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의 여행 2021년 12월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일을 할 때도 저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데이터 분석이나 관리에 능한 사람도 있다. 나는 창의적이지 않고, 숫자 놀이에도 흥미가 없다. 사람의 장점을 파악하고 그들이 최고의 역량을 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반은 감성적이고 또 반은 이성적인 애매모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향형이냐 외향형이냐 묻는다면 내향인 중에서 외향적인 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나마 정확하다. 한국어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동료 선생님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밝고 쾌활한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부 동기들은 차분하고 가까이할 수 없는 친구로 생각했지만, 친한 친구들은 개그 캐릭터로 없어서는 안 될 멤버라 말했다. 한때 본인이 이중인격인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 둘 다 가진 게 "나"인 것으로 정의 내렸다.
애매모호한들 어떤가. 어디든 애매한 것은 존재한다. 반드시 뜨거울 수만도 없고, 반드시 차가울 수만도 없다. 얼큰한 짬뽕을 먹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고, 아이스링크 장에서 찬 바람맞으며 씽씽 달리다가 맛보는 뜨거운 라면이 맛있다. 사람 몸은 결국 미지근한 것을 선호한다.
양평 순두부는 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유명한데, 여기 음식들은 미지근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체온과 비슷한 온도의 물을 한 컵 마시면 건강에 좋다던데, 기와집 순두부도 건강해지는 맛이다. 매번 주문하는 순두부 백반은 질리기는커녕 때가 되면 맛이 그립다. 도토리묵과 두부김치 모두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메뉴라서 대식가인 동행과 함께일 때 추천한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낮에는 조금 무리고, 저녁 타임이 여유롭고 비교적 안전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양평은 다른 국내 여행지보다 강렬하지 않아서 큰 기대 없이 일정을 계획했다. SNS에 당일치기 코스가 정형화되어 퍼져있는 만큼 색다른 무언가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특별함을 부여하고자,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구둔역을 찾았다. 폐역으로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기찻길인데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배우 수지와 이제훈이 등장한 바 있는 곳이었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는 봄이나 이미 푸른 여름에 오면 영화 속 분위기가 날 거라고, 인물이 다르기 때문임을 애써 부정하며(?) 여러 사진을 남겼다. 방문객이 적었으나, 지방에서 올라오신 어르신들과 몇몇 커플을 마주쳐 나름 여행 온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실내를 찾았다. 양평 청춘 뮤지엄에서 서울이 경성이던 시절을 돌아보며 만화 <검정 고무신> 속 배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각자 친구의 소개로 만나셨는데, 아마도 저런 풍경이었겠거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훗날 다음 세대가 지금 길거리에 만연한 카페를 신기해할 날이 올까 괜히 궁금해진다. 클럽도 내가 아는 홍대 클럽과 사뭇 달랐다. 제대로 된 클럽 한 번 안 가 본 사람으로서 상세한 비교는 불가하므로 지나친 장소였는데, 예능 다시 보기 클립 영상 속에서 패러디된 걸 보니 얼추 비슷하구나 짐작 가능했다.
첫 돌 문화는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연필을 잡았다고 했는데, 돈을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물정 다 배운 생각이 든다. 연필을 들어서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는 거라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보련다. 덕분에 있는 것을 활용하여 새로움을 발견하는 모바일 게임 기획자 경력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에디터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갑작스러운 햇살로 웅크린 어깨가 펴졌고, 양평 하면 떠오르는 두물머리로 향했다. 통유리로 된 카페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맑은 강과 초록빛 산과 들에 드리운 햇살을 보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친가와 외가 모두 불교로 종종 절에 가곤 했는데, 가족과 다 함께 올랐던 절 수종사의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경사가 가파르다 보니 더운 여름날 헥헥대며 산을 올랐고, 가만히 있어도 저린 팔이 그날로부터 일주일간 멀쩡했다. 신앙심이 깊지 않고, 부처의 가르침 상 잘 돼도 내 탓 안 돼도 내 탓이기 때문에 석가모니에 충성하지 않지만 불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다. 등산하고 절에 들리고 시원한 공기를 쐬고 내려오면 불면증 없이 푹 잘 수 있기 때문이다.
두물머리에서 유명하다는 핫도그를 나눠 먹고 산책 삼아 발 닿는 대로 걸었다. 금세 어두워졌고, 하늘이 이상하게 펼쳐져 있어 한 시간 전 일이 하루 전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12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게 푸근한 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거실 창문을 열면 물이 보이고,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 고개를 들면 초록 산이 보이는 곳이 내 집이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양평에다 집을 지으면 되겠다는 가상 시나리오가 마구 떠올랐다. 역시 창의적인 건 모르겠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가다듬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해피엔딩을 꿈꿨다. 서울 근교에서 살 거라면 양평이 적당하고, 지방으로 내려간다면 울산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울산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소개하도록 하겠다.
동행인이 예쁜 카페를 찾았다며 신나게 데리고 간 CAFORE. 건물이 갤러리처럼 화려하고 독특했는데, 실제로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겨울밤 공기를 피해 그림과 사진이 걸린 카페 2층, 3층을 둘러보았다. 날 좋은 오후에 방문하면 프로필 업로드 용 사진이 줄기차게 찍히기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카페 앞 조경도 입 떡 벌어질 만큼 넓고 반짝거렸다. 스위스 언덕 어딘가에 앉아 찍은 사진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맑은 하늘은 아니었던 일정이어서 흑백 사진을 여럿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했던 터널도 찾았다. 벗고개 터널로 연인들의 성지라고 하는데 내가 갔을 땐 다들 발길을 돌리는 추세였다. 날이 날인지라 앞에 사물이 있구나, 차가 오는구나 정도만 식별 가능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검색해보면 포토샵으로 만진 것 같은 예쁜 별 자국들이 하늘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친구들이 별 보러 땅끝마을 해남에 가자고 했었는데 거길 노려봐야 하나 싶다. 하지만 양평 벗고개 터널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행 코스만 보면 부모님이 잠깐 마실 다녀왔다고 하실 법한 단조로움이 엿보인다. 재밌게도, 나는 참 만족스러운 일정이었다. 액티비티 한 여행은 절대 짧은 기간 안에 소화할 수 없는 체력 소유자면서, 너무 가만히만 있어도 몸 둘 바를 모르는 이상한 성격 탓에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은 양평은 '애개'스럽지만 정온한 도시였다. 집에만 있기는 심심하고, 사람을 피해 좋은 경치 구경하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톡 쏘지 않는 물 비린내와 섞여 퍼지는 향긋한 풀 향을 머금고, 소소한 미소를 얼굴에 띤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쩐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