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파편

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8화>

by 글한송이

은형 오빠 덕에 현실을 자각했다. 시환에겐 먼저 출발했으니, 오늘은 각자 퇴근하자고 전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모르는 척하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에서 그를 만났다.


"송이씨?"


시환은 늘 신금호 역에서 내렸고, 그래서 집도 그 근처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다 오산이었다니, 말문이 막혔다.


"집이 이쪽이에요?"


수개월을 집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역에서 내린 이유가 뭐지? 왜? 도대체 뭐 때문에?


"송이 씨가 불편해할까 봐요. 내가 따라간다고 오해하게 두는 건 무서웠거든요."


소심을 넘어선 바보다. 그냥 나도 가는 길이다-하고 얘기하면 어련히 두고 볼 일을 이렇게까지 해야 했다니,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경계하는 게 훤히 드러나는데, 다짜고짜 그러면 부담될 것 같았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긴 하네요."


동아리 동기 중에 한 녀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늦은 밤, 으슥한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앞에 걸어가던 여성이 자신을 보고 긴장해서 걸음을 빨리 했고, 자기는 그게 짜증 나서 일부러 골려줬다는 수준 떨어지는 내용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동기와는 완전히 거리를 두고 지냈다. 누군가의 공포심을 자기의 장난거리로 삼다니, 최악이었다. 사슴이 매사에 긴장한 채 풀을 뜯어먹는 건 당연한 거다. 사자는 그저 대지에 누워 한가로이 낮잠을 잘 수 있겠지만, 우린 늘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한다. 불합리하지만, 세상이 그렇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다. 숱하게 겪어온 기분 나쁜 일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타인을 일반화하고 선입견을 가져왔던 거였다. 시환의 지나치리만치 깊은 배려심에 간신히 깨달았다.


"또 뭐 있어요."


"네?"


"나 속인 거. 또 뭐 있냐고요."


과한 반응을 보였다. 속일 목적으로 매일 몇 정거장을 걸어 다닌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뭔가 분했다. 신뢰는 인간관계의 바탕이고,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감도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썩소 한 번 날려주고 뒤돌아섰겠지만,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표정의 시환에게 등을 보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없어요! 진짜.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해요. 그냥,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죠."


타이밍은 늘 중요하다. 언제 치고 들어가느냐에 따라 인생사가 바뀐다. 그가 미리 말했더라면 난 어떻게 반응했을까. 처음부터 나와 같은 곳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환승했다면, 아무래도 난 완전히 그에게서 피하려 용을 썼을 테지. 그러니까, 그가 놓친 타이밍은, 우리가 가까워질 시간을 마련한 셈이다. 거기다 오늘은 그를 보지 않기로 했는데, 하필이면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은형 오빠한테 할 변명거리가 생겼다.


"설마, 하얀 버스 타세요? 청록색이랑 섞인 거?"


"어? 우리 동네 친구였나요?"


웃고 있는 입과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 찡그려진 미간과 치켜뜬 눈썹이 우스꽝스러웠다.




같은 버스에 올라타 나란히 앉은 상태다. 퇴근시간이랑 겹친 덕에 콩나물처럼 매달려 가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앉지 않길 바라며 가슴 졸이는 짓도 하지 않아도 됐다. 너무도 당연하게, 옆엔 시환이 있었다.


"여태까지 왜 몰랐던 걸까요. 버스까지도 같은데."


시환은 정말 신기해했다. 쭉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도중에 내리는 바람에 그 귀중한 시간을 놓친 게 답답할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가 곁에 있으니 금세 동화됐다. 몇 개월 간 그와 함께 집으로 향했더라면 엔도르핀이 빠르게 도는 지침 없는 귀갓길을 걸었을 내 모습이 그려졌다. 우르르 몰려 내려가는 사람들 덕에 상상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내가 내릴 차례였다. 창가 자리에 있었기에, 하차를 위해 시환에게 눈짓을 했다.


"아, 여기구나. 같이 내려도 돼요?"


그는 늘 내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든다. 거절 못하는 성격도 아닌데, 자꾸 여려지고, 순해지게 만든다. 그가 아니었어도 동네에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에 응했을까 가정해보면, 절대 아니었다. 부탁해오는 사람이 시환이었기에 긍정한 것이다. 은형 오빠가 걱정하지 않게 하는 건 내일로 미뤄야겠다.




"독립해서 사는 거치곤, 교통편이 너무 안 좋은데. 왜 서울로 안 나갔어요?"


직장은 홍대역, 사는 곳은 경기도. 월세에 교통비까지 나간다면 절대 효율적일 수 없다. 거기다 지하철도 개통일을 꾸준히 미루고 있어서 공기 좋은 거 말곤 장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난 서울로 옮길 생각도 없고, 그럴 만한 여유 자금도 마련하지 않았다. 버는 돈은 족족히 은행에 입금되고, 쓰지는 않으니 나이에 비해 풍족하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울살이가 돈을 버는 목적은 아니다.


"내 집이거든요."


17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이지만, 넓지도 좁지도 않아 딱 좋았다. 넓은 평수에선 청소하는 데 오전을 쏟아야 하고, 더 좁은 평수는 살기 답답하니 안성맞춤이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시환은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자랑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깨 움츠러들 일도 아니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개발되기 전엔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어요. 친구들 차 살 때 집 산 것뿐이고요."


옛날에는 내 집 장만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부모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요즘은, 주변을 보면 보통 차부터 사는 것 같다. 과시용이다, 실속 없다, 심한 욜로족 때문에 개인 빚이 커지고 있다... 많은 안 좋은 시선도 이런 세태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세대 갈등도 극으로 치닫는 게 아닐까 싶다. 주거가 먼저냐 개인의 편리함, 혹은 대내외용의 사치품이 먼저냐 하는 우선순위가 뭐 그리 대단한가 싶냐마는, 시대 흐름 상 OB와 YB가 충돌할 거리가 되고 있었다. 난 나돌아 다니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둘 중 누군가가 맞고 틀리다는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옳고 그름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함부로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송이 씨는 어른스러운 사람 같아요. 늘 하나씩 배울 게 생겨."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나도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애처럼 모든 걸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저렇게 단편적으로 내 행동에 기준을 둬버리면, 난 옴짝달싹 못하고 갇히고 만다. 지금껏 모든 사람의 기대에 맞춰 사느라 자아 정체성 따위 기르지도 못했던 것처럼.


"전 산재된 사람이에요. 나를 이루고 있는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다 모을 때쯤엔 관에 누워 있을 거고요. 누구랑 있냐에 따라서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거든요. 사회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로, 색깔이 없는 거죠."


맥주를 들이켰다. 커피도 모자라 술이라니, 못난이 청개구리처럼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있었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커온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건지,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갔다. 시환은 턱을 괴고, 내게 집중했다.


"어른스러움, 그거 정말 힘들어요. 난 어른이 되려면 멀었는데 자꾸만 나한테 어른이다, 어른답다, 어른스럽구나. 어렸을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애한테 자꾸만 어른이 되라고 세뇌한 거예요, 부모님, 선생님, 너 나할 것 없이. 그래서 아기들이 아기답게 노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짜증이 나. 아니, 그냥 애들이 무서워요. 정신의학과 전공한 친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내가 애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애들 대하는 법을 모르는 거라고. 그 얘기 딱 듣는데, 갑자기 울컥했어요. 자기 나이에 맞게 사랑받고 응석도 부리면서 컸더라면 내가 지금처럼 세상에 비관적인 사람으로 크진 않았을 텐데. 고유한 캐릭터가 없는 거예요. 누구보다 강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지만 있지 줄기는 없는 덩굴나무처럼."


술김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간 알코올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를 조종했다. 술은 이래서 싫었다.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없어져서 화가 났다. 병렬구조로 이루어진 내가, 술만 마셨다 하면 직렬로 바뀌어 손짓 한 번에 모든 시스템을 꺼버리는 단순한 인간이 되는 게 불쾌했다. 다음 날, 뇌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온 입방정에 혀를 잘라낼까 스스로를 저주하겠지만 오늘은 이미 글렀다.


"난 한정된 사람이에요."


여기저기 조각난 나와는 달리, 하나로 뭉쳐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뚝심 있다는 얘길까, 곧은 사람이란 얘길까.


"늘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거든요. 예상하기 쉽죠. 그래서 송이 씨 처음 봤을 때 엄청 당황했었어요."


지하철 역에서 다짜고짜 커피를 외쳤던 시환과, 지나치게 딱 잘라 거절했던 나.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래도,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휙 돌아선다면 누구든 상처 받을 수 있다. 이렇게까지 친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알고 보니 같은 동네 주민이었고, 알아갈수록 멋진 청년이었다. 양심 상 잘 살아왔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남들 눈엔 나름 열정적이었던 20대 초반을 보낸 걸로 비치는 삶을 보냈으나, 그에게서 배울 것이 훨씬 많았다. 무엇 하나에 몰두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퍼져 중구난방의 스펙을 쌓아왔던 나로서는, 시환이 부러웠다.


"미안해요. 파편이 날카로워서."


"그래서 좋은 걸요. 나한테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까. 닮고 싶어요."


시환에게 난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건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겠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유전적으로 영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인터넷 신문으로 접한 적은 있었지만, 난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믿지 않는다. 설사 연구가 일반화되기에 부족함 없는 근거를 내세우고 있다 하더라도 첫 끌림이 영원하리란 법은 없다. 그러니까, 시환이 몇 개월 째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섣불리 단언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경험을 기반으로 쌓은 개인적 데이터에 따르면, 쉽게 시작한 감정은, 간단히 사그라들었다. 시환도 이제 곧 지칠 테고, 그럼 정말 같은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시장 후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정도로만 남게 될 거였다. 갑자기 마음 한편이 쓰렸다. 아직 소주가 1/3 가량 남은 술잔을 응시했다. 차분해졌다. 남은 막잔을 털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캄캄한 하늘은 눈을 감았다 뜨면 파랗게 드리워질 거다. 언제나처럼, 속절없이,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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