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날 응시하더니, 마지못해 계산대 위 생수를 집었다. 탁. 경쾌하게 들려오는 뚜껑 열리는 소리가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나와 그의 사이를 메웠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재빨리 편의점을 나섰다. 차가운 냉장실 안에 있던 생수는 뜨거운 조명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게 목구멍을 적셨다. 아, 살 것 같다. 지하철 출구로 향했다. 퇴근길은 어느 때보다 신나지만, 하루 중 가장 지쳐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면서 다행히 지옥철은 피할 수 있었다. 하루 4,5천 원씩 내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자의와는 관계없이 누구는 앉아 가고 누구는 서서 가는 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었기에, 계약직 프리랜서라는 직업은 만족스러웠다. 그뿐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었다.
'선생님 덕분에 한국어가 늘었어요, 또 선생님이랑 공부하고 싶어요.'
학생들의 강의평가는 양심을 긁어댔다. 철저히 가면을 쓰고, 귀 기울이는 척하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걸 남들이 알 방법이 무엇 있으랴.
'빌어먹을 계단. 여기 시장은 일을 하긴 하는 걸까?'
다른 정치인들은 멀쩡한 도로도 뜯어고치면서 예산을 펑펑 써대고 일하는 생색을 내는데, 왜 여긴 끝없이 이어진 지하철 통로 계단을 에스컬레이터로 바꿀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건지, 계단을 보기만 해도 지쳤다. 휴대폰에 집중한 어떤 사람이 앞서 지나가는 나를 보지 못하고 밀친 덕에 왕십리 역, 5호선 환승 계단 구간에서 구른 이후로, 손잡이 없는 내리막길은 심장에 무리를 가져왔다. 발도 떼기 힘들었고, 식은땀이 찔끔 삐져나왔다. 홍대역 8번 출구는 늘 내게 험난한 모험 길을 선사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끝 칸으로 걸음을 계속했다. 환승할 때 불편하긴 했지만, 군중 속에 파묻히는 것보단 나았다. 학생들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특정 구역만 지나면, 홍대역도 꽤 여유로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요즘 누가 치렁치렁 유선 이어폰을 쓰냐고 묻는다면, 내가 그 누구였다. 난 지금 너와 다른 세상 소리에 집중하고 있으니, 아는 척하지 말라고 티 내는 데에는 유선 이어폰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애초에 지극히 평범한 내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겠지만은, 남들과 단절되었다는 또렷한 느낌이 좋았다. 사람은 불편하고, 귀찮고, 성가신 존재니까.
톡톡.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방해하는 존재의 등장에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척, 질문을 해대는 귀찮은 학생에게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려는 선생님 모드로 빠르게 표정에 가면을 덧씌웠다. 귀를 타고 흐르던 클래식은 정지 버튼에 속수무책으로 끊겼다. 평온한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아, 저, 저랑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였다. 연예인급 외모의 사람에겐 감히 들이댈 수 없어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경우에만 도전해 본다는 번호 따기가 이런 건가 싶었다. 평균 키에 어깨뼈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 쌩얼인 줄 아는 옅은 화장, 일명 모나미 패션으로 불리는 하얀 셔츠에 검은 슬랙스 차림. 안전문에 비친 평범한 내 모습은 만만해 보이기에 충분했다.
"저요?"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 거절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속셈으로 되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뉘앙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우리 둘만 있어요."
1-1. 이 먼 곳까지 귀찮음을 무릅쓰고 걸어온 승객은 없었다. 아. 눈썹을 위아래로 살짝 움직였다. 남자는 웃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난 그에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쏙 들어간 한쪽 보조개가 귀엽긴 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따라가는 무모한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반응으로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그는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됐다. 그래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마침 지하철도 들어왔다.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이어폰을 다시 귀에 끼우고, 망설임 없이 왕십리로 향하는 2호선 성수행 열차를 탔다. 스테인리스가 아닌 헝겊 의자라 앉지 않고 벽에 기대 섰다. 다리 조금 아픈 게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세균 가득 의자에 앉는 것보다 낫겠다는 결정에서였다.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 돌아다니는 취객의 노상방뇨 사진을 본 뒤 생긴 습관이었다. 잔잔해서 좋기만 하던 피아노 음은 왠지 느리고 축 쳐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내일, 직장인들은 쉬는 토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서러움에 짜증이 나서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었다. 그게 아니라면 심장이 펌프질 할 이유는 마땅치 않았다. 괜히 그와 눈이 마주칠까, 창 밖은 문이 닫힐 때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 정도, 우스갯소리로 떠들만한 경험을 했다며 오늘을 열심히 지웠다.
그가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대사로 내게 말을 걸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