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어깨 무릎 어깨 어깨 어깨

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9화>

by 글한송이

'한쌤, 토요일까지 기말 시험 문제 출제 마쳐주세요~ 굿밤!'


아. 깜빡할 뻔했다. 미리 조금씩 준비해두는 스타일이 아니었다면 실직하기 딱 좋은 정신머리였다.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한눈 판 적이 없었던 지라, 이런 상황에 놓인 게 충격이었다. 은형 오빠가 혀를 찰만 했다. 꼬박 이틀을 밤새워야 하다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을 적당히 마신 조금 전의 나를 칭찬했다. 씻고 나와 곧장 노트북을 켰다. 검수로만 끝낼 수 있기를 끝없이 바랐다. 시험을 보는 위치에 있을 때나 언제쯤 점수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까 울분을 토해내는 거라고 착각했다. 낼 때도 죽을 맛이었다. 학습자 수준보다 살짝 높게 출제한다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교수님들이 본인들 수준을 기준으로 잡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공부 욕구를 자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게끔 독려하는 난이도 조절은 해보지 않는다면 감히 별 거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사끼리 회의에 회의를 거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래도 불만은 나오기 마련이다.


'... 이건 너무 어려울까.'


한국어는 국어와 달라서, 외국어로서 접근한다면 상당히 깊게 파고들어야 했다. 언어를 수학적으로 계산해야 하는 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이래 놓고 그동안 영어 공부는 문법부터 따져왔으니, 백날 해봐야 늘지도 않았겠지. 언어엔 국가의 문화와 민족성이 담겨 있다고들 한다. 사람을 많이 만나 봐야 보는 눈을 높이고, 성장할 수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언어 공부에도 왕도가 없다. 그저 많이 노출되어 적응하는 게 유일하다. 시환이 나의 쌀쌀맞음에도 불구하고 성격 좋게 말을 걸어온 덕에 내가 그와 퇴근길을 나란히 한 것처럼.


"미쳤어. 여기서 유시환 씨가 왜 나와."


술집에서 나와 깔끔히 헤어지고 잠잠한 휴대폰이 야속했다. 잘 들어갔냐는 형식적인 인사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섭섭함이 들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늘 시환이 연락했는데, 이번엔 내가 먼저 해도 되지 싶었다. 일을 목적으로 한 연락 외엔 먼저 말을 꺼내본 적이 없어서 긴장감이 배가 됐다. 뭐라고 시작해야 하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느라 애꿎게 입술만 구겨졌다. 언제부터 간단한 연락 조차 겁을 내게 된 건지 답답했다. 밤이라서, 늦은 시간이라서 혹여나 자고 있는데 깨울까 봐 보내기 버튼 하나 못 누른다고 하기엔 나는 그리 배려심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한심스러웠다. 아서라 아서. 폰을 책상에 내던졌다.


지이잉-


탁 소리 나기 무섭게, 진동이 책상에 1.0 규모의 지진을 일으켰다. 은형 오빠였다. 모니터에 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11시 25분. 메신저 앱 알림이 시계를 가렸다.


'내일 퇴근 시간에 맞춰서 갈 수 있는데, 저녁 먹자.'


"시험 기간이라 이번 주는 바빠."


'일요일에도 안 돼?'


푹 쉬라던 사람이 꿀 같은 휴일에 불러내다니.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잔소리를 퍼부을 작정이겠거니 한숨이 푹 나왔다.


"점심 먹자. 저녁은 피곤해."


'근처 도착하면 전화할게.'


괜히 상처 받을 짓 하지 말라던 오빠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시환에게 연락을 해볼까 했던 충동은 완전히 수그러들었다. 톡 알림이 떴다. 누구이길 바라고 빠르게 클릭한 건진 모르겠지만, 실망스러움이 자리 잡았다.


'하던 거 끝내고 얼른 자.'


참 친절하다. 무슨 복을 타고나서 주변에 이렇게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이 남아 있나. 그리고 난 얼마나 못됐기에 이런 사사로운 연락이 귀찮은지 인격 수양이 필요했다. 힘든 경제 상황에 캥거루족이 많은 시대에 꿋꿋이 독립을 선언한 건, 부모님과 생활 패턴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끼니를 꼭 챙겨 먹어야 한다든지, 늦은 밤까지 불을 켜고 있을 수 없다든지 하는 애로사항이 있었다. 잔병치레가 많은 몸이니 당연히 신경 쓰실 수밖에 없고, 난 그게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작용하니,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마음이라도 편했다. 적어도 나는.


'오빠도. 굿밤.'


다시 한글 파일로 눈을 돌렸다. 전화를 받았으면 지금이랑은 사뭇 다른 기분이려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퇴근길에 시환이 쫑알거림을 들으려면,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눈알이 빠지도록, 밝은 화면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글 소재로 채워졌다. 못다 쓴 미련 남는 글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출근길이 험난했다. 버스에서는 사람들 틈에 껴 이리저리 흔들렸고, 지하철에서는 쏟아지는 잠에 중심을 잡으려 손잡이를 왼손으로 쥐고 말았다. 왼쪽 어깨엔 가방을 메는 게 불가능해서 오른쪽 어깨가 짐을 짊어지는 통에 계속 쑤셨다. 어렸을 땐 일주일 씩 밤을 새워도 멀쩡했는데, 이젠 24시간 깨어있는 것도 지쳤다. 나이 탓을 하기엔 체력이 더 쓸모없었다.


"한쌤, 시험 문제 제출했어? 아직이면 이따 오후에 같이 내고 퇴근할래요?"


"아, 전 마감 맞춰서 내려고요."


"어머, 한쌤이 나보다 늦게 낸다고? 무슨 일 이래. 설마, 그때 그 아르바이트생이랑 진짜 연애라도 하는 거예요?"


김쌤은 오버스럽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주변에 있던 다른 강사들까지 몰려들었다. 일이 피곤해졌다.


"뭐예요, 한쌤 연애해요?"


"전에 내가 소개팅 시켜준다 했을 땐 관심 없다더니, 자만추 파였구나?"


아. 시끄러워. 애써 미소 지으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학생 한 명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한송이 선생님, 질문이 있어서 왔어요."


시험문제 출제 기간이라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고, 내가 나가야 했다. 숨통이 트였다.




수업을 끝내고 곧장 퇴근했다. 마지막 수업 시간 전에 짐을 다 챙겨 나오길 잘했다. 시환이 있을 카페 앞에 도착했다. 보통 창가 쪽에 앉아 금방 찾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보이질 않았다.


'어라. 따로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쪽에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녹음된 음성 파일을 흘려보냈다. 왠지 싱숭생숭했다. 잠깐 기다려볼까 하다가, 밀린 업무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뒤에서 시환이 날 부르지 않을까 자꾸만 속도가 늦춰졌다. 그래서 꼬인 건 전단지 아르바이트생, 도를 아십니까 종교 단체가 끝이었다. 지하철을 탈 때까지 휴대폰은 잠잠했다. 스테인리스 의자였고, 자리 하나가 비었다. 잠깐 눈을 붙일까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붙였다. 앉자마자 눈이 감겼다. 꾸벅꾸벅 조는 걸 넘어서, 아예 잠들었다. 옆사람 어깨에 기댄 건지 목이 머리 무게를 견디지 않아도 됐다. 민폐 끼치는 건 인지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송이 씨, 우리 곧 내려야 해요."


어라? 날 깨우는 다정한 목소리에 감겼던 눈이 확 떠졌다. 널찍한 어깨에 기대 있다가 휙 머리를 세웠다. 시환이었다.


"시환 씨? 언제 왔어요?"


시환은 내 손을 움켜쥐고 지하철에서 빠르게 하차했다. 하필이면 왼팔이라, 뼈가 녹스는 느낌이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타고 흘렀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란 게 먼저였다. 5호선 열차에 탑승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해서 눈치가 보였다.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 방송도 뭉개졌고, 금속끼리 부딪혀 소름 돋는 소음을 내며 들어오는 열차 소리도 미약하게 들렸다. 시환의 입이 언제 열릴까, 그의 숨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은 5호선, 좌석은 꽉 차 있어서 그는 칸 맨 끝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미안해요. 처음으로 온 전화였는데, 그걸 못 받았어. 하."


주머니에서 새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는 시환의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이 고작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니 풉 웃음이 나왔다. 긴장이 풀어졌고, 마침 묶여 있던 옆 머리칼이 살짝 삐져나와 관자놀이를 가렸다. 시환은 나를 따라 미소 지으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쁜 줄 알았어요."


"송이 씨 보려고 바쁘게 사는 거예요."


"오늘은 휴대폰 바꾸느라 바빴겠네요?"


TV만 틀었다 하면 나오는 광고 덕분에 시환이 신형 휴대폰으로 바꿨음을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문제 있단 얘기는 못 들었는데,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 했던 걸까 이유가 궁금해졌다.


"어제 목욕하다가 송이 씨한테 잘 들어갔냐고 물어보려다가 손 물기 때문에 미끄러져서 물에 완전 빠뜨렸거든요. 그래서 방수 제대로 되는 걸로 바꿨어요. 이제 절대 송이 씨 전화 놓치는 일 없을 거예요."


어제 전화했어도 부재중 전화 하나 안 떴으리란 소리였다. 은형 오빠가 결심이 서기 전에 연락을 준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래 깊은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어쨌든 같이 집으로 향하는 중이라 몸 전체에 온기가 돌았다. 에어컨이 강력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차가운 손은 시환에게 잡혀 서서히 녹아갔다.


"여긴 시원해서 손이 안 미끄러지나 봐요. 피가 안 통하네."


의식해버린 다음에도 그냥 두기엔 자신이 없어서 왼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시환이 깜짝 놀라 손을 풀었다. 손끝이 찌릿했고, 하얗게 질려 있던 손바닥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온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불쾌했으면 미안해요. 너무 곤히 자서 가능한 한 늦게 깨우려다가 내려야 해서 무작정 잡았어요."


맞다. 어깨에 기대 잠들었지, 참. 잠은 집에서, 바깥에선 흐트러짐 없이 생활하자는 다짐을 몇 년 만에 깨버린 날이었다. 이번엔 내가 사과해야 할 차례였다.


"나도 미안해요. 어깨 아팠겠다."


시환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밤을 새운 바람에 못 버텼어요. 폐 끼쳐서 미안해요."


"내 어깨가 불편했어요?"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너무 잘 자서 탈이었다. 독립하면서 엄마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숙면이었다. 워낙 불면증을 심히 앓기도 했고, 통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할뿐더러, 혼자 자면 악몽을 달고 살았기에 다 커서도 동생이나 엄마가 필요했다. 한 번은 가위에 심하게 눌려 방에서 거실까지 기어나갔는데, 그 기억이 없었다. 잠 귀가 밝아 낯선 곳에서는 더욱이나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아까는 마치 병원 물리치료실에 누운 것처럼 편안했다. 오랜만에 느껴본 단잠이었다.


"아뇨, 편했어요. 내 말은-"


"나도. 송이 씨가 나한테 기대서 편했어요."


따뜻함. 봄이나 여름에 태어난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정도 많고 따뜻하다던데, 근거 없는 미신이 믿기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고개를 내려서 나와 눈높이를 맞춰 이야기하는 맑은 눈동자에 비친 내가 보였다. 이렇게 바보 같은 모습이라니. 하지만 지금 같은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하는지 몰랐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결국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후끈해졌다. 지하철이 지하에 있는 게 다행이었다. 창문이 햇빛에 반사됐으면, 붉게 달아오른 낯빛을 다 들켜버렸을 거다. 흑백 카메라 효과를 주는 지하 캄캄한 벽이 반가웠다.


"나도 밤새웠는데, 휴대폰만 아니었음 연락할 수 있었겠다. 그쵸?"


시환이 허리를 펴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 나와 같은 방향으로 섰다. 나야 일 때문에 뜬 눈으로 지새웠다 치고, 이 사람은 무슨 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 안쓰러웠다. 취준은 시대를 불문하고 피를 말리는 끔찍한 시간임이 틀림없었다.


"교수님 말씀대로 산학협력단은 생각 없어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밤 새운 거였어요. 졸업 논문까지 겹쳐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출이거든요. 오늘도 자긴 글렀네요."


내 어깨에 고개를 푹 묻는 시환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일생일대에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을 술집에 데려가고,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잠깐 눈 붙이지도 못하게 마음 놓고 푹 잠들어 버린 스스로가 끔찍이도 미웠다.


"나도 오늘까진 밤새워야 해요. 시험 출제 기간이라."


학원은 학교 시험기간과 거의 비슷한 때에 맞춰 진행됐다. 대학기관 어학당은 대부분 대학교 일정과 동일했기 때문에, 어학당과 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학생은 예습, 복습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됐다. 학원 근처 학교보다 일주일 정도 빨리 보기 때문에 학원 성적은 낮아도, 어학당에서의 성적은 다음 급수로 넘어가는 데 무리 없게 받을 수 있었다. 어학당을 다니면서 학원까지 오는 경우는 정말 고급이거나, 집이 유복해서 여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렇게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지만, 원장은 이 점을 내세워 학원을 홍보했다. 몇 학생들이 학원 시험과 학교 시험이 겹쳐 괴로워하는 건 나몰라라였다. 어쩐지 질문하러 오는 학생들이 좀 많았다 했다. 왜 시환도 시험 때문에 골치 아플 거란 생각은 못했을까, 배려심이라는 게 배워서 안 되는 거란 걸 새삼 깨달았다.


"정말요? 그럼 서로 잠들지 않게 때 되면 전화할래요? 깨워주는 거지. 목소리 들으면서."


학교 다닐 때 주변 친구들이 꽤 써먹었던 방법인 건 알지만, 나는 껴본 적이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되면 매시간 연락해야 한다는 룰이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순간, 나답지 않게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집 근처에 24시 카페 있는데, 같이 안 할래요?"


전혀 무겁지 않았던 어깨가 반대쪽과 마찬가지로 텅 비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환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지하철 창에 비쳤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어깨 빌려주면서. 안 돼요?"


"돼요. 내 어깬, 아까부터 송이 씨 거 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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