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1화>
"오늘 날씨 좋네요. 미세 먼지도 하나 없고. 여자친구랑 놀이공원 데이트 가고 싶은 날이에요."
지하철 옆자리엔 늘 그가 앉았다. 서 있을 때도 옆에 서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대학교 신입생 땐 이런 날 수업도 째고 동기들이랑 한강으로 놀러 가고 그랬어요. 한 놈이 요리하는 걸 좋아했는데, 소풍처럼 김밥을 싸오겠다는 거예요. 한강에서 무슨 김밥이냐, 치맥 하자, 너나 먹어라. 다들 시큰둥했거든요? 근데 기어코 싸와서는 남자 놈들끼리 돗자리 펴고 모여 앉아 먹었는데, 진짜 그렇게 맛있는 김밥은 처음이었어요."
정말 사소한 얘기였다. 남들도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법한 그런 이야기를 자신만 가지고 있는 설레는 추억인 것처럼 감상에 젖는 그가 신기했다. 몇 년 안 된 내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시험이 끝나고, 친한 친구들끼리만 가기로 했던 한강 소풍이었다. 유독 발이 넓은 친구가 어중이떠중이 다 끌어모아 인사 한 번 안 하고 지냈던 동기와, 이제 막 전역하고 복학한 선배까지 같이 간다는 사실을 5분만 일찍 알았어도 난 안 갔다. 강 둘레길을 걷고, 떠들고, 앉아서 맥주를 따는 그 순간까지 친절한 사람인 척, 즐거워하는 척하느라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른다. 술도 잘 못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가장 빨리 술 캔을 비웠다. 그리고 먼저 일어섰다. 술의 힘을 빌려 간신히 불편한 티를 내면서 영영 나를 니들 노는 곳에 끼우지 말라는 식의 멘트를 던지고. 그랬음에도 복학생은 동기 중 한 명에게 내 번호를 물어 끈질기게 연락했고, 차인 다음에서야 나를 철저히 무시했다. 난 그에게 관심이 없었고, 최선을 다 해 관심 없음을 표현했다. 얻어먹었다면 바로 갚았고, 그가 오랜 시간 만났다는 전 여자 친구와의 사연을 듣고 진심으로 다시 연락해볼 것을 권했다. 그런데도 그는 멋대로 제 감정을 강요해놓고, 뒤에서는 내 욕을 하고 다녔다. 그 뒤부터 조금의 친절도 베풀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치가 떨린다. 남들이 떠들어댔던 대로 모든 게 내 잘못인 거 같아서 나 스스로를 단속했다. 남들의 안주거리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옆에서 김밥 타령이나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어떤 우스갯소리로 멍청히 시간을 낭비하려나. 좋아했던 이가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게 치욕스러워 열심히 씹어댔을까, 사귀던 연인의 이별 통보에 분노하여 TV 뉴스를 화려하게 달구는 찌질한 보복 범죄를 상상해 본 적은 없을까. 그러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 술을 안 좋아하거든요. 치맥이니 뭐니, 어린 마음에 어른들 흉내 냈던 거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랑 살면서 김밥은 사 먹는 메뉴일 뿐이었는데, 친구 덕에 안 거죠. 그 정성의 맛을. 그래서 배웠어요. 나중에 기회 주시면, 한 번 대접할게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김밥 데이트 신청이었다.
"아, 김밥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너무 나갔죠? 뭐 좋아하세요?"
비싼 레스토랑을 데려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김밥을 대접하겠다는 데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순간적으로 놀라 정색했으니 다행이지, 혹시 들켰을까 조마조마했다. 학창 시절 어떤 동기가, 내가 잘 웃고 욕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에게 꼬리 쳤다고 생각했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신금호역을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이번 역은 신금호, 신금호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열차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지만, 내 옆 이 사람은 여전히 바보 같은 김밥 추억에 젖어 멍하니 있었다.
"안 내리세요?"
그는 나보다 두 정거장 전에 내린다. 혹여 타이밍을 놓치고 못 내릴까 염려되어,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허둥지둥 창 밖을 살폈다. 사람이 칠칠맞은 게 영 별로였다. 씨익 웃을 때 생기는 저 보조개만 아니었다면, 일주일째 같이 퇴근하는 일은 없었을 거였다.
"목소리 너무 예쁘세요. 인어공주 같아. 내일 또 봐요!"
내가 알고 있는 인어공주 결말은 물거품인데. 별로 좋은 예는 아니었다. 거기다 '너무' 예쁘다니. '너무'는 부정문에 사용되는 부사다. 한국어 강사인 내게 당연히 존재하는 강박증을 거슬리게 만드는 문법 오류였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연락을 주고받다가 보이는 맞춤법 오류에도 온갖 정나미가 떨어지는 건 심각하긴 했다. 어려운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부분을 틀리면 그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안 들었다. 그런데 왜 난 평소에 보지도 않는 스마트폰으로 굳이 인어공주를 검색했을까. 해피엔딩 버전으로 올라온 글들만 선택적으로 읽으면서 쓸데없는 데에 시간과 감정을 쏟아부었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집이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쓸쓸한 공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무너진다는데, 5분만 늦었어도 정말 그럴 것 같았다. 파란색과 회색으로 꾸며진 집은 차가움과 적막감을 안겨줬다. 집이라는 날 둘러싼 울타리는 좋았다. 세상과 단절시키는 안락함에 휘감기는 순간이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소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행복했다. 허무, 고독, 외톨이. 이게 나와 어울렸다. 그렇지 않으면 시끄러운 소음에 갇혀 가면을 쓰고, 불편한 사람과 웃긴 척 하하호호 떠들며 귀중한 시간을 버려야 했을 테니까. 우울함은 수용성이라 했던가. 샤워하면 씻겨 내려간다고 그랬던가. 물의 무게에 짓눌려 긴 머리카락이 축 쳐지는 건,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서 그냥 땅만 보고 걷는 건 우울함과 상관없는 일인지 궁금하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물은 놔두면 마르겠지, 수건으로 머리를 받치지 않고 거실을 그냥 돌아다녔다.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식탁에 올려둔 골무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힘껏 캔을 땄다. 날카로운 뚜껑이 따지는 소린지, 뼈밖에 없는 엄지 손가락이 두 동강 나는 소린지 구분이 안 갔다.
'캔 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우면 대체 난 왜 사니.'
지들끼리 웃고 떠드는 TV를 켰다. 예능은 애초부터 나와 맞지 않는 프로그램이다. 드라마는 지루하다. 차라리 영화가 낫다. 적어도 엔딩은 확실하니까. 내 삶도 불안정한데, 남들의 깊은 이야기가 궁금할 리 없다. 때리고 부수는 영화는 맨날 뻔한 스토리고, 히어로 영화는 유치하고, 로맨스를 내가 볼 리는 없고, 호러도 기분 나빠서 싫다.
'뭐 좋아하세요?'
지하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다 하다 환청까지 듣다니. 결국 영화도 고르지 못한 채 맥주 캔을 비웠다. 좋아하는 게 없었다. 신경질이 나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내일 또 출근하려면, 일찍 자는 게 나았다.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다. 삭,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뒤척였다.
"에라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기분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지, 그뿐이었다. 화장실로 가 칫솔을 입에 물었다. 원래는 침실로 쓸 용도인, 서재로 꾸며 놓은 하나 있는 방에 들어가 온통 한국어 강의 교재로 가득한 책꽂이에서 쓰다 남은 연습장을 꺼냈다. 제일 위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참 생각했는데, 종이엔 글자 대신 입에 문 치약이 떨어졌다. 급히 고개를 뒤로 꺾어 세면대로 향했다. 화해진 입 안 느낌이 상쾌했다. 이가 개운하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기분이었다. 마치 전공 수업으로 꽉꽉 채운 월요일에 전체 휴강 공지가 내려왔을 때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바르게 앉아 펜을 들었다.
평소에는 연락도 없던 동생에게서 별 소득 없는 안부 연락이 왔다. 엄마 아빠가 걱정하니까 연락 좀 하라는 뻔한 문자. 안 읽고 씹는 흔한 스킬을 사용하고, 싫어하는 것 7번에 즉시 옮겨 적었다. '연락하기'.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훨씬 많았다.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사람이었나, 나 자신이 측은했다. 오늘 하루 싫어하는 것만 벌써 7개 전부 다 했다. 더 많았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아서 관뒀다. 다시 거실에 있는 침대로 쏙 들어갔다. 김밥 한 단어를 좋아하는 것 칸에 적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