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I 없는 고요한 세상
"내가 좋아하니까 만나는 건데 어떻게 상대방한테 똑같은 크기의 마음을 요구합니까?"
오랜만에 만난 전 직장 동료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놀랐죠.
첫째, 이 사람 입에서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 '마음의 크기'가 등장했다. 둘째, 연인이라고 해서 상대에게 당당히 요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견은 처음이다.
저는 동의할 수 없었어요. 왜냐면, 저는 못할 거 같으니까요.
주변 환경, 분위기에 예민한 성격이라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저는 혼자 있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차분하다는 칭찬을 듣곤 하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을 타인에게 '굳이' 전달하지 않는 게 낫다고 배워서 티를 안 내다보니 감정 기복이 없는 늘 밝은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따라왔답니다. 사실은, 다 가식일 뿐인데 말이에요.
저를 주변에서 오랜 시간 본 사람들은 이런 제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요. 묻지 않는 것이 예의일 때도 있음을 알거든요. 때가 되면 말하겠지 생각하거든요. 정말 궁금하면 알아서 보고하기 전에 은근슬쩍 물어보기도 해요. 비밀이라는 상표를 달아놓지 않은 이야기라면, 거리낌 없이 대답하죠. 강요당한다는 느낌이 없어서 그런가, 부담도 안 느껴지거든요. 정말 술술, 편안한 대화를 하는 거예요.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들은 제게 실망하곤 해요. 이해하죠. 사회화된 저와 솔직한 저 사이에서 드는 괴리감은 저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사회화된 제 모습만을 원한다면 해줄 수 있죠. 알게 모르게 우리 사이에 선이 그어지겠지만요.
뭐 그런 거 가지고 선이 생기냐 싶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저인데. 까탈스럽고 예민해서 사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보다도 감정적으로 변하죠.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조심해왔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은연중에 이런 날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마음 넓은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해요. 벌써 상대방에게 요구할 게 있어요. 이래서 저는 전 직장 동료에게 반박했습니다. 그치만 꼬리 내리고 말았어요. 부모님이 제게 뭔가 바라신다면 그때 다시 도전해보려고요.
왜 질문이 들어오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남들의 TMI를 듣는 게 힘들어서 저도 안 하려는 거 같아요. 왜 혼자 있는 게 좋은 걸까 끝없이 되물어보면, 내 상태를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게 편해서인 듯하고요. 그러니까 즉, "편하고 싶어서" 자기만의 방식을 찾은 거예요.
편한 사람이 되고 싶고, 편한 사람들이 그리운 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