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성), 인간

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10화>

by 글한송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뜯지도 않은 바디로션을 군데군데 거칠어진 팔과 다리에 발랐다. 수건으로 긴 머리를 감싸 바닥으로 물 떨어지는 걸 막은 다음엔 빠르게 짐을 챙겼다. 노트북, 교재, 노트와 필기구...


'칫솔 치약도 챙길까?'


자리값 때문에라도 음료니 케이크니 주문하겠지만, 종일 먹진 않을 테니 입이 텁텁해지는 건 불가피했다. 가뜩이나 밤을 새워야 해서 체력적으로 지칠 건데. 실수로 정말 잠들어버리면 그건 더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치약 칫솔은 챙기는 게 맞았다. 화장이야 원래 잘 안 하고 다녔으니 톤 업 크림이면 괜찮았다. 아니, 오늘 유독 못생겨 보여서 화장대를 지나치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티 안 나게, 최대한 옅게 아이라이너로 점막을 채우고, 눈썹 칼로 지저분하게 난 눈썹을 다듬었다. 입술에 색이 없어 아파 보였는데, 분홍빛 립스틱을 바르니 생기가 돌았다. 이제 좀 사람 같았다. 음마마. 은은하게 퍼진 입술색을 한참 보다가, 수건을 풀러 머리를 빠르게 말렸다. 자연적으로 마르도록 두는 아침과는 다르게, 정성 들여 드라이했다. 어차피 묶기야 했지만, 그래도 손질을 했냐 안 했냐는 차이가 있었다.


"늦었다."


조금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음에도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로 갈아입고 가방을 멨다. 휴대폰 배터리가 30%였지만, 충전기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시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바로 뛰쳐나왔다.



시환도 막 도착한 건지 카페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리해서 뛴 탓에 심장이 몸속 장기를 뒤흔들 정도로 울려댔지만, 많이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마음만은 편안했다. 아직 내가 온 걸 모르는 눈치라, 미리 음료를 주문하러 갔다. 요새 키오스크가 보편화되면서 점원과 일일이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한텐 썩 좋은 시스템이었다. 기계 적응력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이건 금방 익숙해졌다. 어르신들은 불편해한다는 뉴스 보도를 본 적이 있어 그런 경우엔 도와드리려 하는 편인데, 지금처럼 늦은 시각엔 손님이 많지 않아 오지랖을 떨어야 할 일도 없었다. 빠르게 주문 버튼을 클릭했다. 시환은 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나는 카페인이 없는 티 종류를 골랐다. 그래서 영수증을 받고 시환이 있는 자리로 가기까지 3분도 채 안 걸렸다.


"어? 나 여깄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니 시환이 놀라워하며 동시에 반겼다.


"뒷모습 봤어요. 아메리카노 맞죠?"


"네. 송이 씨는 애플민트죠? 주문했으니까 일단 앉아요."


이런. 시환이 먼저 주문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앉으려다가, 손에 들린 진동벨을 보여줬다. 테이블에도 똑같이 생긴 진동벨이 놓여 있었다. 심지어 먼저 불빛을 내며 요란히 울려댔다. 곧이어 내 진동벨도 지이잉 소리 냈다. 우린 같이 픽업대로 가 똑같은 음료를 받아 왔다.


"커피 두 잔이면 잠 안 자고 다 끝낼 수 있을 거 같아요."


하하. 각자 음료 두 개씩 두고, 마주 보고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기말 대체 과제를, 나는 시험 문항을 출제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스타일이 맞는 친구를 찾기 힘들어 늘 혼자였는데, 같이 각자 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니, 심지어 집 근처에서 가능하다니, 신이 나서 일도 더 잘 풀렸다. 내일 오전까지 간신히 마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어쩌면 오늘 내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상큼한 애플민트로 간간이 목을 축이고, 문항을 검수했다. 팔 통증이 갈수록 심해져서 앞에 시환이 있다는 건 완전히 잊고 중간중간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풀어주고, 팔꿈치도 주물렀다. 찌릿한 느낌이 끔찍이도 싫었다. 생각해 보니 처방받은 약을 어제는 술 때문에 거르고, 오늘은 잊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일요일이 벌써부터 지쳤다.


지이잉.


배터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진동이 울렸다. 오후 11시 25분. 은형 오빠였다.


"오빠도 양반은 못 되네. 마침 오빠 생각 중이었는데."


'영광이다, 내 생각도 해주고.'


"약 깜빡했어. 미안, 미리 고백했으니까 봐줘."


어쩐지 전화를 다정하게 받은 게 이상하다 생각했다며 전화 상으로 잔소리가 이어졌다. 만나서 들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만, 수화기 너머 소리는 더욱 거부하기 쉬웠다. 통화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시환이 책에서 눈을 뗐다. 입모양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잠깐 밖으로 나갈까 했더니, 시환이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밖이야?'


"응. 카페에서 일하는 중."


'그리 갈게.'


"아냐, 아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


시환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째려봤다. 하지만 친구라고 정의하고 싶진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한 번 정해진 카테고리에 담아버리면, 그룹 이동은 절대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환은 모르겠지만, 은형은 알아 들었다. 그래서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도 일 남았어. 어디야, 그리로 갈게.'


"오빠 동네 놔두고 왜 여기까지 와. 됐어."


'송이야-'


하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말썽이었다. 속으로 쾌재가 터져 나왔다. 여길 오겠다니. 가끔 은형 오빤 이해할 수 없는 짓들을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천재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인으로서는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일종의 증후군이겠거니 생각했다.


"통화가 이렇게 갑자기 끝나요, 아는 사람 씨?"


꽁해 있는 게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배터리가 다 돼서요. 괜찮아요. 집 가서 연락하면 되니까."


"내 걸로 해요. 여기까지 온다는 거 보면 아는 사람 이상일 거 같은데."


시환은 휴대폰을 건넸다. 굳이 전화를 다시 해야 할 필요까진 못 느꼈지만, 괜히 시환을 놀려주고 싶어서 순순히 받아 들었다. 가족 번호는 가물가물해도, 은형 오빠 번호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시환이 숨을 토해내며 상처 받은 척 연기했다. 통화 상대가 조금 친한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만일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됐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그처럼 장난스럽게 넘길 수 있었을까. 통화가 연결되는 동안 잠자코 입장을 바꿔봤다. 시환의 휴대폰에 동네 주민 1로 저장되었다고 한들, 속상할 권리는 없었다. 서로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어서 그거여도 괜찮았다.


'차은형입니다.'


"나야, 폰 배터리 다 돼서 꺼졌어. 이건 시환 씨 휴대폰이고."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주민 1은 묘하게 거슬려서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자 시환이 턱을 괴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소에 보조개가 옅게 파였다.


'T 카페야?'


"다 했어. 들어갈 거니까 걱정 말고 자. 오빠 오는 게 더 불편해."


오빠는 이미 나온 상태였다. 목소리가 울리는 게 집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이 틀림없었다. 이미 나온 사람한테 다시 들어가라고 하는 게 얼마나 힘 빠지는 말인지 알면서도, 기어코 사양했다. 시환을 경계하는 걸 알았다. 내가 또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크게 데일까 신경 쓰는 거라 나무라는 것도 이기적이었다. 오빠 앞에서 죽을 것처럼 오열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예민한 반응은 다 내 탓이었으니.


'집에 들어갈 때 연락해.'


"폰 꺼졌다니까. 시환 씨가 데려다주겠지. 걱정 말고 주무셔. 일요일에 봐, 오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었고, 앞에 사람을 두고 계속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고마워요."


휴대폰을 돌려줬다. 시환은 폰을 가방 안에 넣어 버렸다.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했다. 거의 다 하긴 했지만, 오류나 맞춤법 오류라도 나왔다간 큰일이라 몇 번이고 검수 과정이 필요했다. 여태 한 번 하지 않았던 실수를 저지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많이 친한 오빤가 봐요. 폰 번호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면."


시환은 책을 아예 덮고 심드렁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나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만도 해서, 잠깐 쉬어갈 겸, 나도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알고 지낸 지 20년 정도 됐으니까요. 못 볼 꼴 많이 보여줬죠. 내 존재 자체가 민폐일 수도 있고."


곰곰이 돌이켜보니, 오빠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에 다다랐다. 난 늘 오빠에게 기댔다. 툭하면 술에 취해, 자는 오빨 깨웠고, 울었고, 아픈 몸 때문에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할 바에야 그냥 죽겠다고 아무도 없는 외딴곳에 가 숨은 적도 있었다. 결국 오빠가 날 찾아냈다. 사람들에 의한 스트레스로 은둔형 외톨이가 됐을 때, 우울증이란 늪에서 꺼내 준 것도 은형 오빠였다. 그러니까, 그는 나에겐 수호신이었고, 나는 그에게 짐이었다.


"송이 씨는 누군가한테 받아들여져 본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앞통수에서 뒤통수로 머리를 한 대 맞았을 때의 띵한 전율이 옮겨갔다.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는 건 결코 상쾌함을 주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는 나를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땐 깨달음을 얻기도, 고통스럽기도 했다. 아는 게 힘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데, 난 약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피했던 '나'를 시환에 의해 마주했다.


"사람들한테 데어서 최소한의 방어막을 두르느라 폐 끼친다는 말이 입에 붙은 거 같아. 속상하게."


세상을 향해 우렁차게 울며 바깥으로 나오면서부터 날이 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격은 유전자와 환경적인 것들이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까칠한 엄마와 냉정한 아빠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조성한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했다. 친구들과 잘 놀러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나아갈 미래가 흥미진진한 꿈 많은 아이였다. 건강이 상하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처는 흉터를 새겼고, 더는 살갗을 딱딱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미리부터 반창고를 붙였다. 아프긴 해도, 까지고 피 흘리는 건 싫으니까, 그게 최선이었다. 그걸 은형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알았다. 내가 티 내기도 전에, 바라지도 않았는데, 습관적으로 내뱉은 한 문장으로 알아버렸다.


"선 넘었으면 미안해요. 나랑 있을 땐 그런 생각 안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


"송이 씨는 내 선 넘어도 돼요. 넘어줬음 좋겠어요."


눈물이 핑 돌아, 울지 않으려 두 번째 잔의 음료를 벌컥 마셨다. 시환의 마지막 말에 눈물도 쏙 들어갔다. 애플민트 티엔 카페인이 잔뜩 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릴 리 없다. 시환의 감정을 알면서도,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온화한 미소가, 쏙 패인 보조개가, 처음엔 거부했던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을 이제는 함께 밤 새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편안했다. 몸은 지쳐만 가는데, 맘은 숲길을 걷는 것처럼 갈수록 깨끗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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