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괜찮아. 다시 시작될 너의 수많은 날들이 너를 기다리잖아.
우리는 우선 밴드 이름을 정하고 홍보지를 만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리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좋아했던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 C.S. Lewis. 의 이름을 빌렸다. 내 영어 이름 Claire, 그녀의 영어 이름 Sunny, 그리고 객원 보컬은 Lewis. 2012년 가을, 길고 장황하고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의 “C.S. 와 Lewis 밴드”는 그렇게 탄생했다. 사실 아마추어 무식자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기 어려워서 세 번째 인물 Lewis는 꼭 필요했다. 첫 번째 루이스는 나와 친했던 동생이자 Sunny의 친구이자 반주자로 도와주던 후배의 오빠로서 세 사람의 교집합에 위치해 있던 인물로 발탁됐다.
첫 공연 날짜와 시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 적으며 초대장을 만들고, 공연 콘티를 정했다. 고3 수능 전날에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었는데 매일매일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하루하루를 꽉 채워서 의미 있게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에 매일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이 살았다. 매주 수요일. 저녁 8시. 카페 잇다 정문에 우리가 손수 만든 낙서 같은 그림을 붙였다.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이 무슨 작당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마치 대단한 공연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 와전되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때 그 순간, 우연히 카페 잇다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그 이름도 거창했던 C.S. 와 Lewis밴드의 공연을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세상에 저런 모지란 사람들도 공연이란 걸 하는구나 싶었을 것이 분명하다. 애당초 나와 Sunny의 목적이 바로 그런 것이긴 했다. 서툴고 모자라도 괜찮다고 우리 같은 사람도 있지 않냐며 용기를 내자고 말하고 싶었기에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쉽게도 엔지니어 후배님은 저녁 일정이 많았던 탓에 정기적으로 우리를 도와줄 상황이 안 되었고 학원을 다니던 반주자 후배도 고정 반주자가 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수준에서 운용 가능한 장비인 마이크와 보면대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반주는 퀄리티가 좀 떨어지겠지만 서로 돌아가며 해주면 될 일이었다. 딸랑 보면대와 마이크, 마이크 잭을 든 우리는 씩씩하게 카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용감한 두 여인은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든 빛나는 추억으로 남든 간에 이왕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베자는 심정으로 낯 뜨거운 공연을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은 모험이다. 모험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도전할 수 있는 용기다.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 이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 끝은 무엇이 될지 그 누구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경험이 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며 맞닥뜨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는 소중한 인생 경험을 배우고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는 나의 공연들을 통해 현재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예측하지 못했고, 백수 신분으로 요양 중이었던 Sunny도 새로운 직장으로 스카우트를 받게 될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우리는 공연을 빙자한 자작곡 발표회로 카페 손님들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 다행히 우리 때문에 카페 손님이 줄어드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발생하지 않아서 감사했다. 손님들로 홀을 꽉 채워보겠다는 나의 앙큼한 목표는 5주 차 공연까지 단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었다. 오가던 손님 몇 팀과 우리를 아는 지인들로 채워진 홀은 언제나 고만고만했다. 그러다 그 앙큼한 목표는 기적처럼 6주 차에 이루어졌다.
당시 Sunny는 테러로 고통받고 목숨을 잃고 있던 GAJA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후원 콘서트를 열어 부상자 긴급지원 및 복구사업, 치유 프로그램에 쓰일 돈을 모아 YMCA에 보내자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인맥을 동원하고 후원 콘서트의 의의를 설명하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달라 부탁했다. 점점 커져가는 우리의 행보를 응원해주고 있었던 울산의 또 다른 밴드도 콘서트에 자발적으로 합류했다. 카페 사장님도 후원 콘서트 당일에는 특별히 조금 더 싼 가격으로 음료를 제공하겠다며 우리가 벌이는 일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셨다. 그리고 C.S. 와 Lewis밴드의 6주 차 공연에는 한 명이 아닌 많은 Lewis들이 자발적인 객원보컬로 함께해줬다. 대망의 후원 콘서트 당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수십 명의 손님들과 지인들이 카페 홀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그 날 모은 후원금은 기대 이상이었고 Sunny는 소중한 모금액을 YMCA로 잘 전달했다.
그 이후 Sunny는 YMCA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고 기발한 생각으로 후원 콘서트를 실행했던 전도유망한 청년 Sunny는 함께 일하고 싶은 멋진 인재였다. 그 이름도 거창한 C.S. 와 Lewis밴드는 S를 서울로 보내기로 하면서 점점 함께하기 불가능해지는 현실에 직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다름을 인정했다. 간간이 지인들의 초청으로 몇 번의 공연을 더 진행했고 축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으로 갔었던 결혼식 행사를 마지막으로 이름 하나 거창했덩 우리 밴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Sunny와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의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하며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사이가 됐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났을 때쯤, 나는 한 청소년 단체에서 청춘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았다. 내 재능을 높이 샀던 한 언니가 본인의 직장에 나를 추천해준 덕분이었다. 처음에 나는 혼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강연을 채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떨리는 마음으로 수락했다. 나는 나의 용감했던 도전들에 대해, 청춘에 대해 말하기로 결심했다. 강의 스크립트를 짜고 PPT를 만들었다. 읽고 또 읽으며 소요 시간을 점검했다.
역시 노래는 빠질 수가 없었기에 반주자를 섭외해야 했다. 이내 피아노 연주로 많은 칭찬을 듣고 있었던 언니 한 명이 떠올랐다. 언니의 멋진 피아노 연주에 맞춰 나의 노래를 기록으로 남겨도 되느냐고 부탁했다. 강연 날짜에 다행히 일정이 없어서 도와줄 수는 있겠다며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매의 눈으로 나의 악보를 훑어보던 언니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윤미야, 너 참 용감하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다. 이런 것도 자작곡이라고 가져왔냐는 비아냥은 아니었다. 나는 언니의 말을 내 맘대로 칭찬으로 해석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배우고 갖춘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서툰 모습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 청춘은 서툰 것이고 서툴기만 한 청춘의 걸음의 끝이 마침내 어디에 가 닿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미완의 청춘은 지지와 격려가 필요하며, 설사 그 길의 끝에 실패와 좌절을 만나 주저앉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안도현의 시처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문하며 다 타버린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는 말아야 한다. 뜨겁게 불태우고 남은 연탄재로 남을지언정 후회 없이 도전했던 용기는 청춘의 뜨거운 가슴을 증거 한다.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는 내 앞의 일에 대해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 많은 경험과 지식이 쌓여 연륜이 된다 할지라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여전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이 싹튼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에 도전하는 것은 그래서 가치 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잘 될 수도 있고 이전에는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멋진 일들을 이루게 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모험으로 사는 인생, 모험가의 심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