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유산의 기억.
신혼이었던 시절, 나는 마치 과제제출 마감기한을 앞둔 학생처럼 출산도 속전속결로 마치고 싶었다. 느긋하고 무심한 성격의 남편은 때가 되면 아이가 선물처럼 오리라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의 소유자였으나 나는 이왕 낳을 거, 조금이라도 어릴 때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급했다. 대한민국에서 만 35세 임산부는 노산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검사가 추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나 또한 그 때가 되면 내 몸이 어떻게 변해있을 지 모른다는 걱정에 굉장히 불안했다. 물론 만 35세라는 기준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또한 나이가 40대여도 20대 못지않은 건강한 몸을 가진 아름답고 멋진 여성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베스킨라빈스 31이었던 그 때, 어서 임신과 출산이라는 숙제를 끝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매 달 찾아오는 생리 주기가 한 주라도 늦어지면 기대감에 사로잡혀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생리주기가 한 주 정도 늦어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말이다. 몇 달을 그렇게 상상임신놀이를 하다가 임신테스트기도 많이 버렸다. 마음을 비워야겠다고 정신을 차릴 때 쯤, 결혼한 지 9개월 차에 두 줄이 떴다. 그렇게 기다리던 두 줄을 보니 오히려 임신테스트기가 불량은 아닌가 싶어 다시 한 번 더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내 입꼬리는 스르륵 올라갔고 감격과 기쁨에 겨워 너무너무 행복했다.
성별은 무엇일까, 어떤 성격의 아이일까, 누구를 닮았을까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배를 어루만졌다. 임신 초기에는 배도 나오지 않는데 괜히 배가 나온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입덧이 거의 없어서 먹고 싶은 것은 다 잘 먹었고 정기검진도 잘 다녔다. 임신 초기에 피가 비치는 흔한 현상도 한 번 없었고 혈액 검사 결과도 모두 좋았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안정기에 접어들기 2주 전이었다. 갑자기 복통이 시작됐다. 처음엔 약간 신경쓰이는 정도의 통증이었고 곧 정기 검진이 있었기에 바로 병원을 가진 않았다. 그러다 다음 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배가 심하게 조이며 뒤틀려왔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급히 남편과 함께 병원을 향했다. 처음보는 당직 선생님께서 진찰해주셨다. 따뜻한 말투로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다정하게 위로하시면서 아이가 몇 주 되었냐고 가볍게 질문을 건네셨다. 이제 10주가 되었다는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조금만 더 있으면 안정기네요라고 답하고는 초음파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셨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의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미소짓던 따뜻한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쁜 소식을 전해줄 것 같았다. 당직 선생님은 내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운을 뗐다. 그 선생님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죄송한지도 모르겠지만 그 다음 말은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들어야 했다. 의사는 아이가 이미 몇 주 전에 성장을 멈췄으며 심장이 뛰고있지 않다는 슬픈 소식을 미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전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곁에 서 있던 남편은 짧은 탄식을 내뱉았다. 의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성장이 멈춘 아이가 배 속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엄마의 몸에 나쁜 영향을 준다며 최대한 빨리 소파술을 진행하도록 날짜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아이의 죽음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수술이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일 오전에 병원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 동안 나는 이미 죽은 아이를 어루만지며 무슨 말도 안되는 대화들을 한 것일까. 그 날 밤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다음 날 나는 담당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안타까운 얼굴로 임신 초기에 이런 일들이 자주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몸 잘 챙기고 다시 건강 회복해서 더 튼튼하고 예쁜 아이를 만나면 된다고 했다. 다 맞는 말이고 다 좋은 말인데 내 마음에선 모두 튕겨져 나갔다.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곧 바로 수술 안내를 받고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있자니 간호사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수다를 떨었다. 그들에게는 출산도 유산도 직업적으로 익숙한 일상중에 하나일 것이기에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느끼는 온도차이는 너무 컸다. 나에겐 생에 처음 일어난 유산이라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나 혼자만 슬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흘렀다. 훌쩍이는 소리에 수다를 떨던 간호사들의 말소리는 잦아들었고 그 중 한명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곧이어 의사가 들어왔고 마취제에 취해 나는 잠에 빠졌다.
수술 후에 눈을 뜨면 남편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혼자였다. 소파술을 마친 환자들의 회복실은 보호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구조였다. 나는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밖으로 나갔다. 의자에 앉아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다리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괜찮냐며 나를 꼭 안아주었고, 나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맛있는 밥을 먹자고 했다. 우리가 평소에 자주 가던 돼지국밥 집에서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슬퍼도 배는 고팠고, 슬퍼도 밥은 맛있었다. 남편의 말로는 내가 수술을 마치고 나올 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고 한다. 다 먹고 일어나 계산을 하던 남편의 뒤에 서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이 놀라 소리치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 무슨일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내 필름이 끊겼다. 사람들이 놀란 건 힘 없이 고꾸라지는 나 때문이었고,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나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 살면서 한 번도 기절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의식을 잃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몇 분 뒤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수술 과정에서 출혈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내 인생에 있어 첫 유산과 첫 기절을 동시에 한 그 날은 정말로 슬펐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 각자의 슬픔은 나처럼 꽤나 크고 힘들었으리라.
감사하게도 일 년 뒤 나는 귀한 딸을 얻게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연이어 둘째 딸까지 얻어 쌍둥이보다 더 힘들다는 연년생 엄마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생각보다 엄청나게 힘든 육아로 인해 지치고 괴로워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그 모든 힘든 순간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생애 첫 유산과 기절을 동시에 한 그 날이 더 힘들지 않았나 싶다. 두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때론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지만 아이들이 주는 기쁨이 더 크고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내게 큰 힘이 된다. 달콤살벌한 육아의 길을 걸으며, 나는 지금 내게 허락된 두 명의 귀여운 꼬마숙녀들이 없는 삶은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역시, 나는 엄마가 되길 잘한 것 같다. 엄마가 될 수 있게 만들어준 꼬마 숙녀들에게 더 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