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염상정 處染常淨
세상의 어떤 결핍들은 그냥 주어진다. 그가 선택해서 주어진 결과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그냥 주어지는 결핍들이 있다. 그런 결핍들을 우리는 운명이라 부른다. 한 해가 지나면 어김없이 또 다른 한 해가 주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주어지는 또 다른 365일, 다시 새해가 왔다.
해가 지고 해가 또 오는 것, 계절이 지나가고 나이가 드는 것을 우리는 섭리라 부른다. 운명도 섭리도 모두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새해도 마찬가지다. 새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우리의 몫이다. 아침 해가 뜰 때 소망을 빌었다면 충분하다.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반성하고, 감사한 일들을 생각했다면 더더욱 충분하다. 거대한 섭리 안에서 돌고 도는 세상은 소망과 반성, 그리고 감사로 이루어진 뫼비우스의 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일종의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다. 결핍이 있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연약하다. 눈에 보이는 연약함이냐 보이지 않는 연약함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다소 연약한 우리들은 종종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발부리를 차인다.
혼자였던 유년을 보낸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언어폭력에 시달렸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부모를 일찍 여읜 사람은 생일과 어버이날이 힘들고, 부모와 의절한 사람은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할 때 평범하기 힘들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밀려본 사람은 이해관계가 싫어지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람은 마음을 여는 게 싫어진다.
어떤 면에서 연약한, 일종의 결핍을 가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결핍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연약함을 연약함으로,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힘듦은 힘듦으로, 싫은 것은 싫은 것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이 그렇구나, 나의 하루가 그렇구나, 내게 주어진 상황이 그렇구나 그저 바라보는 일이다. 괜스레 점잔을 빼면서 고상한 척할 것도 없고, 큰 의미를 깨달은 양 젠체할 것도 없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더욱 진솔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결핍은 사전적으로 "모자람, 부족함"을 뜻하지만, 부족함 자체도 특별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는 힘은 주어진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나온다.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강해진다. 견뎌낼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단단해진다. 결핍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핍을 내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내게 주어진 나의 것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12월 31일이 1월 1일이 되었다고 가벼운 지갑이 갑자기 두둑해질리는 없다. 연말 기분을 내느라 쓴 지출 덕분에 지갑은 더욱 짠해졌을 뿐이다. 소의 해가 가고 호랑이 해가 왔다고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서 옮겨온 목감기 덕에 며칠 몸살을 앓았더니 일출은커녕 기상조차 힘들다. 날이 갈수록 약빨이 듣지 않는 것을 보니 세월이 흐르긴 흐르는 것 같다.
서른여덟 해를 지나 서른아홉 번째 해를 맞았지만, 나는 여전히 김도현 씨의 "돌베개"를 눈물 없이 부르지 못한다. 가사에 나오는 눈물 젖은 돌베개는 결핍을 상징한다. 못된 사람들이 돌베개를 쥐고 흔들며 약점 삼을 때, 좋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슴에 품는다. 새해가 되었다고 모든 결핍에서 초연해질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연연하지 않도록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나를 품어준다.
연꽃은 흙탕물 속의 오염물질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물을 정화시키면서 자라나는 연꽃은 마침내 흙탕물에도 물들지 않는 고결하고 정갈한 꽃 한 송이를 피워낸다. 한 해가 시작하는 1월, 올 한 해에는 나를 아프고 쓸쓸하게 하는 결핍을 자양분으로 받아들여보겠노라 다짐해본다. 모든 것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을 테니 말이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며, 단단한 껍질을 뚫고 싹을 틔우게 될 발아를 꿈꾼다. 발아한 연꽃이 습지를 모두 뒤덮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