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남편 만난 이야기
나는 커피에 시럽따위는 넣지 않고 샷을 더 추가해서 진하고 쓰게 마신다. 씁쓸한 음료를 삼킨 뒤, 입 안에 감도는 달달한 끝맛을 너무 사랑했다. 같은 음료 두 잔을 사면 할인을 해 주는 카페에서 후배를 만나던 날, 나는 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후배님이 좋아하시는 메뉴로 두 잔을 주문 했다. 생크림이 가득 올려진 음료는 너무 달아서 거의 먹다 말았는데, 그 달콤한 음료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는 후배를 보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크림 가득 얹은 커피를 좋아했던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음악의 길을 포기했다고 한다. 절대음감인데다 듣는 귀도 무척 예민했던 그가 음향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은 꽤나 적절한 선택이었다. 음악을 포기해야 했던 아쉬움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미련을 두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나의 부탁으로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엉성한 악보를 교정해주었고 만날 때마다 마치 제 일처럼 나의 도전을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태도로 도와주었다. 누구나 퇴근 후에는 그저 배부르게 먹고 쉬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텐데 그는 늦은 밤에도 나의 음악을 듣고 또 들어 주었고 어색한 코드들을 교정해 주었다. 어쩌면 그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작업이 새로운 모험이자 도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마음을 써주는 것이 바로 이 친구의 영업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일인 기업의 대표로 살아간다는 것은 막중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뒤따를 터인데 그는 성실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고객에게 어필하길 택한 것 같았다. 나는 사실 돈도 한 푼 안내고 겨우 밥이나 커피따위만 사주는 영양가 없는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에게 황금같은 시간을 내어 주고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디지털앨범 만들기도 도전해보자던 그에게 참 고마웠다. 그래서 만약에, 진짜로 만약에 유명해질 기회가 내 인생에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 때 이 은혜 크게 갚겠노라 공수표를 날렸다.
내 노래에 기타 반주를 입혀보기로 한 날, 먼저 도착해서 기타를 세팅하고 있던 후배는 잔잔한 노래를 하나 연주하고 있었다. 클라이막스가 뚜렷하던 내 노래와 달리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연주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 가을밤과 참 잘어울렸다. 연주에 몰입해 있던 그는 나의 시선을 느끼고서 쑥스럽게 웃었다. 박수를 치며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떠는 내게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자기가 예전에 만들어 뒀던 노래인데 어떻냐고 물었다. 나의 엄청난 칭찬과 찬사에 어깨가 으쓱해진 후배는 나에게 노래 가사를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항상 도움을 받기만 하던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쁜 마음에 당장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펜을 끄적이다보니 가을밤의 센치한 분위기 덕분인가, 금방 새로운 가사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작사, 작곡에 나란히 이름을 적어 넣고 첫 합작품의 탄생을 축하하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합작품을 뿌듯하게 마무리한 후, 우리는 다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대야 할 지 난감했던 나의 노래 작업으로 돌아와서 녹음을 시작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으며 오글거려 어쩔 줄 몰라하던 10월의 어느 날, 또 한 번의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이 어려운 것이고 시작이 반이었다. 나는 가슴 뛰는 즐거운 일을 마다할 이유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신이 나서 나와 함께 공연을 했던 연주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쉽게도 피아니스트들은 워낙 능력이 출중하신 팔방미인들이라 이번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저녁마다 업무가 많아서 밤늦게 만나던 후배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해봤다.
"그 날은 저녁 일정이 없네요. 기타 가져가면 돼죠?"
될 일은 된다고 했던가. 순식간에 엔지니어이자 기타리스트를 손에 얻은 나는 천군만마를 등에 업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언제나 모든 게 다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 만나서 잠시 리허설을 해보기로 했던 후배님은 갑자기 들어온 고객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잠시 일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간단한 업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늦어졌고 강연시간이 다 되가는데도 여전히 마무리를 못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MBTI의 J성향이 아주 강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일에 멘탈이 붕괴되려 하는 것을 겨우 겨우 진정시켰다. 시간 된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이렇게 약속을 못 지킬 거면 차라리 plan B 연주자를 섭외해 뒀을텐데 하는 원망이 일었다. 혹시 아무 대가 없이 그동안 부려먹은 것을 이렇게 복수하는 건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그러나 나의 지나친 상상력은 대부분 헛다리를 잘 짚었기에 말도 안돼는 막장 드라마를 쓰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동안 성실한 마음으로 함께 작업해온 시간들을 믿고, 그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거라며 잠자코 기다렸다.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런 망할. 장대비까지 쏟아지다니. 비는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일 뿐이었는데 긴장감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내 눈에는 하늘문이 뚫려 퍼붓는 스콜로 보였다. 나는 목숨걸고 빗속을 뚫고 빨리 오라고 재촉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안전하고 무사하게 강연장에 잘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예정된 강연 시간에서 삼십분이 지났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얼굴이 창백해져가던 나와는 달리 P성향이 잘 발달된 사회자는 오프닝 이벤트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청중과 시간을 보내 주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산도 없이 기타를 들고 까페로 달려오고 있었다. 온통 얼굴에 미안함을 가득 담고 비에 젖은 모습으로 뛰어들어오는 그를 보니 긴장감이 탁 풀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과 고마움과 약간의 미움과 그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 무대에 올랐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스릴을 선사해준 그가 얄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이상한 이중감정을 느끼며 강연은 무사히 마쳤다.
저녁도 못 먹고 달려온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강연장을 향해 달려왔는 지 빤히 보여서 나는 오히려 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요기가 될만한 것들을 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연의 여운이 남았던 탓이었는지 우리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나누었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던 늦가을의 어느 밤, 어떻게 보면 피상적이었던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제대로 알아가는 전환점을 맞이했고 조금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용감한 도전들은 더욱 나답게 살아갈 힘을 주었고, 나다웠던 많은 시도들은 내 곁에 그렇게 소중한 인연을 데려다 줬다.
사실 그는 본인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화 한 번 내지 않고 안전하게 조심히 오라고 하던 나에게 심쿵했다고 한다. 나는 비에 젖어 뛰어들어오던 그의 미안한 얼굴에 심쿵했는데. 어쨋든 우리는 이내 연애를 시작하게 됐고 사사건건 할말은 하고 아닌 건 아니라며 걸고 넘어져야 하는 나의 쌈닭 기질을 알게 되면서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속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현재 나는 그와 똑같이 생긴 딸 하나, 나와 똑같이 생긴 딸 하나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정말이지 사람일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니까.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 감기든 코맹맹이 소리로 불러본 재밌었던 우리의 첫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