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만큼 살아지는
1996년에는 국밥 한 그릇이 삼천 원 정도였던 것 같다. 오늘 먹은 순대국밥은 한 그릇에 9,000원이었다. (만 원 하는 집도 간혹 있다.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물가가 많이 올랐다.)
요즘 시집은 대부분 만원 정도이니,, 함민복 선생님의 시에 의거해 볼 때, 국밥 한 그릇과 시집 가격의 상관관계는 1996년이나 2023년이나 다를 바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짜장면 가격은 그나마 덜 오른 것 같기도..) 함민복 시인의 자기 성찰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 시집은, 국밥 한 그릇만큼 가슴을 데우는가?
어쩌다 20주년을 맞이한 울산의 축제 주제 공연의 시놉시스를 의뢰받았다. 비언어극을 위한 시놉에 대하여 감을 못 잡다가, 겨우 적어낸 초안으로 회의를 했다. 총괄 국장님과 연출 감독님의 각자의 시선을 종합해 보다가 머리가 지끈지끈해질 쯤, 리프레쉬 겸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에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치의 상실에서 가치의 재발견, 가치의 가치로 이어지는 좋은 대화였다.
딴 길로 새서 했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보니 역시, 회의는 길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문득, 그놈의 가치, 내가 좋아하는 가치와 의미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어쩌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건지 스스로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정확히 설명할 바 없지만, 살다 보니 써졌을 뿐. 지금의 답은 그렇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과 목적과 당위성이 있었노라고 젠 체하며 거들먹거릴 수는 없는 성정이다. 끊임없이 내가 적어낸 글들을 깨부수고 깨부수면서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
“시인의 정신은 미지”(김수영)에서 “시인은 언제나 시의 현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어제의 시나 오늘의 시는 그에게는 문제가 안 된다. 그의 모든 관심은 내일의 시에 있다. 그런데 이 내일의 시는 미지(未知)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은 언제나 미지다.”라는 표현에 전율이 인다. 모든 규정짓기로부터 자유롭게 쓰리라.
지난여름에 한 기관으로부터 받았던 인터뷰 질문지에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한 물음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뭐랄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뭐 이런 질문이 다 있나 했다. 이유? 이유라니? 마치 “너 왜 사니? “라는 질문을 받은 느낌이랄까. 나는 전혀 대단한 위인이 아니다. 그냥 산다. 시는 좋아서 쓴다. 혹시나 어떤 멋들어진 ‘무언가’를 기대한 질문이었을까? 글쎄, 어쨌든 이유는 없노라 답하고 말았다.
사람도 삶도 질문하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쭉 읽는다고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책을 통한 사유와 질문이 있어야 내 것이 된다. 나는 그냥 쭉, 여전히 모르겠는 것들을 정직하게 질문하며 살고 싶다. 그 속에서 같이 의미 있자고, 같이 가치 있게 존재하자고, 삶이 살아지는데, 시가 써지는 데, 대체 무슨 이유가 있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고 말했다. 아직 이 대답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당신과 함께 더 많은 시를, 더 필사 적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겠노라 담담히 말하는 평론가의 간곡함에 괜스레 가슴이 웅장해진다.
또다시 새로운 무엇을 찾아, 걸어온 길을 다 잊고, 다시 처음부터 허밍 하며 나아가는 나의 시를 읽고 감상을 적어주신 브런치 작가, 마주혜 님, 김윤삼 시인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 김윤삼 시인님의 시집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