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였을 거예요. 에메랄드 빛 호수, 푸르른 산, 투명한 공기,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하늘, 하늘 길을 걷는 패러글라이딩, 꽃으로 가득한 땅 길을 걷는 저.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말이죠. 이렇게 석사 졸업 논문으로 매일 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줄은 그땐 몰랐습니다. 전 잘 못 자는 편이에요. 요새는 치료 약 때문에 그래도 눈을 감고는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선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아 그런가 봐요. 왜냐면, 유럽 여행을 하면서는 네 시간을 자더라도 푹 자서 다음 날 힘이 넘쳤거든요. 인터라켄의 상쾌함은 무려 3박 4일 내내 불면증 환자를 숙면하게 만들었어요.
하더클룸 가는 길
10시 23분 파리 리옹 역에서 TGV를 타고 출발해 13시 26분에 도착한 바젤 역, 스위스 패스로 인터라켄까지 오니 거의 16시였죠. 원래대로라면 고된 기차 여행에 지쳐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드러누웠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기운이 울끈불끈 솟아나더라고요. 동생도 마침 그렇다길래 숙소 바로 근처에 있는 하더클룸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더클룸은 인터라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아주 멋진 전망대로, 관광객을 단체로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숙소에 들어서기 전까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마주쳤어요. 다들 환상적인 풍경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바빴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원래 여행할 때 일정 부분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편인데, 이날은 내일 예정이었던 장소를 방문해서 그런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이랑 야간 자율학습을 몰래 빼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간 때의 느낌. 살짝 불안은 하지만, 작은 일탈로 별 거 안 해도 신나고, 즐겁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상태. 이 순간이 딱 그랬어요. 그저 좋기만 했죠. 프랑스 파리는 수도이자 번화가이고, 현지인 관광객 구분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도시인 반면, 스위스 인터라켄은 시골이라서 잔잔히 흘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들이 다 불편하기만 했거든요. 인프라가 좁은 것도 그렇고, 느긋하게 돌아가는 분위기가 성격 급한 저한테는 답답하게 느껴졌으니까요. 거기다 혐오를 넘어 두려움, 공포의 대상인 벌레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바다를 보는 건 좋아하지만, 물놀이를 하고 나면 반응하는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해수욕장을 자랑하는 화려한 지역들도 꺼려지긴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인터라켄에선 그런 게 일절 없었죠.
하더클룸에서 찍은 전경
여전히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연둣빛 풀과 옥색 물, 하늘색의 완벽한 정의가 되는 하늘과 태양, 구름의 조화가 이루어낸 도시 촌놈 개선 프로젝트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해볼 뿐이죠. 얼마 전에 양평에 있는 수종사에 다녀왔는데, 그때 인터라켄에서의 전율을 살짝 맛봤거든요. 나중에 절에 들어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도 해봤거든요. 저는 그동안 꺅꺅거리는 아이들, 집안에 울려 퍼지는 아파트 안내 방송,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는 차 알람, 경찰차 사이렌 등 하루도 쉬지 않고 들려오는 사람 사는 소리가 좋았거든요. 그래야 제가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이 너무 조용하면 우울해졌죠. 내 내면은 복잡한데, 왜 바깥은 이렇게나 고요할까-하고 말이에요. 타인과 본인을 비교하고, 질투라는 추악한 감정을 품어본 적은 단연코 없었는데, 어쩌면 세상 자체를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봐요. 하지만 마음이 여유로운 상태에서 풍요로운 자연을 마주하니 걱정 하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라켄은 제게 평화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 감사한 여행지예요.
하더클룸 위, 하더클룸 아래
다음 날,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산책을 나섰어요. 걷는 걸 워낙에 좋아하는 데다가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두 팔 벌려 마중 나오니 힐링에 다른 도구는 필요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죠. 그저 튼튼한 두 다리와 쾌청한 날씨만 있다면 그날의 기분도 하루 종일 맑음이라는 사실을요. 솔직히 잠에서 깼을 때 걱정을 했었거든요.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 알람이 휴대폰을 울려댄 탓에요. 스위스는 날씨 영향을 꽤 많이 받는 관광국가라서 모든 일정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기에 3박 4일은 짧을 수도 있었어요. 거기다 패러글라이딩을 예약했기 때문에 기도하고 잠들었는데, 제 간절함을 누군가가 들으셨나 봐요. 정확히 하늘을 거닐 때까지만 햇살을 받을 수 있었죠.
paragliding with Ruban of Skywings
숙소에서 패러글라이딩 업체를 연결해준다는 정보에 국내에서 예약하지 않고 갔었는데, 대성공이었어요. 픽업 차량을 타고 산으로 올라가는 내내 레크리에이션을 맡은 Ruban 씨와 비행까지 함께였는데, 랜덤으로 짜인 팀임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해요.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으면 합니다. 하하. 그만큼 환상적이었어요. 장비와 바람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제 앞에서 다른 비행사 분이 끌어주신 덕분에 두 번 만에 날아오를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더 훨훨 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담당 비행사 분은 한국인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 몇 가지 단어를 알고 계셨는데, '예쁘다, 대박' 이런 감탄사야 그렇다 치지만 왠지 '할아버지'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아내는 뭐라고 부르냐고 묻더라고요. 아버지 앞에 '할'이 붙은 것처럼 어머니 앞에 '할'을 붙이는 대신, '어'를 빼라고 설명했더니 냉큼 알아듣더군요. 이런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신 덕에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답니다. 아, 호수가 에메랄드 빛인 이유는 알프스 산 얼음이 녹아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해요. 다 Ruban 씨가 말씀해주신 깨알 정보였어요.
Do you want 빙글빙글? NO! NEVER!
하늘을 걷다가, 땅으로 착지하면 살짝 몽롱해요. 스케이트 타다가 신발로 갈아 신었을 때랑 비슷할까요. 그러면 사진을 주시는데 이건 추가 비용이 붙어요. 안 사는 분들도 계시다고 들었으나, 이런 데에서 돈 아껴 뭐해요! 냉큼 지불했죠. 저는 USB에, 동생은 휴대폰에 사진을 옮기느라 잠깐 대기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때 중국 관광객 분이 오셔서 동생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걸었어요. 저희는 중국인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듣지 않으셨죠. 문제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는 건데요, 그래서 잔뜩 겁먹고 뒷걸음질 치니까 제 비행사가 나서서 도와주셨어요. 마지막까지 매너와 배려가 장착되어 있으신 분이었어요. 이 글을 보실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Thank you, Ruban.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오전에보다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와 한가로이 휴가를 즐기고 있었어요. 저희도 괜히 들판에 앉아도 보고,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말들을 꺼내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벤치에 앉아 쉬었죠. 점심을 먹고 어디를 갈지 얘기도 했어요. 하더클룸 이후 세워놨던 계획을 다 잊고, 그날그날 결정하기로 했거든요. 피르스트 펀 패키지가 로망이라는 동생 말에 냉큼 이것저것 찾아봤죠. 미리 공부하고 왔지만, 한 번 보는 것보단 두 번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피르스트 펀 패키지는 세 가지 액티비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희가 원했던 건 Mountain cart였어요. 글라이더는 패러글라이딩을 경험했으니 패스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본 듯한 카트가 안전하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웬걸, 대기자 수가 너무 많아서 탈 수 없다는 안내소 직원의 말에 저희는 다른 선택권 없이 Trottibike 표를 끊었습니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그린델발트로, 거기서 곤돌라 정류장까지 걸어 올라가는 내내 감탄했는데, Trottibike를 타고 내려오면서는 입이 조커처럼 찢어져서 내내 깔깔대고 웃었어요.
그린델발트 → 피르스트
Trottibike
위험하다, 넘어져서 크게 다쳐 뼈가 보일 정도다, 스위스 구급차는 타고 가는 순간 100만 원이 나간다 등등 여러 부정적인 정보를 접한 뒤라 불안함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하겠어요. 하지만 역시 막상 타고나니까 전혀 어렵지 않더라고요. 6살에는 스케이트, 7살에는 두 발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로 또래 친구들을 접수했기 때문일까요, 킥보드쯤이야 아무렇지 않았죠. 물론 경사가 급하고 하필이면 이때 비가 내려서 미끄러웠기에 조심 또 조심했어요. 그래서 다행히 안전하게 종착지까지 도착했습니다. 근데, 비 맞으면서 좋아하면 다들 '마이 아파?'하고 장난치잖아요. 저 좀 아픈가 봐요. 동생이랑 정말 조금도 쉬지 않고 웃어댔어요. 엔도르핀이 그 어느 때보다 확확 돌았던 모양이에요. 한국에서도 그럴 때 많아요. 중학생 땐 친구들이랑 가위바위보 내기해서 진 사람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을 뚫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고, 마트에 갔다가 엄마와 폭우를 뚫고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20분을 달려온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날엔 이튿날까지도 꺄르륵거렸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날이 좋지 않아 우울했던 2018년 겨울 오스트리아 비엔나 여행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 남았어요. 인터라켄은 제가 꼭 한 번 더 가야 하는 여행지 NO.1이랍니다.
인터라켄에서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엔 쉴트호른을 찾았어요. 리우텐브루넨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그리취알프로, 거기서 열차를 타고 뮈렌으로 향했죠. 여기 SNS를 뜨겁게 달구는 통나무가 있다는 말에 우산을 쓰고 두리번거렸는데, 기대를 너무 했던 탓인지 정말 덩그러니 나무 하나 있더라고요. 비도 오고, 날도 꾸물대서 보는 걸로 만족하고 다시 케이블카에 올랐습니다. 브리그에서 쉴트호른까지 총 세 번의 케이블카와 두 번의 열차를 탔어요. 가기 전에는 혹시 잘못 타면 어떡하나 근심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쉬워서 다시 가라면 주변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지 싶네요.
쉴트호른 (동생 초상권 보호!)
고도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니라는데, 왜 귀가 먹먹했을까요. 아무래도 브리그에서 스릴 워크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거기다 7월 한여름에 갔는데도 추위가 한국 12월 같았어요. 7월에 내리는 눈이라니, 새로우면서도 설경과 나란히 펼쳐진 안개에 섭섭함도 생겼죠. 앞이 보이질 않았거든요. 그 덕에 라면 냄새 폴폴 풍기는 실내에 들어와 음악 연주도 듣고, 진짜 같은 순록과의 사진 한 컷을 남길 수 있었죠. 쉴트호른은 영화 007의 제임스 본드가 추격전을 벌였던 출연지래요. 그래서 해당 장면이 상영관에서 반복적으로 틀어집니다. 저처럼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게요. 저는 아무래도 미션 임파서블이 더 정감 가긴 하지만, 돌아와서 부모님을 보여드렸더니 기억하시더라고요. 라이온 킹 애니메이션 영화나 해리포터를 정주행 한 다음 영국에 갔던 것처럼 007 영화도 보고 갔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알고 보는 것과 그렇지 않았을 때의 감동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머물렀던 인터라켄
그리움이 가장 큰 여행지를 꼽으라면, 스위스 인터라켄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진을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이상한 감정들이 울컥 올라오곤 하잖아요. 영국은 런던 외에 다른 지역도 탐험하고자 하는 모험심을 불러일으키고, 프랑스 파리는 신혼여행으로 오겠다 다짐하게 만들어요. 스위스 다음에 찾은 이탈리아 세 도시는 음식이 입에 딱 맞아 생각만 해도 배가 고파요. 그런데 스위스 인터라켄은요, 그냥 어딘가가 아려와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상황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뒤돌아 설 수밖에 없는 연인과의 이별이 이렇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돼요. 일기장을 끄적여보는 사람으로서, 스위스는 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지에선 무작정 편안하기만 했으나, 돌아왔을 때는 이리 허해지니, 감성이 풍부해진다고나 할까요.
너는 왜 그렇게 메말랐니, 동정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니, 감정을 어떻게 머리로 조절할 수 있다는 거야, 사랑을 계산하려 하지 말아라... 지인들이 충고랍시고 제게 했던 말들인데, 사실 처음엔 이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민감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뿐이거든요. 아이러니하게 들리지만, 사실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쓰다 보니까 웬만한 일엔 꿈쩍 안 하게 됐거든요. 사회생활을 위해서 연기를 하다 보니 일정 부분의 감정은 컨트롤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제게 사랑이라는 건 가족, 그리고 친구 외엔 쉽게 언급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예요. 여전히 말이죠. 하지만 인터라켄에 다녀오고 생각에 전환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멋모르고 떠드는 말까지 받아들이느라 끙끙 앓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요.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도 그런 다양한 사람 중 하나고요. 타인에겐 특이해 보일 수 있어도, 스스로에게는 '특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어떨까 싶어요. 스위스가 제게 특별한 여행지인 것처럼요. 여러분도 누군가의 잣대를 신경 쓰느라 수고로운 하루를 보내는 대신, 평화로운 나날 보내시길 바라요.