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서도 또

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7화>

by 글한송이

날은 순식간에 풀렸다.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은 또 여름이 되기까지 매년 반복되는 나날이 지루해서 하늘 한 점 보지 않다가, 이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아침저녁의 쌀쌀함, 그리고 한낮의 열기가 더해진 쾌청한 날이었다.


시환과는 꾸준히 연락했다. 하루 시작과 끝까지 온통 휴대폰만 본 게 아니라, 그냥 각자 세네 번 정도 할 말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가 고작 몇 통의 문자로 특별해질 수 있다니 어색하고, 기분 좋은 변화였다. 하루를 특별히 살면 인생이 특별해진다는 유명한 스타의 말처럼, 내가 특별해진 느낌과 동시에 이 순간이 오로지 순간에 그치진 않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한쌤 퇴근이네! 좋겠다!"


정쌤은 저녁 타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담당한다. 덕분에 낮밤이 바뀌었는데 요새 건강관리에 한창이라 그런지 호시탐탐 다른 학원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밝고 쿨한 성격이라 학생은 물론 동료에게도 인기 만점이었고, 원장이 붙잡고 놔주질 않아서 문제였다. 고로, 나와 달리 정쌤은 이 근로계약 관계에서 실질적 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을 잘 번대도, 건강이 우선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수요일엔 3시 30분에 더 이상의 수업을 만들지 않고 퇴근하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한송이 님의 신경외과 진료예약 금일 오후 4시 30분입니다.'


병원 검진이 있는 날이다. 담당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두 번씩 진료를 받고 있다.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시작된 건 3개월이 채 안 되지만, 경직, 경련 등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날로부터는 벌써 햇수로 5년이 지났다. 생일에, 친한 동생과의 약속에 아침 일찍 씻으려는데, 어깨부터 발끝까지 급성 마비가 와 가족이 팔다리를 주무르느라 오전을 다 보내버린 적이 있었다. 이후 픽하면 쓰러졌고, 심장 통증도 잦아졌다. 현재는 이 여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왼팔 사용이 힘든 상태다. 버스가 신호에 걸리지 않으려 시원하게 엑셀을 밟았다가 결국 빨간 신호등 불빛에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손잡이를 '왼팔 왼손'으로 붙잡기라도 하는 날엔, 수면제와 진통제 없인 밤을 꼴딱 새야 한다. 엄마 짐을 덜어주기 위해 장을 보러 갔다가, 내가 짐이 되어 돌아오기도 일쑤다. 증상 발현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사실 학창 시절부터 몸은 계속해서 경고해왔다. 음료 뚜껑을 따지 못했고, 청소도 힘들었다. 숟가락으로 찌개를 떠먹을 때도 왼손은 금단 현상을 심히 앓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덜덜 떨려 음식물을 다 쏟고 만다. 휴대폰을 오래 들고 있는 것도 무리다.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나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느낀지도 꽤 됐다. 잊고 있었던 진료 일정에 우울 색깔 먹구름이 몰려왔다. 시환이 보낸 카톡에 알람이 뜨자 착잡함도 커졌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남겨야 할 사람을 만든 내가 미웠다. 답장도 않고 학원 문을 열었다.




"다음 주에 다시 와. 더 안 좋아졌어. 요새 무리해?"


오랜 친구이자 내 담당의로 누구보다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친구, 차은형. 국내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고 국비 장학생으로 만 17세에 해외 의대 수석 졸업, 대학원 조기 졸업 후 현재 대학 병원에서 가장 어린 의사란다.


"통증은 똑같아. 오빠가 걱정이 많은 거야."


정말 난 올해 초와 별다른 차이를 못 느꼈다. 신경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컨디션은 비교적 괜찮았다. 하지만 은형 오빠는 여전히 얼굴을 풀지 않고, 모니터 속 검사 결과만 들여다봤다.


'진지한 걸 보니 좋아지지 않은 건 확실하네.'


워낙 걱정을 달고 사는 오빠긴 했다. 저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어떻게 환자들을 상대하려나 의대에 진학했다고 했을 때부터 의문이 컸다. 의사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차갑고 싸한 분위기는 그와 안 어울렸다. 개인적으로 의사에게서 나오는 아우라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은형 오빠와는 안 맞았다. 이런 대형 병원에도 다정다감한 의사가 있다니, 드라마 속 의사들이 꼭 가상 이야기 속에만 있으리란 법은 없구나 싶었다.


"봐. 너 팔꿈치 자체가 돌아갔어. 신경계 눌리는 건 일도 아니지. 정형외과에서 주사도 세 번 다 맞아서 이제 주사 처방도 못하는데 어쩌려고 막 쓴 거야."


어디다가 쓰느라 전문가가 혀를 찰 정도로 악화된 건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곰곰이 고민해보면, 답은 하나였다. 유시환. 카페인을 섭취했고, 쉬는 날엔 싸돌아다녔고, 활동량이 많아졌다. 이러니 책 앞에 앉아있을 때보다 무리가 갈 수밖에. 하지만 그를 탓할 건 아니었다. 아픈 와중에도 통증보다 즐거움이 더 컸고,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송이야. 너 진짜 조심해야 해. 수술까지 가게 되면 더는 길이 없다는 거 알잖.... 너 왜 웃고 있니. 이게 웃기냐."


환자는 난데, 정작 내가 히죽대고 있으니 어이를 상실한 은형 오빠가 정색했다. 크흠. 헛기침이 나왔다.


"좋은 일이라도 있어? 못 쓰게 될 왼팔은 걱정도 안 될 정도로?"


시환이란 마음 잘 맞는 사람을 알게 됐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주저됐다. 은형은 좋은 오빠고, 친한 친구이며, 지금껏 나의 상황을 다 지켜본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기에 숨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타박이 돌아올 것도 잘 알았다. 나락으로 떨어져 인생 포기상태에 이르렀을 때 치료에 집중하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고 어르고 달랜 건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아닌 은형 오빠였다. 우는 모습, 약한 모습, 내가 가장 추하다고 생각하는 그 나약함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에게 현재 내가 잠깐의 감정에 흔들려 치료에 나태해진 거라 말하는 건 어림없었다. 일단 숨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눈만 보고도 내 상황은 간파당했다.


"너, 연애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평소대로라면 무슨 헛소리냐며 피식 웃고 넘겼을 텐데, 내가 생각해도 어설펐다. 이래서 도둑은 제 발 뻗고 못 잔다는 거구나. 오빠가 고개를 11시 방향으로 살짝 꺾었다. 변명할 시간이다.


"... 그냥 알게 된 사람인데, 친해졌어. 연애 뭐 그런 건 정말 아니야."


무슨 관계냐고 확실히 규명하라 한다면, 나와 시환의 관계는 애매했다. 카페에서 각자 할 일을 한 후 헤어지기도 하고, 가끔 주말에 밥을 먹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겨울이 녹고 봄이 찾아온 다음, 이렇게 낮 시간이 길어진 초여름이 성큼 다가온 지금까지, 그와 나는 친구에 더 가까웠다.


"썸. 그런 걸 썸이라고 하는 거야."


은형 오빠가 한 단어로 복잡한 관계성을 정의해 버렸다. 연인 관계는 아니나 서로 사귀는 듯이 가까이 지내는 미묘한 관계.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가벼운 관계라고 부정 어린 시선으로 봐왔던 그 과정에 내가 발을 들여왔다니, 인정하기 싫었다.


"요즘 시대에 썸을 몇 개월씩 탄다고? 아냐."


"그 사람이 네 속도에 맞추고 있는 거겠지."


오빤 이미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당사자인 나는 몰랐던 내 감정을, 남이 더 빠르게 알아챘다.


"네 사정은 알고?"


"대충은."


그러니까, 지금 시환에게 기다려달라고 부탁을 하란 말이었다. 치료가 끝나고 정상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부끄러울 것 하나 없을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 이기적인 짓은 절대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이러는 오빠가 야속했다. 하지만 내가 바보 같이 굴었던 건 맞다. 난 조심해야 했다. 날씨 풀린다고 나까지 풀어져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적어도 내가 정해둔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되고 사치를 부려야 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사는 건 싫음을 넘어 경멸 수준이었다. 그런데 현재 내가 딱 그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맞아. 내가 경솔했어."


휴대폰 진동이 허벅지를 간질였다. 시환이 이름이 작게 떴다. 그러나 까만 배경 탓에 그 이름 석자가 가득 채워져, 오직 '유시환'이란 이름만이 마음을 새겼다.


"오빠. 나 애 아니야. 폐 끼칠 생각 없어. 적당히 거리 유지 잘할게."


"나중에 상처 받을 짓하는데 그냥 두고 보란 얘기야?"


"나 알잖아. 바보짓 안 해. 담주에 봐 오빠."


가방을 메고, 인사를 마쳤다. 싱긋 웃고 진찰실 문을 닫았다. 아까 답하지 않은 톡까지 총 두 번의 연락.


'오늘 일찍 퇴근하죠?'

'카페에서 기다려도 돼요?'


답장 하기엔 손이 느려서,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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