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시요일
늦여름인지 한여름인지 분간이 안되는 8월 셋째주 금요일 밤, 늘 모이던 까페에서 시요일을 시작했다.
내가 낸 첫 시집을 도서관에 갔다가 발견했다며 가져오신 분이 있어서
조금은 민망하면서도 조금은 뿌듯하기도 한 시작이었다.
수요일 아르바이트 때문에 참석이 어려웠던 멤버를 위해 금요일로 옮겨보았는데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들떠 보이는 분위기였다.
불타는 금요일을 위해 저녁을 간단히 드신 분들까지..^^
그리하여 2차는 울산 맛집, 닭백화점으로 정했다.
첫 시는 고영민 시인의 “나에게 기대올 때“
누군가는 서울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때를 떠올렸다.
한강 다리를 지날 때 봤던 노을과 그 때에 나오던 안내방송.
또 다른 분은 부산으로 통학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나눴다.
노포동으로 가던 버스에서 옆자리 남자분께 기대어 세상 모르고 꿀잠잤다는 민망한 이야기.
너무 창피해서 도망치듯 지하철에 올랐지만, 잠시 후 그 남자분도 같은 지하철을 타더라는 아찔한 이야기.^^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올려보자.
지하철이 덜컹일 때마다, 혹은 버스가 정차하거나 사람들이 우르르 타고 내릴 때마다
우리는 무수히 서로에게 스치고 부딪힌다.
고영민 시인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을 거쳐’ ‘나(안식처, 자아상)’에게로 가는 퇴근길 무수한 부딪힘들이 바로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사람들의 ‘기댐’을 나무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는 박노해 시인의 “아름다운 나이테”를 떠올리게 했다.
“삶의 나이테는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형성되는것
사랑이든 사건이든 사상이든
한번은 불꽂의 만남으로
한번은 얼음의 만남으로
-박노해, “아름다운 나이테” 중 “
인생은 무수한 스침과 부딪힘, 만남과 헤어짐을 흔적으로 남긴다.
그 흔적이 아름다운 나이테이길 바란다면,
나만큼이나 고단한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올 때 우직하게 버텨주면 어떨까.
그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도록, 그만큼이나 고단한 우리도 버텨주자.
진짜 나에게로, 진정한 평안함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테니.
두 번째 시는 이대흠 시인의 “다정에 감염되다“
과자 한 봉지처럼 다정을 담아내는 방법이 개발되어
다정을 주고 받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주 작고 작은 다정을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즐기는 삶을 상상해보다가
드라마 대사가 떠올랐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이 트여도 살만 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하는 학생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5분만 채워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김지원분) 대사 중-”
다정에 가시가 있다는 표현,
다정에도 발톱이 있다는 표현에서는
내가 애정하는 누군가에게 때론 엄한 사랑으로
혼내고 꾸짖는 것이 다정이란 뜻은 아닐까 짐작해 보기도 했다.
다정함으로 충만했던 8월의 시요일은
치킨집으로 자리를 옮겨 닭똥집과 마늘통닭을 뜯으며 배부른 마침표를 찍었다.
특별히 이번 모임에서는 서로의 이름과 연락처를 저장했다.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우리 모임의 속도가 참 좋다.
천천히 익어가는 것 같아서.
서서히 서로에게 흔적이 되는 것 같아서. ^^
다정에 감염되다
- 이대흠
다정에게는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아리 털처럼 순하고 병아리 눈동자처럼 동그랗습니다 다정은 손을 내밀고 다정을 담은 그릇에는 모서리가 없습니다 다정에는 가시가 많습디다만 너무 많은 가시에서는 가시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언뜻 본 다정은 안경닦이 같습니다 어떤 다정은 너무 커서 다정의 날카로운 발톱이 흙 언덕으로 보입니다 여력이 있다면 한평의 땅을 사는 것보다는 다정을 구입하는 게 낫습니다 다정은 소모되지 않고 늘릴 수 있으니까요
주의 사항은 있습니다
유통기한은 없습니다만 쉽게 흘릴 수 있습니다 다정을 과자 봉지에 넣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면 놀라울 것입니다 한봉지의 다정을 담아 건네면서 달의 이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다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독은 아니고요 감염된 건 분명합니다
내게는 갓 낳은 달걀 같은 다정이 또 생겼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병의 씨앗입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다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다정이 싹뜰 때가 오면 풀잎들처럼 나란히 앉아 봄을 낭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