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든 직책
우리 집의 평범한 일상을 한 걸음 물러나 찬찬히 돌아보니 대부분이 투닥투닥 티격태격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집안의 든든한 두 기둥을 담당하고 있는 나와 남편이 제일 많이 싸우는 것 같아 뜨끔해진다. 별 것 아닌 일로 아웅다웅 실랑이를 벌이는 우리가 제일 많이 부딪히는 부분은 뒷정리 문제이다. 우리의 싸움은 대부분 여러 번 부탁을 했는데도 여전히 여기저기 남겨져 있는 남편의 흔적들 때문에 내가 화를 내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엄마의 격한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지구를 구하러 출동하는 영웅처럼 비장한 얼굴을 하고 달려온다. 우리 앞에 떡 하니 서서 통통한 배를 내밀고 손을 허리춤에 척 올리고선 “엄마 아빠 싸우지 마요. 사이좋게 지내요!” 라고 외친다. 내가 아이들을 교육할 때 했던 말을 아이들의 입을 통해 똑같이 듣고 있자니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아이들의 말을 거스르자니 앞으로 내 말을 듣지 않을 빌미를 주는 것 같고, 그렇다고 수긍하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작고 사랑스러운 영웅들은 우리 두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다시 평화를 택하고 집안 분위기는 다시 아름답게 정리된다. 그런데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과 아이들은 셋이서 하하 호호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기애애한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싸움을 말린 게 아니라, 화가 난 엄마에게 뜯기고 있는 불쌍한 아빠를 구해준 것일까? 설마, 이 구역의 악당이 바로 나였나?
네 식구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주말에는 연년생 자매님들이 끊임없이 싸운다. 둘째 혼자 달려가다가 제풀에 넘어지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언니가 밀쳤다며 열연을 펼치고, 그 새빨간 거짓말을 들은 언니는 밀치지 않았다며 억울해 한다. 적당히 수습하고 돌아서면 이번엔 둘째가 진짜로 울면서 달려온다. 언니 물건을 마음대로 뺏다가 꿀밤을 한 대 맞은 모양이다. 잠시 정신 줄이 끊기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침착하게 말한다. 동생에게는 언니 것을 만지고 싶으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그리고 언니에게는 아무리 화가 나도 동생을 때려선 안 된다고 말이다. 꾸중을 들은 두 아이는 오리처럼 입이 툭 튀어 나와서는 둘 다 내게 안아달라고 떼를 쓴다. 엄마에게 혼이 나는 일은 3살 인생, 4살 인생에게 있어 가장 중차대하고 슬픈 일일 것이라 생각하니 안쓰러워진다. 화해 모드를 켜고 두 팔을 벌려 아이들을 내 품에 안아 준 지 5초쯤 지났나, 두 아이는 서로 엄마 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로 밀치기 시작한다. 그만하라고 말을 해도 계속되는 신경전에 나는 결국 울화통이 터져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아내의 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이번엔 남편이 출동한다. 그는 큰 소리로 너희들이 또 엄마를 속상하게 했구나 이놈들, 하며 내 편을 들어준다. 남편의 한 마디 말에 내 속은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뻥 뚫린다. 그리고 아이들은 본인이 볼 테니 어서 다른 방에 가서 누워서 좀 쉬라며 내 등을 떠 민다.
Oh, you such a sweet guy!
남편의 따뜻한 말에 나는 순간 감동을 받고 열 받았던 마음은 사르르 녹기 시작한다. 그가 아이들과 거실에서 노는 동안 나는 홀로 방 안에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가슴 속 폭풍이 진정되고 나니 밖에서 셋이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에 내 입 꼬리도 동시에 스르륵 올라간다. 그런데 문득 또 기분이 약간 이상해진다. 남편은 과연 나를 위해 아이들을 데려간 것일까 아이들을 위해 나를 격리시킨 것일까. 나 빼고 셋이서 평화 연대라도 결성한 건 아닐까. 역시 또 이 구역의 악당은 나인 건가.
싸움을 거는 쪽도 화를 내는 쪽도 대부분 나라서 그런지 가끔은 정말로 내가 이 집의 빌런인가 싶기도 하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악당은 언제나 패배하고 만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소름이 끼친다. 실제로도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서 문제를 악화시키면 악화시켰지 문제를 해결한 적은 정말로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화가 난다고 화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고 마는 일은 없게 하자고 다짐해 본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말이다.
“여보, 나 이제 화가 나도 폭발하지 않는 연습을 하기로 했어.”
“가능할까?”
“뭐야?!”
“하하하하하.”
“아, 진짜 나 진지해. 화나게 좀 만들지 마.”
“내가 과연 널 화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야!”
작심삼일이 아니라 작심 일분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도 노오력을 해본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 하, 힘들다. 사실은 악당이 아니라 가장 힘든 직책을 맡은 거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