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티끌이었다

섣부르게 망함을 논하지 말 것

by 밝은 미인



어떤 날은 도저히 손쓸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손바닥 위에 얹힌 먼지 한 줌, 고작 티끌이었다.

얼마 전, 중학생 아이가 첫 중간고사에서 한 과목을 망쳤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쉬는 시간 내내 굳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 전 내 모습이 겹쳐졌다. 학창시절 답안지를 밀려 망쳐버린 시험지, 공무원 시험 낙방 소식에 울며 걸어가던 길, 체력시험을 앞두고 다친 발목. 그때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건 티끌이었다. 광활한 우주 속 작은 지구, 흔들리던 나의 작은 실패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았다. 내 인생조차 바꾸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하나의 실수로 인생이 끝장났다고 믿는다.
하지만 삶은 단순하지 않았다.
길은 늘 한 줄로만 나 있지 않았다. 어떤 길은 돌부리에 막혀 있었지만, 돌아가면 또 다른 길목이 나타났다.
눈앞의 문이 닫히면, 옆 담벼락에 작은 틈이 있었고, 그 틈은 또 다른 세계로 이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두드리지 않았을 뿐이다.

젊은 날에는 그 모든 말이 위로를 위한 허구라 여겼다.
그러나 살아보니 알겠다. 벽에 문을 그려 넣고, 터무니없다 여겨지더라도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문이 열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삶이 우리를 끌고 가는 방식은 늘 그렇게 불가사의하다.


몇 해 전, 수능시험 직후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들이 연이어 추락해 세상을 떠난 사건을 처리했다.
업무는 도장을 찍듯 차갑게 반복되었지만 아이들이 남긴 빈자리는 끝내 허탈하고 허망했다.
그 아이들이 본 것은 ‘닫힌 벽’뿐이었을까. 문이 있다는 사실을 제때 알려주지 못한 어른으로서 마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말의 무게는 무거워야 한다. 함부로 타인에게 꺼내서는 안 된다. 시간은 흐른다면 문은 열린다.


언젠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나도 지금은 글을 쓰며 또 다른 문 앞에 서 있다. 기회는 우리가 상상한 모양과 다를 수 있다. 때로는 엉뚱한 모습으로, 때로는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패의 순간 앞에 쉽게 ‘망했다’고 말하지만, 아직 현실은 망하지 않았다.


삶은 파도에 휩쓸리다가도 다시 파도의 흐름을 타는 일이다. 누군가는 허우적거리지만 누군가는 어느 순간 균형을 찾고 그때를 즐긴다. 오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점수는 너의 푸른 시절에 잠시 스쳐간 먼지일 뿐이다. 너의 바다는 아직 끝없이 푸르고, 아직 끝없이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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