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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한 마음 Jan 12. 2021

J에게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 추억


J를 처음 만난 건  이십 년 전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시절, 캠퍼스 곳곳이 파릇한 활기로 물들어가던 봄날의 어느 강의실에서였다. 친구와 나는 선택교양으로 신청한 영어회화 강의를 듣기 위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원어민 강사의 가벼운 인사말로 시작된 강의가 불과 십여분 채 지나기 전에 우리는 서로 멘붕에 빠진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가 신청한 강의는 분명 기초 회화반인데, 강사는 물론 강의를 듣는 다른 수강생들 모두 프리토킹 수준의 고급회화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짧게는 2년씩 살다왔다는 이 수강생들의 학점 베이스를 깔아주지 않으려면, 수강정정기간에 무조건 나와야 한다며 친구와 나는 뒷줄에 앉아 욕을 토했다.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강사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겠다고 하자 제일 앞줄 중앙에 앉은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는 유창한 영어로 우리는 알아먹지 못할 질문을 하였다.

나랑 같은 학번쯤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질문까지 막힘없이 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자극도 되는 한편, 이제는 후광까지 번쩍 드리운 그 남학생을 나는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같은 과 강의실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속으로 '올레-'를 크게 외쳤다. 그가 같은 학번 동기가 아닌 갓 제대한 복학생임을 알고는 두 번째 올레를 외쳤고 말이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처음 연인이 되었던 그 해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햇수로는 십 년이 흘렀지만, 여느 연인들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수도 없이 반복한 탓에 실제로 교제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그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혼 후 그것이 내 착각에 불과했단 걸 깨닫게 되기까지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이유일 게다.

올해로 이미 결혼 생활도 10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하는 것일 테지.

그와 나 사이의 끝도 없는 간극을 메우는 일에 지쳤다고 아우성치며, 이 권태로운 결혼생활을 잇는 끈은 결국 자식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때때로 밀려오 했다.


그 즈음 가장 깊게 교류하고 있던 공동체 언니들과 나줌에서 만났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데 그중 '남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오래 주고받았다. 제법 묵직하고 깊게 넘나들었던 이야기의 흐름은 우리의

첫 번째 공통 미션 주제로 이어졌다. ‘내 남편에게 나만이 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 글을 써보기로 했고, 내가 그 첫 번째 글을 열게 된 것이다. 생애의 절반이란 시간을 그와 함께 지나왔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 글을 시작하며 알아챈 것인데, 글을 올리는 오늘이 마침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날이라는 사실. 훗-  (나이가 드니 자꾸 이런 자잘한 것들에도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그저께 유튜브 알고리즘이 물어다 준 어느 영상에서 장례지도사인 한 여성은 자신의 남편을 떠나보내던 날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죽은 남편의 시신을 직접 염하고 거두었던 그녀의 손길을, 그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그녀의 남편은 생전에 꼭 붙잡고 다녔다고 한다. 한 망자의 딸은 자기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준 그녀의 손을  찝찝하고 불길하다 여겨 가까이 닿는 것조차 꺼려했다는 데 말이다. 부부는 살아온 날들에 비해 추억이 참 많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여행을 좋아해서 여기저기를 그렇게나 많이 다녔다는데 그 추억으로 평생을 기쁘게 살겠다고 말하며 그녀는 말갛게 웃었다.



아, 그래 추억이구나.
죽음마저도 산 자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그것은 바로 ‘추억’이로구나..



내가 남편에게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그것은 바로 ‘추억’.


이십 년이란 세월을 함께 지나오는 동안 쌓여왔을 그 추억은 어쩌면 이십 년 만기 변액연금보다 더 든든하게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 그 곱절만큼의 시간 동안 쌓여갈 우리의 추억이 서로를 잇는 끈끈한 동아줄이 되어주겠구나.

함께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겠구나.



...

오늘 나는 'J에게' 편지를 쓰려한다.

젊은 날 나를 스쳐간 여럿의 J 가운데 내 곁을 가장 오랜 시간 지켜 준 유일한 한 사람에게.


백 만년만에 사 본 편지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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