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패션테러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향 엔지니어였던 남편은 외부 행사 때도, 공사가 있는 날에도, 사무실 근무를 하는 날에도 편안한 운동화에 작업복차림이었다. 아마 내가 옷차림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자가 대세인 요즘, 남편은 요리에도 젬병이다. 신혼 초에 컨디션이 안 좋은 나를 위해 식사당번을 자처하고 만둣국을 끓여준 적이 있다. 끓는 물에 만두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더니 국그릇에 담아냈다. 나는 배꼽이 빠질 만큼 웃다가 수고스럽게 해 준 애정어린 마음을 생각해서 만두는 잘 건져 먹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요리를 먹지 않기 위해 초록창을 켜서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요리도 패션센스도 없는 남편의 가장 큰 매력은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가식적인 호응이나 원치 않는 지적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가치를 공유하는 대화들을 통해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는 서서히 서로의 삶에 녹아들었다. 생각해보면 남편은 나의 일상에 결핍돼 있던 부분을 잘 챙겨줬던 것 같다. 혼자 사는 1인 가구였던 나는 늦잠을 자다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출근했고 과외가 있는 날에는 끼니를 제 때 못 챙겨먹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남편은 매일 모닝콜로 억지로 기상시켰고 아침은 먹었는지 먹고 싶은 것은 없는 지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가끔 그가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날에는 김밥을 사들고 나타났고 커피 중독자였던 내게 식사 전에 커피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잔소리도 했다. 어느 추운 겨울 밤, 나의 수업이 마치길 기다리던 남편과 근처 편의점에서 데이트를 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서로 꼭 붙잡고 생강차를 마시며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웃고, 아픈 데는 없는지 서로를 챙기던 순간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우아한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의 연애는 소박하면서 일상적이었고 따뜻했다.
만난지 100일 되던 날이었다. 백일 기념 선물을 하고 싶어서 백화점으로 간 나는 미리 점찍어두었던 향수를 집어들었다. 예쁜 박스에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리본을 달았다. 주로 까페나 편의점에서 데이트하던 우리는 백일 기념으로 근사한 곳에 갔다. 향수를 받아 든 남편은 고맙다며 쑥쓰럽게 웃었다. 고급스런 식사와 예쁘게 포장된 선물은 평소 우리의 데이트와 달라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특별한 날, 특별한 데이트는 그렇게 약간의 어색함 속에서 잘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도록 그는 내가 준 향수를 한 번도 뿌리고 나온 적이 없었다. 바빠서, 잊어버려서 못 뿌렸다는 말이 줄줄이 이어지자 서운해졌다. 사실 향수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고맙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별의 별 생각을 했다. 서운함을 참다가 뒤늦게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남편은 이런 말도 안돼는 오해를 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원래 향수를 사용하지 않아 뿌리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고 그런 걸로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듣다보니 그는 향수를 즐기는 성향이 아니었다. 그는 좋은 향수보다 최신 스피커 기종이 궁금하고, 향수를 뿌리는 것 보다 아침 식사를 여유롭게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해로 시작된 투덜거림은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가고 이해하게 되면서 눈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사줬던 선물은 향수의 본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장식품이 되어, 고이고이 화장대 위에 자리를 차지했다.
이젠 남편의 선물을 사줄 때는 받고 싶은 것을 물어본다. 그거 원한 것은 카메라 렌즈, 블루투스 스피커, 태블릿 PC였다. 아, 향수와 기계의 간극이라니.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진 걸까. 그러다 문득 나는 어차피 쓰지도 않는 향수를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남편이 의아했다.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인 나는 차라리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편이 더 낫지 않았겠냐고 물었다. 그런 내게 남편은 무심하게 툭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당신이 준 거잖아.”
그래. 남편 취향도 모르고 내 맘대로 사준 선물이 너무 후회가 되는데, 그것마저도 소중하게 아껴주는 남편이라 너무 감사하구나. 사랑만큼 효율성 높은 것이 어디있겠는가. 애정어린 말 한 마디에 애 둘 낳고 지지고 볶으며 사느라 잊어버린 설렘이 다시 싹튼다. 여보, 이제부턴 장식품 말고 장착품 많이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