다고 위약금을 내라고 할까봐 아주 오래 전부터 썼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정말로 어디 계약되어 있는 건 아니고?”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의리 없게 누구처럼 양다리나 걸칠 놈으로 보여?”

“믿어도 되는 거지? 나한테만 보여준 거지?”

“꼭 그렇진 않지.”

“어디? 누구?”


석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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