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시요일
설 연휴에 아이들과 경주월드를 비롯, 아이스링크장과 찜질방 등, 여기 저기를 돌아다닌 탓에 피로가 덜 풀린 날이었다. 아이스링크장에서 잘 타지도 못하는 스케이트를 타다가 몇 번 넘어졌던 것도 한 몫했다. 오랜만에 출근을 하니 좀 찌뿌둥했지만, 연휴가 길어 숙제를 1.5배 정도 더 내주었는데도 성실히 잘 해온 학생들을 보니 감동이 밀려들었다. 기분 좋은 수업을 마치고 대충 김밥 하나를 사먹고 시요일로 달려갔다.
막내 회원이 손수 쿠키를 구워왔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포장지에 적어가며 예쁘게 싸온 모습에 언니들의 마음도 전부 감동으로 뭉클해졌다. 여섯 명이 오랜만에 다 같이 뭉쳐서인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첫 시로 손택수 시인의 ‘석류나무와 함께’를 읽으며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라는 질문의 의미를 던져 보았다. 붉음이 가지는 생명력, 사랑, 열정적인 느낌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생각, 출발, 도약, 모험심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3년을 동거한 석류나무를 오래도록 관찰한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과 , 여봐란듯이 뒤늦게 피어난 석류꽃의 피같이 붉은 색, 그리고 그 새빨갛게 새로 올라온 꽃이 빤히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물아일체의 순간까지, 우리는 시인의 시선으로 붉은 석류꽃을 마음으로 마주했다.
실은 오갈데 없이 한자리에 틀어박혀있던 쓸쓸한 사내가 가장 먼 곳까지 다녀온 여행기였다는 이야기의 서사는 슬펐지만, 그럼에도 살아지는, 여전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이 뭐 대수랴, 정진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철지나 꽃 핀 것이 뭐 대수랴, 자신만의 계절을 따라 찬란히 피어 나는 중인데. 석류꽃같은 붉음은 타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붉음의 흔적으로 인생에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나무의 수사학은 낭독하자마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역시 상을 받을 만 하네요!"라는 말에 다들 웃었다. 각박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을 '이 도시의 이주민'에서 감각한다. 순수하게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곧 사회생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다짐하며 오늘을 견딘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노동의 하루를 견뎌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하고, 이제 막 사회 초년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들의 고군분투하는 하루 같기도 하다. 벌레들이 뜯어먹는 내 몸의 이파리들도, 붕붕거리는 나비와 벌들도 신경증과 불면의 밤을 더없이 길어지게 하지만, 우리 모두는 '반어법'처럼 '꽃'으로 피어있다.
서울에 살던 시절의 이야기, 울산에 살면서 겪은 일, 여러가지 시도를 하면서 느낀 좌절감, 아무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하지 않는 정체된 직장 분위기, 등등 각자의 삶의 일면들을 공유했다. 참으로 사회생활이란, 다채로운 수모와 치욕의 경험들을 지나가야만 내공으로 쌓여지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반어법처럼 피어난 꽃같은 우리의 삶에 방점을 찍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알고보니 오늘이 생일인 분이 있었다. 이런 날에 어떻게 그냥 헤어질 수가 있겠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치킨집으로 출동했다. 집근처이신 분은 시원하게 맥주, 나머지는 사이다 콜라로 대동단결.
시대의 흐름에 대한 어떤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는 공동체, 커뮤니티의 결속이 혈연관계보다는 취향과 관심사로 엮여져간다는 것이었다. 시요일도 그런 모임 같다. 자기 마음 한 번 돌아다볼 시간조차 없는 분주한 삶을 살아가다보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끼며 살아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 잠깐의 시간을 내어, 잠시 쉬어가는 쉼표를 찍으며, 자신의 진짜 마음을 느껴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런 모임에는 시가 적격이지 않나 했다.
사실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 나눌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책방이든 까페든 뭐가 됐든 그런 공간을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상황이 못 되어서 분위기 좋은 까페를 빌려 모임을 하는 중이다. 바라는 대로 다 얻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뜻대로 원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그 와중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내가 바라던 대로 하고 있음에, 살고자 한 대로 살고 있음에,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