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으로 점철된 영화 인생에 또 다른 흑역사 추가

043.

by Zinn


시나리오가 별로라고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니 강 대표는 포커 페이스가 안 되는 스타일 같았다. 돈은 강 대표가 많을 지 모르지만 이 쪽 분야 경험은 내가 압도적으로 많다. 원래 칭찬을 할 때 덮어놓고 초지일관 칭찬만 하면 감흥이 덜한 법이다. 까는 줄 알았는데 듣다 보니 칭찬이어야 뿅 가는 것이다.


“필력이 범상치 않은 걸 보니 기성 작가님이 쓴 초고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보이나요?”

“누구시죠? 새로 계약하신 분 작품인가요?”

“작품은 어떠셨어요?”

“놀랐습니다. 대박이네요. 적어도 제가 올 해 읽은 시나리오 중에선 최고였어요.”


이를 시작으로 강약중간약 템포를 조절해가며 호평 융단폭격을 퍼부어주었고 내 말을 다 들은 강 대표의 눈동자에는 아티스트 뽕이 차오르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다. 이 허접한 물건은 강 대표의 자작 시나리오였다.


“아직 비밀인가요? 정말 작가님이 궁금합니다. 한국에 이 정도 쓰는 작가님이 흔치 않거든요.”


바로 그 때 강 대표가 비장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접니다.”

“네?”
“제가 썼습니다.”

“에이.. 대표님 왜 이러세요.. 앗 정말요?”


내가 속아 넘어가는 척 해 주자 강 대표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 더 더욱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석 팀장에게는 비밀입니다.”

“진짜요? 이거 진짜 대표님이 쓰신 거에요?”

“다른 직원들에게도 비밀 부탁드립니다.”

“앗 대표님 아니 작가님!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원래 작가 활동을 하셨던 거죠?”


강 대표는 말 없이 씩 웃고는 내가 들고 있던 자기 시나리오를 뺏어 들고 홀연히 떠나갔다. 밀리언 필름의 미래가 어두웠다. ‘가족사냥’이 밀리언 필름 제작으로 극장에 걸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내가 그 어떤 대단한 글을 써 온들 회사 대표가 작가 데뷔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제작이 될 리가 없다.


모름지기 대표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회사는 희망이 없는 법이다. ‘가족사냥’ 뿐 아니라 이 회사에선 ‘구멍가게’조차 아니 뭘 하든 엎어질 것이다. 강 대표의 다음 수도 예상이 됐다. ‘가족사냥’ 단독 각본 크레딧!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족사냥’은 다른 제작사에서 진행한다 생각하고 강 대표의 작가 데뷔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자. 그래도 법카랑 진행비는 나오잖아?


강 대표가 내 방에서 나가고 정확히 5분 뒤에 석 팀장에게 카톡이 왔다.


‘읽어봤어?’

‘뭘?’

‘다 알고 있으니까 모르는 척 하지 마. 강 대표 시나리오.’

‘알고 있었어?’

‘ㅇㅇ’

‘넌 어떻게 봤어?’

‘왜 이래? 선수끼리.’

‘넌 뭐라고 했는데?’

‘글은 쓰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지.’

‘정말? 의외네. 간신배가 아니었구나ㅎ’

‘그랬더니 삐져서.. 너한테 보여준 거야.’

‘밀리언 필름 걱정된다ㅋㅋ’

‘애들한텐 보여주지 말라고 했어. 애들한테 보여주는 순간 바로 퇴사야.’


강 대표의 자작 시나리오를 안 보여줬어도 팀원들 중 한 명은 이미 퇴사를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팀장은 독립하고 싶어하고 직원은 감독이 꿈이고 대표는 작가 데뷔에 정신 팔려 있는 제작사의 미래는 안 봐도 비디오다. 석 팀장의 말에 의하면 강 대표는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쓰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곧장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영화 크레딧에 먼저 작가로 이름을 올리고 드라마에 도전할 생각인 것 같다고 했다.


이해는 갔다. 영화는 감독이 갑이지만 드라마는 작가가 갑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 물론 강 대표가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니고 드라마 작가로 대박이 나면 다시 감독에도 도전할 것이라고 했다. 왜 아니겠나. 역시 이 회사는 회사가 아니라 강 대표의 자아 실현의 장이었다.


다시 한 번 밀리언 필름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래서 신생은 안 되는 것이다. 여기서 차기작 메이드는 불가능이고 석 팀장이 독립해서 괜찮은 제작 여건을 만들어 올 때까지 각색 작업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았다. ‘가족사냥’의 원작자인 구창한 작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몰라 막막했는데 본의 아니게 시간을 번 셈이다. 회사 대표가 작가 데뷔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제작에 속도가 붙을 리가 없다.



***



구창한 작가의 ‘가족사냥’을 최대한 내 버전으로 고쳐보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강 대표의 시나리오가 돌림노래처럼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간만에 집에 일찍 들어갔는데 유정은 귀가 전이었고 세미는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인사도 없이 잽싸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내와는 섹스리스, 딸과는 토크리스. 이게 사는 건가. 서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왜 자꾸 서연 생각이 나지?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인데 유정과 이혼을 한다면 서연과 제 2의 인생을 꿈꿔볼 수 있을까? 물론 차기작이 대박이 난다는 전제 하에. 비록 40대 중반의 이혼남에 중학생 딸까지 있는 몸이지만 대박 감독이라면 20대 처녀에게 들이댄다는 게 아주 말이 안 되는 시나리오는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차기작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데 굳이 내가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구창한 작가라는 보험이 있다. 창한이 토씨 하나 고칠 필요가 없는 훌륭한 2고를 써주기만 하면 진정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꼭 그 정도는 아니라도 쓸만한 아이디어만 담겨 있다면 내가 그 다음 일은 어떻게든 진행시킬 수 있다. 간만에 편하게 잠자리에 들려는데 난데없이 카톡 알림이 울렸다.


혜나의 카톡이었다. 혜나에게는 몸과 마음의 빚이 있고 시간도 늦었고 하니 못본 척 씹어버리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카톡창을 열어보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집 근처 카페에 와 있으니 잠깐 만나달라는 톡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우리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동민이 알려준 모양이었다. 행여나 무시했다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카페로 나가보니 혜나는 입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집 앞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이 됐지만 막상 만나보니 우리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미인에다 몸매가 좋고 몸에 딱 붙는 옷까지 입고 있어서 기분전환이 됐다. 혜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케익이라도 먹을래?”

“아니요. 다이어트 중이에요. 공연 때문에..”


혜나는 다시 존대말 모드였다. 역시 감독은 작품이 진행되어야 대접을 받는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혜나가 한숨을 쉬었다. 술 냄새가 풍겨왔다.


“왜 제 주변엔 계속 똥파리만 꼬일까요? 감독님 처럼 좋은 분과 일하고 싶은데..”

“미팅이라도 했어?”

“아니요. 매니저를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도 양아치 같아서요.”

“괜찮은 매니저도 많아. 혜나는 연기를 잘 하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곧 만나게 될 거야.”

“감독님이랑은 지난 번 작품 찍을 때 정말 좋았거든요. 감독님은 어떠셨어요?”

“응? 나도 좋았지.”


우리 동네 카페여서 누가 들을까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카페엔 알바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시나리오 안 주세요?”

“무슨 시나리오?”

“차기작 시나리오요. 궁금해요 감독님 차기작. 왜 저는 안 보여주시는 거죠? 감독님 차기작요!”


정말 취했나? 혜나의 목소리가 끈적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폭망 감독 최경진이 아니다. 이번 각색고만 잘 나오면 바로 차기작 제작에 돌입해야 하는 예비 대박감독인 것이다.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왔는데 괜히 삼류 여배우랑 어설프게 엮였다간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폭망 감독보다도 못한 불가촉 천민 신세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니 끈적 후끈 달아올랐던 밤 기운이 절로 건조해졌다.


“아직 캐스팅 단계는 아니어서..”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드셨구나!”

“무슨 소리야! 연기 많이 늘었던데? 잘 하고 있으니까 곧 좋은 날이 올 거야. 아 맞다. 내가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어서..”

“저도 공연 연습 때문에 가봐야 돼요. 그런데 감독님 좀 변하신 것 같네요?”

“변하긴.. 나이를 먹긴 먹었나봐. 밤만 되면 잠이 쏟아지네.”


‘난 잃을 게 많잖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여기서 삼류 여배우에게 발목을 잡히면 안 되지!’라고 말할 순 없으니 빨리 택시를 호출하라고 했다.


혜나는 내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주지 않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 이상 버티지 않고 바로 택시를 호출했다. 난 혜나가 택시에 타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왔다. 다른 동네였으면 또 모르겠는데 우리 동네여서 행실을 조심해야 했다. 행여나 옆집 아줌마 눈에라도 띌까 무서웠다. 감독 복귀를 앞두고 있으니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



석 팀장이 간만에 회식을 하자고 했다.


‘가족사냥’을 혼자 쓰겠다고 고집 부리지 말고 각색 작가를 받아 들이라는 설득 차원의 술자리가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 그대로였다. 그나마 서연이라도 있으면 견딜만 했을 텐데 석 팀장과 단 둘만의 호프집 회식이었다.


“최 감독. 내가 응원하는 거 알지? 나 믿지? 정 안 되면 무리하지 말고 각색 작가를 붙이자. 초고가 괜찮으니 누가 붙어도 결과가 좋을 거야. 작가는 원래 자기 글의 단점을 보기가 힘든 법이거든.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너는 감독도 해야 되니까 큰 그림을 봐야지. 작가 붙여주면 이래라 저래라 지도편달만 해.”

“생각하고 있는 작가는 있고?”

“영화제에서 알게 된 작가도 있고 공모전 출신 작가도 있고 궁금하면 리스트업 해 줄게. 그 중에서 직접 골라도 되고.”


이딴 소리나 들을 줄 알았으면 서연과 브레인스토밍 회의나 할 걸 후회가 됐다. 석 팀장의 각색 작가를 붙이란 제안에 선뜻 답을 못하고 있자 석 팀장은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나는 니가 잘 되는 걸 꼭 보고 싶어.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지?”

“그럼.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다행이다. 나 잠깐 화장실 좀..”


석 팀장이 화장실에 간 사이 어쩐지 서연의 카톡이 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거짓말처럼 서연의 카톡이 와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다.


‘감독님 저 아이템 결정했어요!’

‘뭐야?’


서연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실시간으로 카톡을 보냈다.


‘내일 말씀드릴게요ㅎㅎㅎ 기대해주세요!’

‘ㅋㅋㅋ 기대된다’

‘궁금하세요?’

‘응 넘넘 궁금.’

‘감독님 이야기요.’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아이템이야?’

‘아니요. 최경진 감독님의 영화 인생 이야기요. 우리 내일 회의해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어쩐지 최경진 감독의 비운으로 점철된 영화 인생에 또 다른 흑역사가 추가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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